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이철수 화백 인터뷰

충북 제천 박달재 평동리에 아주 나지막이 앉아 있는 집. 푸른 솔가지와 분홍 진달래가 먼 길을 달려온 손님에게 인사를 건넨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인 이여경 씨의 고운 목소리가 들린다. 냉이 넣고 끓인 그 맛있는 된장국 냄새와 부인의 미소. 누구에게든 고향의 내 집을 찾아온 듯한 느낌을 주는 ‘이철수의 집’이다.
요즘 판화가 이철수 화백의 ‘나뭇잎 편지’에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위로의 말이 이어지고 있다. 위로의 말은 거대하지 않다. 밥상머리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식구,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 주인, 불러도 웃기만 할뿐 대답을 하지 않는 내 식구. 그의 편지에는 그런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보내는 마음이 담겨 있다.
“가정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밥 먹고 하는 삶이 있는 공간이지요. 저는 가정이 격렬한 전투 중에도 기대고 쉴 수 있는 참호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이 곧 전쟁터 같아서요.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전장에서 살아가려면 가정은 더욱 가꿔나가야 하는 곳입니다. 세월호 이후를 지켜보면서 소중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가정을 일깨워주고 있다. 잃어버린 가정을 통해 우리사회는 공동체로서의 가정,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내고 있다. 작년 아이들이 물에 빠졌던 그날 밤, 어느 엄마인들 차가운 바닷물 온도를 온몸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애도하고 작별한 권리, 희생자 가족들에게 내주어야
“이제 죽은 이들을 놓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희생자 가족들이 빠져 있는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살면서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더구나 우리 부모세대, 또 그 이후 모두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트라우마가 굉장히 컸던 사회가 아닙니까? 한국전쟁과 민주화 투쟁을 겪으면서 집집마다 폭력에 희생된 구성원이 하나씩은 있던 그런 사회이지요. 다만 이번에는 어떤 의지나 사상의 대립이 빚어낸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죽음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이 사고로 희생되었으니 더 억울하고 안타까운 것이지요. 또 미디어의 발전으로 우리는 죽음을 생중계로 목격하게 된 사실이 더 리얼한 것이 되었어요. 사회구성원이 함께 그 트라우마를 겪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으니 모두 애도하는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화백은 덧붙인다.
“그러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라는 감정들은 삶의 무늬 같은 것인데 그게 한가지로 흘러 과잉되면 자연스럽지 않게 되는 것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희생자 가족들의 애도할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가버린 이를 슬퍼하고 애도하는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 땅에도 묻지 못하고 가슴에도 제대로 묻지 못하는 남은 가족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는 말이다.
“생명에 대한 질서를 생각하면 이제 죽은 이들을 놓아야 합니다. 1년이 지났어요. 작별인사를 해야 합니다. 죽음의 길에 들어서면 우리는 모두 없어지는 과정 속으로 들어가지요.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안의 기억도 희미해져야 하는데 그런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있잖아요. 사람은 아픔을 계속 가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슬픔을 계속 붙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상황,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우리사회 전체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 지금의 상태가 희생자 가족들에게 너무 과한 짐이 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말로 하기가 망설여진다고 했다. 혹시 매정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조심스럽다고 한다. 희생자 가족들에게 인간이 원래 가져야 하는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고, 개혁이나 사회적 합의니 하는 담론은 다른 사회구성원들이 떠맡아야 할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희생자 가족과 사회가 할 일을 분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유가족에 대한 진정한 깊은 예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철수 화백은 잠시 조각도를 멈추고 질문하듯이 말한다.
“우리는 왜 어떤 계기를 만나지 못하면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왜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가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재난은 지금 어디선가도 일어나고 있어요. 꽤 많은 이들이 지금도 그런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자극을 못 받고 동력을 받지 못하느냐고요? 꼭 많은 이의 죽음이라야 충격을 받나요? 똑같이 가족이 겪는 슬픔입니다. 상시로 눈뜨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삶의 태도를 이 화백은 이렇게 설명한다.
“늘 자신을 살피고 사는 삶, 그게 아닌가 싶어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들을 보면 흥분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는 그렇지 않은지?’ 묻고 싶어요. 제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는 다 참 조심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거든요. 예민하게 자신을 늘 살피는 태도를 놓치지 않아야 그런 실수를 가까스로 모면하고 살 수 있는 거죠. 사건이 벌어지고 공론화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비난하고 비판하지요. 그런데 정작 나, 우리는 빠져 버리고 없어요. 우리 자신은 죄 없는 사람처럼 그러는데, 그건 아니지요. 자신을 성찰적으로 들여다보는 태도를 가지고 살면 좋겠어요. 거저주면 다 좋아하고 힘 있으면 함부로 쓰고 싶어지는 그런 게 우리 마음 안에도 다 잠복해 있어요. 먹고 살기 바쁘다고 하는데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은 있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어서 아닐까.....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각사각 목판의 나무를 벗겨내는 소리, 봄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와 함께 이화백의 작업실 넓은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한 순간을 그림으로 잡아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 전 30주년 선집을 내면서 그는 아직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보내는 ‘나뭇잎 편지’의 수신인이 7만여 명을 훌쩍 넘는다.
“자연스럽게 자연의 호흡과 닮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사회적인 현안이 생기면 그렇게 못하지요. 제가 욕심을 내려놓자고 그런 제안을 늘 하는데요, 저는 우리가 우리 몸만 유심히 들여다보고 살아도 마음이 뭘 하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욕심은 마음이 부은 상태예요. 우리는 몸에 상처가 나면 어떻게라도 알아차리고 치료하려고 하는데 마음의 아픔은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마음의 모든 욕심, 욕망을 통증이라고 느껴야 해요. 마음의 병적인 상태를 살필 줄 아는 게 자신을 지켜볼 줄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마음 안에 어른스런 존재 하나를 모시고 살아야
“일상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해”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인간가족’이라는 말로 우리가 함께 떠밀고 가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해서 다 같이 힘 모아 나가자는 우리는 큰 의미의 가족일 것이다. 이화백은 가족의 책임을 묻는다.
“옆에서 부추기는 소리를 하는 이들은 많은데 정작 임무 교대 하겠다는 이가 없어요. 열심히 하던 분들이 쉬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어요. 아프고 힘들면 쉬게 해야지요. 예수님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 그러셨잖아요. 우리도 좀 닮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쟁쟁쟁...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그의 목소리에 섞여 들린다.
“주변에서 상식 있게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보면 안도하게 되요. 일상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중요하고 큰 변화가 가능하게 되지요.”
이화백은 다들 자기마음 안에 어른스런 존재 하나를 모시고 살기를 권한다. 각자 마음 안에 조는 듯 마는 듯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한소리 해주시는 그런 어른이 한 분 있다면 함부로 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나쁜 짓 안하는 버릇을 키우자’는 말이지요. 저는 근본이나 기본을 놓치지 않고 세상과 관계하는 게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놓아야 한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요. 무엇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나요? 예를 들어서 가정이 우리 삶에서 주는 격려와 에너지를 생각해 보세요! 소중한 게 어떤 것인지 금방 알게 되지요!”
말과 사람이 딱 하나가 되는 이가 있다. 이철수 화백은 그런 사람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무렇지 않은 듯한 세상 속에서 그가 있다는 게 안심이 된다. ‘뒷산 무덤처럼’ 여일하게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를 보면 참 좋다.
“이렇게 사는 게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세상은 험한 파도가 들이치는데 혼자만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요.”
그러나 그의 칼날은 쉬지 않고 나무를 깎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세상을 벼리는 힘이 된다. 목판에 새기는 그의 쟁기질로 우리 온 마음이 옥토로 일궈지고 있는 거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