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심명희]

살짝 탄 얇은 껍질을 벗기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노란 속살을 드러내는 간식이 있다. 겨울철 별미, 군고구마다. 예전엔 찬바람이 불면 골목마다 자리 잡고 겨울을 알리던 군고구마통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군고구마의 빈자리를 파고드는 주전부리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젊은 직장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이곳은 호텔, 고급 음식점, 값비싼 커피점이 즐비하지만 겨울철 간식거리를 파는 길거리 노점들도 사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떡볶이, 순대, 군밤, 옥수수, 붕어빵, 어묵, 호떡,..
3년 전이었던가? 서울시내에서도 몇 군데 없다던 군고구마통이 이곳에 등장했다. 신기하고 반가워서 응원차원에서 덥썩 만원어치를 샀다. “첫 손님입니다. 먹어봐요. 맛있어요.” 첫눈에 봐도 친절하고 자상한 주인아저씨가 큼직한 군고구마 13개를 꺼냈다. “3개는 덤이다”라며 종이봉지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아저씨 옆에는 사십대의 아주머니가 매일 껌딱지처럼 붙어서 귤을 판다. 천진하고 미소가 좋아서 “부부이신가 봐요?” 물었더니 주인아저씨가 “동생이에요. 장애가 있어요” 한다.
올해도 여름 내내 동생만 과일 좌판에 앉혀두고 여름 내내 공사장에서 일하던 아저씨가 군고구마를 굽는 드럼통에 하얀 연기를 뿜고 다시 나타났다. 평소 같으면 고구마만 사고 금방 돌아섰을 텐데 아저씨의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예사롭지 않아서 “추위도 오기 전인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물었다. “요즘 일이 없어요.” 그는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젊은 시절부터 광산과 공사장을 전전하면서 지적장애를 가진 여동생을 돌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고개를 돌려 입을 여는데 기침이 쏟아졌다. 기침은 멈추지 않았고 점점 더 깊은 소리를 냈다. “폐에 가래가 가득차서 수술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수술비가 만만찮아요. 일이 없어서 빚이 많거든요.”
일주일 전부터 군고구마통이 보이지 않는다. 걱정이 돼서 빌딩의 경비원 아저씨에게 물었다. “빌딩 1층에 프랜차이즈 고구마 맛탕이 들어온대요. 그 가게 사장이 장사에 지장이 있다고 군고구마통을 치우라고 했어요.” 값싸고 위생적이고 달달하고 레시피도 다양해서 젊은이들의 입맛에 딱 맞는 간식거리인데다 포장까지 깔끔하게 해주는 퓨전 고구마 간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에 비교하면 한 개에 천 원 이상 하는 군고구마는 젊은이들에게는 귀족 간식거리다. 인근 직장에 다니는 아가씨가 군고구마를 사러왔다가 그냥 돌아간다.
허름한 목도리를 하고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동생이 홑겹 운동화 밖으로 맨 발목을 발갛게 드러난 채 휑한 찬바람을 맞고 있다. 삼천 원이라고 써 붙인 귤 봉지를 들고 오천 원을 주고 돌아서는데 “안돼요!” 그녀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내 팔을 붙잡고 봉지 안에 귤 몇 개를 더 넣어준다.
‘적선은 싫어요’라는 뜻일까? “안돼요!” 내 귀에는 그녀의 그 짧고 단호한 외침이 고단한 현실 속에서 나온 맑고 당당한 노래로 들렸다. 가난과 장애의 강압에도 부서지지 않고 살아온 자유롭고 튼튼한 마음의 노래로 들렸다. “동생이 귤을 파는데 추위를 많이 타요. 따뜻한 군고구마통이 꼭 있어야 해요.” 지금쯤 오빠는 동생의 난로가 될 군고구마통을 놓을 새 자리를 찾아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덤으로 얻어먹던 따끈따끈한 군고구마의 온기가 아직도 손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듯하다. 세상 추운 마음을 덮어주는 작은 선물처럼.
심명희 /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