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사회교리-4]

▲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산상수훈을 하셨던 갈릴래아의 진복성당. 벽면에는 복음서의 팔단진복이 차례로 쓰여있다. ⓒ한상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6-19) 
 

“가난한 이들, 소외받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다시 한 번 강력히 확언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사랑의 실천에서 우선하는 특별한 형태의 선택을 말하는 것으로, 교회의 전통 전체가 이를 증언한다.”(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간추린 사회교리, 182항)

“누가 이들을 위해 울어줄 것인가?”

2007년에 브라질에서 제5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가 열렸을 때, 당시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베르골료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진보하고, 세계화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오직 강자의 권리만 유효합니다. 이런 까닭에 사회적 부정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그 결과 국민 대부분이 사회에서 소외받고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된 사람들은 ‘착취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로 취급 받습니다. 따라서 소유의 불공정한 분배는 심각한 사회적 죄악이며 단죄 받아야 하는 범죄입니다.”

그분이 교황이 되고나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 섬이었다. 이곳에 있는 불법 이민자 수용소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관심의 세계화’를 비판하며 형제애를 촉구했다. “이주자들이 바다에서 죽어 가고 있다. 희망의 배가 죽음의 배가 되고 있다”며, “이들을 위해 누가 울어줄 것인가?” 세 번 씩이나 물었다.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자선과 연대, 탐욕에서 해방되어야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에서 “가난도 부유도 부자들의 끝없는 탐욕에서 나온다”며, “우리가 투쟁해야 한다면, 부자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투쟁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 공정한 분배를 통해 의로운 관계를 세우고, 부자니 가난한 사람이니 하는 구분이 아예 필요 없는 형제애를 이루는 투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가난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자선’과 ‘연대’를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당장에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밥을 나누고, 그들이 더 이상 굶지 않도록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말 그대로 ‘우선적’인 것이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당장 가난한 이들을 해방하기 위한 투신과 연대가 요청되지만, 이들이 이루는 형제애 안에서 부자들은 탐욕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복음서에서 세리 자캐오는 탐욕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만끽했다.

“형제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형제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라는 말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었다. 지난 8월 한국에 온 첫날 주교단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면서,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다”고 하셨다. 아울러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고” 우리 모두가 심판받을 때 적용될 ‘규범’ 역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얼마나 잘 응답했는지 묻는다. 이날 교황은 거듭 한국 주교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당부했다.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잘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사랑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마태 11,5) 예언자의 표현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을 고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메시아적 행동을 밝히신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시어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박해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정받기를 원하고 계신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교황청 신앙교리성, 자유의 자각, 50항)

 

뜻밖의 소식 편집부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