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복음]

“자살의 ‘사회적 책임’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여기 아시는 분 있나요? 대학 다닐 때, 어떤 노교수가 가끔 그런 실없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하군요.” <진격의 대학교>는 2045년 청와대의 긴급회의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시작한다. 정치인들은 사회적 책임을 모른 척 하고, 자살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린다. 기업의 노예가 된 대학이 배출해낼 정치인을 풍자하는 대목이다. 소설보다 더 믿기 어려운 ‘대학의 기업화’ 사례를 모아 책으로 펴낸 사회학자 오찬호 씨를 만나 대학의 현주소를 물었다.

▲ 오찬호 씨는 대학의 상업화가 가톨릭계 대학이라고 예외는 아니라고 염려한다. ⓒ이희연

소설 같은 구성인데, 책 내용 중 어디까지 현실인가요?

프롤로그는 소설로 시작하죠. 하지만 그 외에는 현실에 있는 사례 여럿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재미있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서 소설처럼 구성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인 줄 알았다고 하는 분도 있어요. 실제로 한 대학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고, 여러 사례를 모아서 ‘진격대’라는 가상의 대학을 만들다보니 더 충격적이기도 하고 과잉된 느낌이 있어요. 하지만 각각의 사례들은 존재만으로도 충격적이죠. 대학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요.


이런 책을 내게 된 계기는?

처음엔 ‘대학의 기업화’ 문제가 사회학자로서 흥미로운 연구주제였어요. 강의 시간에 제가 관찰한 대학의 기업화에 대해 강의하면, 학생들은 에세이로 자신들이 겪고 들은 사례를 제출해요. 몇 번의 강의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사례가 모이게 된 거죠.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좀 다른데, 제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해마다 달라지는 모습에 자극이 되었어요. 제가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명하면 대부분 그 논리는 이해를 해요. 객관적으로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아무 느낌이 없다는 학생들이 많아요.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나 사회문제에 신경 못 쓰겠다는 건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이고, 요즘 대학생들은 그 문제가 자신에게 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요.


대학생들이 ‘사회적인 감수성이 죽은 세대’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회적 감수성만이 아니라, 사회를 이해하는 촉수가 무뎌지는 것이 문제예요. 사회적 약자들은 사회적인 요인 때문에 약자가 된 사람들인데, 학생들은 사회적 약자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적 해결책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죠. 자살률이 사회적 요인 때문에 증가하는데, 그 문제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거예요. 하느님이 우리 민족만 자살에 적합하게 만드신 건 아닐 테고, 자살률이 전 세계 평균을 훨씬 웃도는데 자꾸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거죠. 대학생들이 나중에 정책입안자나 사회의 리더가 되어서도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이라 생각한다면 아주 끔찍한 사회가 되지 않겠어요? 한편으로는 이 책이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비난하거나, 대학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까 조심스러워요. 대학이란 구조가 우리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봐야 하는데, 나열된 사례만 보고 요즘 대학생들이 한심하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는 거죠.


책에서는 ‘무감’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무감(無感)’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에서 따왔어요. 소통도 활발하고 자율성도 가진 세대처럼 보이지만, 대학생들은 철저하게 자기와 관계있는 정보만 접속하고 나머지는 철저히 배제해요. 취업이 중요하니까 자신의 상품성을 올리는 문제에는 마음이 움직이지만, 그것과 관련이 없다면 어떤 문제에도 아무 느낌이 없어요. 이런 ‘무감’이 차츰 ‘반감(反感)’이 돼요. 자신과 맞지 않으면 관심을 끄는 정도가 아니고, ‘왜 저런 쓸데없는 것이 내 앞에 있느냐.’ 하는 반감이 더 많아요.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하며 재벌문화를 비판하면, 사회문제를 재벌이나 정치와 연결시키지 말라고 반발하는 학생들이 있어요.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선이 단편적인 수준을 넘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자체에 대한 ‘반감’이 있는 거죠.


‘대학의 기업화’라고 하면 기업이 대학을 인수하는 경우가 먼저 떠올라요. 기업이 인수하지 않은 대학의 사례도 이 책에 포함되어 있나요?

대학의 기업화가 성균관대에 삼성, 중앙대에 두산이 들어오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대학 조직 안에 기업이 들어와 있지 않아도, 대학이 생각하고 돌아가는 원리가 기업의 논리와 같아지는 거죠. 예를 들어, 최근 고용노동부 조사를 보면 160개 대학 가운데 청소노동자에 대한 노임단가를 준수하는 곳이 한 곳도 없었어요. 청소노동자의 노임단가가 6,800원쯤 됩니다. 오십 대 이상의 사람들이 야근수당도 없이 일하니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건데, 그것보다 적은 돈을 주려고 용역회사에 맡기는 거예요. 일부 대학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드러났잖아요. 돈이 되면 하고, 돈이 안 되면 안 하는 기업 논리가 모든 대학에 퍼져 있는 거죠.

대학을 평가하는 방식도 기업 논리와 유사해요. 1995년도부터 대학 진학률이 50%를 넘어서죠. 당시에 문제제기를 하고 신중하게 해결해야 했는데, 골든타임을 놓쳤어요. 이제 와서 대학인원을 줄이겠다는 건데, 그 방식이 취업률을 기준으로 줄 세우기를 한 다음 아래쪽부터 잘라내는 거예요. 사람들은 무조건 위층에 붙어있지 않으면 잘려나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겠죠. 취업률이 높은 경영학과만 남는다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에요. 대학이 경영학과를 늘린다고 기업이 일자리를 늘려주는 건 아니잖아요. 도리어 모두가 경영학을 하면 스펙이 같으니 취업 경쟁이 더 치열해질 거예요. 그런데도 경영학을 하면 취업이 잘 될 거라는 환상이 있어요. 축구로 따지면 공격수만 뽑으려고 하는 거죠.


학과 선택만이 아니라 교양수업을 들을 때도 자기검열을 한다는 내용도 있었죠.

스펙이 비슷한 사람과 최종면접까지 가서 떨어졌다고 합시다. 면접관이 “시민혁명사를 들었네요?” 하고 물으면, 증거는 없지만 그 과목을 들어서 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시민단체 활동을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다음엔 교양과목을 들을 때도 철저히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 거죠.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성학 강사가 자기 과목은 시험 망쳐도 된다고 이야기해요. 여성학과 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부는 성적이 좋으면 욕먹는다는 거죠. 저도 학생들에게 면접 보러 가면 이 강의에서 배운 것과 반대로만 생각하라고 해요. 그럼 찍히진 않는다고요.


영어를 숭배하는 대학에 대한 이야기도 있던데, 이 부분을 강조한 이유는?

▲ <진격의 대학교>, 오찬호, 문학동네, 2015.
영어를 숭배하는 대학에 등장하는 사례는 상위권에 드는 열 개 대학의 사례를 위주로 쓴 거예요. 이 책이 지잡대(지방의 유명하지 않은 대학)를 욕하는 내용이 아니라, 보편적인 대학의 흐름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어요.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가려면 외국어 영역에서 수능 1등급을 맞아야 해요. 그런 학생들이 학교에 가면 외국에서 살다온 학생들의 발음에 위축돼서 학문적인 호기심을 발휘하지 못해요. 가르치는 교수도 발음이 좋지 않다는 소릴 들을까봐 준비한 자료를 읽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하죠. 학생들은 수업 내용에 자극을 받아서 도서관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 영어학원으로 향하고요. 원어민 같은 발음을 강조하다보니 내용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거죠.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공부가 아니라, 단순 암기에 익숙한 공부로 변질되는 거예요. 심지어 <훈민정음 해례본> 강독 수업을 영어로 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공부의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거죠.


취업해서 돈 벌고, 그 뒤에 개인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굳이 사회나 대학을 바꿀 필요가 있냐는 질문에 어떤 답변을 해줄 수 있을까요?

강연을 다니다 보면, 자신이 지금은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없으니 돈을 많이 벌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바꾸겠다고 해요. 이런 생각에는 세 가지 오류가 있어요. 일단 최고가 되는 게 힘들죠. 두 번째는 남을 돕겠다는 마음으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해요. 이미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죠. 세 번째로 사회는 엘리트들이 계몽한다고 변화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이 문제를 인식해야 바뀔 수 있어요. 뛰어난 사람 혼자 아무리 외친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데 어떻게 변화할 수 있겠어요.

이런 생각을 ‘걸인의 철학’이라고 해요. 일단 내가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변화하겠다고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 먹고 살게 되면 더 잘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자본주의를 성찰하고 그 부작용을 살필 기회는 영영 없는 거죠. 더 무시무시한 건,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살필 때 그것의 좋은 점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에요. 한 쪽에서는 사람이 아프다고 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자동차가 많이 늘었다고 합리화하는 거예요. 경제성장과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같은 저울에 놓을 수 있겠어요.


가톨릭에서 설립한 대학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겠죠?

가톨릭 정신이라는 게 학교 설립자의 정신이잖아요. 그렇다면 대학 구성원들이 가톨릭 정신으로 학교를 운영하는데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가톨릭 학교니까 다른 학교처럼 학과 개편도 하지 않고 인문학을 살리겠다고 하면, 학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겠지요. 성당과 교목처가 있고, 그리스도교 윤리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가톨릭 정서가 교육 전반에 개입해야 하고, 대학은 시대의 변화에 관계없이 이러한 정서를 지키려고 애써야 하죠. 그런 노력이 얼마나 있었는지 성찰해봐야 해요. 가톨릭 대학의 이사장과 임원들이 특정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위에서 결정하면 아랫사람들은 쉽게 따르는 분위기예요. 덕분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대학이 변화하는 속도도 빠르죠. 비판적인 성찰을 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건 아닌가 싶어요. 또한 가난한 이웃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교육만이 아니라, 계속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서도 가톨릭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죠.


‘대학의 기업화’를 막을 대안은 무엇인가요?

사실 대안은 다 아는 이야기예요. 인문학을 없애면 안 되고, 대학을 취업률로 구조조정해서는 안 된다.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시민을 배출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지켜지지 않잖아요. 특별한 대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문제를 직시하는 게 필요해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 자꾸 늘어나잖아요.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이 훨씬 많은데, 어두운 면을 덮어두자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잘못된 부분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어둠을 줄일 수 있는 거죠.

‘새로운 대안을 말하지 않으면 현상유지 하겠다.’라는 건 전형적인 기업의 논리거든요. 정확한 해결책을 찾기 전에는 기존의 컨베이어 벨트를 유지하겠다는 거죠. 기존의 생산체계를 멈추는 순간, 손해를 보게 되니까요. 기업만이 아니라 사회와 대학이 대안 중독증에 걸려 있어요. 문제를 인식하고 여론을 모으고 정치인을 압박하는 모든 과정에서 시민이 생겨나고 우리 자신도 수혜를 받는 것인데, 이런 과정을 우리가 낯설게 생각하는 거죠.


대학 구성원이 아니더라도 대학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제 딸이 올해 여덟 살인데, 눈만 뜨면 역사책을 찾아요. 그냥 보는 것도 아니고 시대별로 그래프까지 그려가면서 체계적으로 읽더라고요. 하루는 딸이 거실에서 즐겁게 역사책을 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불안해지더군요. 역사책은 저렇게 열심히 읽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텐데, 나중에 사학과에 가서 취업 못하면 어쩌나, 차라리 영어를 열심히 하면 좋을 텐데. 딸이 자신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기뻐하고 격려할 일인데, 반대로 딸이 보는 역사책을 다 불 질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대학이 정신을 못 차리니까 여덟 살 딸을 둔 아빠도 마음이 급해지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어릴 때부터 자녀의 상품성에 관련된 것만 투자하는 거죠. 그만큼 놓치게 되는 게 시민정신이죠.

시민정신이 책 몇 권 읽고 밥상머리에서 몇 번 가르친다고 습득되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교육해야 하는 부분이거든요. 제가 강의할 때 처음 시민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는 학생들은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다른 강의에서도 유사한 이야기를 몇 번 들어야 비로소 조금 이해가 돼요. 일상은 취업에 관한 내용으로만 채워졌으니까, 시민정신에 대해 들으면 생소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강사가 이상하게 보이는 거죠. 시민정신과 인간성에 대한 교육을 경시하는 대학의 문화가 우리 삶과 무관할 수 없어요.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내 상사가 되고, 내 옆집에 살고, 우리가 보는 영화를 만들고,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지요.


이희연 기자 /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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