[기획-치킨게임]
이원석의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실린 '한국 학생들의 진로' 란 도표 한 장으로 열 받는 사람이 많다. 착실하게 계통을 밟아 대학까지 진학해도 우리 아이들은 결국 '아사'하거나 '과로사'하거나 결국 '치킨집'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물론 치킨집 중에 3~4년 이상 살아남는 가게도 많지 않다. 이처럼 절망적인 대한민국에서 튀어나온 수능 이야기에 열 받는 학부모도 많을 것이다. 수능 1~3등급은 치킨을 먹고, 4~6등급은 치킨을 튀기고, 6~9등급은 치킨배달을 한다는 이야기.
"세상은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인생을 맡길 필요가 없다. 누군가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과 관련된 일에는 아량을 베풀지 않기 때문이다. 냉혹해져라. 돈을 번 후엔 선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될 수가 있지만 그 이전에는 어림도 없다.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무조건 본인과 가족에게 득이 되는 것으로 결정해야 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강창균, 아라크네, 2005)에 나오는 말이다. 뼈 아픈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독한 말'이다. 이 말을 두고 복음적이다, 또는 비복음적이다 논할 겨를이 없다는 게 필자의 인식이다. '냉정한 사회'에 '동정'은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관심의 세계화'를 한탄하고 있지만, 이 책에선 '남을 돌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강한 것이 약한 것들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다. 강창균은 우리 사회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는데도 어느 날 아침 해고통보를 받는 곳"이라고 했다. "회사에 공헌했는데 왜 자르지?", " 너무 심하잖아."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도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반도덕적 처세론'으로 유명한 빅토르 비얀코는 현대 사회를 "남을 밀어내고, 상처 입히고, 심지어 그가 죽어가는 것을 못 본 체 내버려두고서라도 자신의 생명 유지와 자신의 목적만을 향해 돌진해야 하는 시대"라고 말했다.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ness)에서 강자생존(The survival of the strongest)으로 옮겨간 사회다. 이제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죽이느냐만 남은 사회다. 동정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바이벌 게임처럼 일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결국 죽는다. 세상은 피할 수 없는 먹이사슬에 묶여 있다. 그래도 복음은 기쁨이 될까?
이런 체제를 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자비한 경제독재'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독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우리사회를 지배하도록 순순히 받아들인" 결과라고 꼬집는다. 이른바 경쟁사회에 대한 '도덕적 숙고'를 요구하고 있다.
"권력욕과 소유욕은 그 한계를 모릅니다. 이익증대를 목적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이 체제 안에서, 절대규칙이 되어 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자연환경처럼 취약한 모든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56항)
이 상황에서 교황이 내릴 수 있는 처방은 "친구와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동정 없는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심으라는 뜻일 텐데, 우리는 때때로 사랑하는데 실패한다. 경쟁 대신에 '우정'을 요구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잡으라고 요청한다. 이 시간에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은 이들에 대한 용서를 청하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이란 '세상을 거슬러 발언하고, 상식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이 순간에도 인정사정 없는 세상에 맞서기 위해 강생하여 사람이 되고자 하신다.
뜻밖의 소식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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