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동 아빠스에게 길을 묻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11월 30일 대림1주일부터 2016년 2월 2일 주님봉헌축일까지 ‘봉헌생활의 해’로 설정하였다. 봉헌생활은 특별히 수도자들에게 의미가 깊은 일이지만, 평신도들 역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복음에 따라 예언직을 수행하며 세상에 희망을 낳는 일이다. 이참에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박현동 아빠스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한상봉 기자

봉헌생활이 무엇인가요?
봉헌생활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교황님께서 복되신 동정녀의 자헌기념일에 수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따르면 거룩한 삶은 축성생활을 하는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여기서 수도자들은 ‘친교와 일치’의 전문가로 공동생활을 통해서 복음을 따르고, 천상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죠. 이러한 삶은 특별히 수도자들의 ‘예언자적 증거’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언자적 증거라면?
교황방한 때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꽃동네에서 저희 분도목공소에 맡겨 특별 제작한 큰 의자에 앉지 않고 평범한 의자와 탁자를 사용하셨잖아요. 이 의자에 앉든 저 의자에 앉던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만, 교종께서 이런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이신 것은 어떤 사인입니다. 수도자와 성직자, 하물며 고위성직자도 ‘섬기는’ 사람이지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래서 소형차를 타시고, 방탄차도 타지 않고 그런 거죠. 그 행동 안에는 뭔가 있다는 거죠. 우리가 뭔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그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챙기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교종께서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시지 않아도 우리 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 그게 예언자적 모습이죠. 수도공동체도 마찬가지죠. 시대의 징표에 민감하게 깨어 있는 삶이 수도생활이고, 예언자적 삶입니다. 새롭게 요청되는 표징이 많은데도 타성에 젖어서 예전에 하던 대로 생활하면 그것은 예언자적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죠.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는?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이나 수도자들에게 전한 첫 번째 회람에서 교종께서는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복음에 따라 살 때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고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는지, 그쪽으로 자꾸 우리를 초대하는 거죠. ‘가난한 교회’를 강조하는 이유도 이웃에게, 그것도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면 복음이 주는 기쁨이 없기 때문이죠.

쉽지 않은 질문인데, 가난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요?
가난의 문제를 다룰 때에도 부자들에게 ‘왜 가난하지 않냐’고 따져 물을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가난’이란 말을 ‘연대’라는 말로 바꿔서 전할 필요가 있어요. 만약 누가 큰 자연재해를 당했다거나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죠. 이때에 그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시혜자와 수혜자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연대라는 말에는 공동체적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연대’란 말이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어요. 내가 돈이 많기 때문에 누굴 도울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고, 나도 이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분담한다는 의미죠. 꼭 돈이 아니라도, 다른 식으로 서로 도울 수도 있어요. 아직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서 ‘연대’라는 말이 ‘데모’처럼 부정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연대가 아주 긍정적이고 품위 있는 말로 인식될 수 있다면, 훨씬 우리 사회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남이 아니라 우리 식구고 우리 형제니까, 저 사람이 아파하고 있으면 함께 아파하고,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도와주고, 반창고라도 있으면 붙여주자는 것이군요.

우리 수도원에서는 성 목요일에 주님의 만찬 미사를 마치고 나면 공동식사를 합니다. 이 날은 큰 솥에 밥을 한가득 해서, 한솥밥을 나눠 먹습니다. 교회 공동체란 사실 그리스도의 몸을 나눠 먹는 한솥밥 식구잖아요. 그래서 연대란 신학적인 차원을 갖는 거죠. 지금은 밥만 나눠먹고 있지만 나중엔 더 많은 걸 나눌 수 있겠죠. 예수님처럼 신앙이 자라면 생명까지 나눌 수도 있겠지요.

가난의 영성과 연대성 같은 것들이 모두 ‘사회교리’에 담겨 있는 내용인데, 신자들이 좀 부담스러워하거나 불편하다는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사회문제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라서 신자들 사이에 틈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동안 주교회의나 교회 장상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복음과 사회교리에 입각해서 교회의 입장을 발표하고 적절하게 짚어주었다면 신자들이 사회교리에 친숙해지고, 서로 의견차이 때문에 골이 깊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정의평화위원회 차원에서는 몇 가지 발언을 하긴 했지만, 주교단 전체의 의견이 아니라서 이제 어떤 분들은 듣기 거북하면 주교님들이 하는 이야기도 귀를 막고 아예 제쳐놔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그렇지만 지금 많은 주교님들이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을 보이시고 계시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한상봉 기자/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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