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복 받으시라고요?]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행복한 사람은 누구나 ‘나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의로운 사람, 성인, 거룩한 순교자들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우리 눈에는 고통스럽게 생애를 마감했던 사람들인데,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beatus, 福者)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행복하려고 결혼하고, 또 얼마 안 가서 이혼도 한다. 여행을 하고 복권을 사고 증권투자를 하거나 재미있는 연속극을 보는 것도 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다. 서점에서 행복에 이르는 비결을 가르쳐 주겠다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10가지, 100가지 비결을 전달하는 책을 아무리 읽어도 속시원하지 않은 것은, 결국 ‘성공’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그리 만만치 않다. 누구나 출세하지 못하고, 늘 ‘희망사항’으로 남는 게 ‘성공’이다.
교회에서는 ‘성인’들을 ‘진짜 행복한 사람’이라는데, 그것도 내키지 않는다. 보통 성인은 “결점이 없고 기적을 행했고 세상에서 기꺼이 고통을 겪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성인전에서, 알폰소 성인은 “탄식하면서 식사하러 갔다”고 적혀 있다. 식탁에 앉아서도 오직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만 생각했다고 한다. 고행을 바라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었다. 이것은 성인에 대한 오해다. 오히려 성인이란 탁월한 사랑과 선함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일깨워준 사람들이다. 그들은 균형 잡힌 삶을 살았고, 유머감각을 지녔고, 연민과 관대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은 늘 기쁨 속에 서 이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인 말고도 지금 우리 곁에서 살고 있거나 날마다 곁을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도 성인이 있다. 우리가 모를 뿐.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말이 있다. 예수님이 베타니아의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그 필요한 한 가지는 로버트 엘스버그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이란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과 광고판이 전하는 거짓행복을 위한 약속을 무시하고,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 뒤에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이승이 저물면 저승에서 천국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하느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천국”이라고 했는데,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시므로 매일의 삶이 천국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천국의 문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다. 정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달라 보인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더라도 행복은 지금 나와 우리 안에서 곧바로 시작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신부가 깨달은 것도 이것이다.
“세상 곳곳에 있는 하느님의 선물을 보라!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 부드러운 풀과 새들을 보라! 자연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우리 인간은 죄 많고 어리석다. 우리는 삶이 곧 천국임을 알지 못한다. 삶이 천국임을 이해할 때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있고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울게 것이다.”
뜻밖의 소식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