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세월호 그리고 엄마, 아빠]

성호 엄마가 예전에 아들과 더불어 찍었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분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얼마나 눈물을 쏟아내셨으면 이처럼 물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수척한 표정이 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분을 처음 인터뷰할 때, 잔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발음하시고, 어느 순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눈물이 다시 괴어올랐다. 아직 아이를 떠나 보내지 못한 채, 아니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는 지도 모른다. 이 아이를 통해 문득 선연히 눈앞에 떠오른 것은 십자가에서 끝내 내려오지 못한 예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한 젊은이의 죽음을 이천 년 동안 기억하는 종교다.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예수님은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죄 없이 정치-종교권력에 의해 참살된 분이다. 그 실패자의 운명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그분처럼 살겠다고 서원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그분의 그림자 뒤에는 늘 엄마 마리아가 있었다. 아들의 죽음 때문에 날카로운 비수에 심장이 찔린 듯 아픔이 가시지 않는 여인이다.

처음 아기를 잉태하였을 때 기쁨으로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8)라고 노래했지만, 곧이어 시메온에게서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라는 아픈 소식을 들어야 했던 여인이다. 세월호 참사로 이승을 떠난 박성호 군의 어머니 정혜숙 씨의 마음도 예수 엄마 마리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품에 안고 모든 자식들이 행복한 나라를 위해 생애를 거슬러 걸어가야 한다.

브라질의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이런 시를 남겼다.

만일 보습날이 씨앗을 깊이 심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그대를 찢어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감수하라.
그대가 거기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처럼
그대는 아무 결실도 없이
남게 되리니.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더라도 상흔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인 최영미는 "이윽고 상처가 무늬가 되었다."라고 했지만 상처든 무늬든 그 흔적을 통해 부모는 자식을 기억해내고 "이윽고 오래" 그 자식과 살아간다. 하느님은 이미 아이들을 품에 안으셨고, 이제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무너진 가슴을 위로할 것이다. 가족의 경계가 넓어지고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자식이 될 것이다. 가방을 메고 교복을 입고 가는 다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남의 자식 같지 않음을 경험할 것이다. 불행 속에서 더 많이 사랑하고, 슬픔 속에서 더 많이 위로할 것이다.


뜻밖의 소식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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