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조현철]

예수는 이상주의자였을까, 현실주의자였을까? 세상의 전망에 관한 한, 예수는 철저한 이상주의자였다. 하느님 나라, 세상에 대한 예수의 전망이었다. 여기에 혼신의 힘을 바쳤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전망의 구현 수단에 관한 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루카 10,3-4) 예수는 자신이 세상의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고수하는 한, 예수와 그 제자들은 결코 세상의 호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주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맘몬이 지배하는 사회의 환영을 받는다면, 기뻐할 게 아니라 반성해야 한다. 필시 영합과 변질이 일어났을 것이니.

허나 이어지는 예수의 지시는 조금 의아하다. 그토록 험난한 세상으로 나가는데, 하나라도 더 챙겨야 할 판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니! 예수의 당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아무리 힘을 키운다 한들, 양은 결국 양일뿐! 이리를 당해낼 수는 없다. 하느님 나라에 반하는 당시의 지배 세력, 힘으로 맞서서는 전혀 승산이 없다. 대안! 전혀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현실주의자, 예수의 판단이다. 그 길에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중요하지 않다. 세상의 힘은 비우고, 거기에 하느님의 힘을 채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 벼르고 있던 이리 떼의 허를 찌른다.

 

우린 어떤가? 현실을 빌미로, 너무 쉽게 이상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가? 아니,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긴 하는가? 타이타닉호는 빙산을 무시한 채 항해하다 침몰했다. 빙산이란 현실을 무시한 결과였다. 그들에겐 ‘타이타닉’만이 현실의 전부였다. 비현실적인 현실 인식, 이른바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불러온 참사였다.(더글라스 러미스) 현실을 비현실로 간주하는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지금 여기서도 계속된다. 도무지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 304명의 생명이 바다 속으로 사라져도, 근본 원인을 직시하지 않는다. 어린이집에서 유아학대가 연이어 일어나도, 유아들을 시설에 맡기는 세태에 대한 반성은 찾기 힘들다. 대입과 취업 준비로 전락한 교육제도, 요지부동이다. ‘돈’이 현실의 전부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맘몬이 지배하는 현실,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돈으로? 힘으로? 결국 맘몬을 섬기게 될 뿐이다. 그렇게 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다. 대안, 전혀 다른 길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당부하셨듯이,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와 신발을 내려놓는 것, 사실상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하여, 상상을 해본다. 부모들의 반란! 부모들의 절반이 ‘현실’의 요구대로 아이들 키우기를 거부한다. 젊은이들의 반란! 학생들의 절반이 대입과 취업을 정점으로 하는 왜곡된 교육 ‘현실’에 순응하길 거부한다. 요지부동의 현실에 균열이 나지 않을까? 비현실적이라 말하는가? 그럼, 도대체 어떤 ‘현실적’인 길이 있을까?

이제 남은 건,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누가 먼저 나설 것인가? 챙기기에 바쁜 세상에서 비움의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했던 예수! 그러니 이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몫이 아니겠는가? 두 발로 굳건히 땅을 딛되, 두 눈으론 언제나 하늘을 보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자. 거기, 전혀 다른 길, 새로운 길이 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체 게바라)

조현철 신부 /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