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특강 박기호 신부 발제 전문]

▲산위의 마을 아침전례.ⓒ박오늘 기자

1. 왜 수행을 말하고 있는가?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발레리)

사람들은 늘 나아지는 것을 추구하는데, 추구의 끝에는 유토피아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나빠지거나 무의미를 경험할 때 삶에 대해 부정하게 되고 관습적 삶을 불신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해답을 얻고자 고뇌하며 이상과 현실에 대한 전반적 성찰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하게 된다.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존의식이다. 불신하는 삶을 단절하여 새로운 삶에로 접속하는 이탈을 ‘출가(出家)’라 한다면, 새로운 삶에 필요한 몸을 만드는 의지와 노력 일체를 ‘수행(修行)’이라 할 것이다. 왜 우리는 뜻밖에도 ‘수행(修行)’을 화두로 꺼냈으며 그 배경은 무엇일까?

(1) 위기 위식: 시스템만 탓할 수 없다.

사람이 시스템을 만들고 시스템이 사람의 삶을 규정한다. 그러나 개인과 시스템이 등가(等價)적인 것은 아니다. 시스템보다 시스템을 지배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주목하게 되었다. 개인에 의한 시스템의 합법화와 폭력이 더 큰 문제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2) 이성과 지성의 한계

이념(운동) 따로 삶 따로인 시대를 맞은 것인가? 한국 사회 지성은 이기주의와 권력을 정화시키지 못했고 무기력 무가치한 모습을 경험하게 했다. ‘지성의 협력 없이 시스템이 유지되지 않는다.’ 는 통찰은 이성과 지성에 대한 불신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3) 자기다움의 상실

경제와 과학기술의 연합과 글로벌 권력화로 인해서 전세계 모든 민중의 삶을 지배하는 구조가 관철되었다. 결과가 주는 퇴행적 삶의 구조는 환란의 위기의식과 자기성찰로 ‘사람부터 회복하자!’는 상황의 급선무를 밝혀주고 있다. 머지않아 세계 경제시스템에 대한 의문과 근본적 문제가 청문회에 서게 될 것이다. 세계가 화려해도 내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무상이다!

▲민들레 서원을 하고 있는 예수살이 공동체 청년들.

2. 공동체 수행

공동체(Shilter)는 피난처이어서 소사회(Little Society)를 이룬다. 공동체 마을 생활은 수행생활 이다. 한 사람이 살아온 환경으로 맺어진 생각과 습성의 부정성 극복을 과제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 공동체 삶이기 때문에, 공동체 수행에는 세상의 모든 문제가 농축되어 있다. 따라서 공동체 수행 대상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수행 대상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다. 다.

(1) 공동체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스팩트럼은 폭 넓다. 개인의 좋은 생각과 삶을 모아놓은 집합을 공동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 마을의 정의(定義)는 ‘공동체의 이상과 영성에 결합된 삶’을 공동체라고 한다.

(2) 공동체의 구성요소

‘영성, 관계, 노동’은 공동체의 존립 기둥이다. 영성은 이상과 신념, 가치성과 그 실현의 내용으로서 ‘무슨 생각으로 사느냐’ 를 다룬다. 관계는 가족들, 이웃들과의 조화롭고 평화로운 생활에 필요한 기술에 관한 것이다. 노동은 생산 활동에 관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공동체는 관계 문제가 실제 수행의 중심을 이룬다고 보겠다.

(3) 수행이란 무엇인가?

부정성을 대치할 만큼의 목표 세계를 설정 혹은 확보하고 그 삶을 절대화 하여 ‘되어야 할’ 삶 만들기, 그 삶에 맞는 몸 만들기의 모든 계획 수련 성찰 진보 완덕을 수행이라 한다. 수행 형식으로서 개인적 수행(욕망, 두려움, 의무감)과 집단적 수행(수도원, 승가의 수련지위) 등이 있을 것이다.

(4) 그리스도교 수행 원리

모든 종교 수행이 핵심에서는 대동소이 할 것이나 그리스도교 전통적 수행에는 정화(淨化)와 조명(照明)의 원리가 있다.
- 성찰: 나를 발견하기, 공동체와 견주기(수행목표 정하기)
- 정화: 버림의 수행(一日一損) 의지와 은총
- 조명: 얻음의 수행(一日一益) 은총과 의지
- 완덕: 생활에 거듭나기

(5) 수행의 대상

- 본성적 욕구: 식욕, 수면욕, 성욕
인간 개체(몸)를 만드는 필수요소는 식욕 수면욕 성욕으로 자연(自然) 생리(生理)이다. 욕구가 없으면 죽는다. 그런데 동식물은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버리는데 인간은 의지를 가진 존재여서 좋은 것은 계속 취한다.

- 사회적 욕망: 소유욕, 명예욕, 지배욕
인간 사회(삶)와 관계하는 요소다. 소유욕 명예욕 지배욕은 본성적 욕구를 가진 몸이 관계의 군집을 이루면서 성취와 경쟁의 형태로 발전한다. 욕구와 구별하기 위해서 ‘욕망’으로 표현했다.

* 본성적 욕구가 수행으로 다루어지면 욕망은 다룰 수 있게 된다고 보기 때문에 본성 욕구의 수행이 우선하는 것이다.

3. 우리 시대의 수행목표 : 원안의 삶

공동체 마을이 추구하는 삶은 곧 우리 시대가 추구해야 할 현실 가치지향적인 삶의 작은 모델이다. 시대를 치유하고 건강한 삶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삶’이 아니라 ‘복구의 삶’이다. 대안이란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 과거의 삶에로 거슬러 갈수록 대안적 삶의 형태가 되기 때문에 필자는 ‘원안(原案)의 삶’이라고 칭하고 있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 삶, 운영방식은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적 과제의 해답이 될 수 있다.

(1) 시대의 징표

1) 기술의 진보, 인간의 퇴화
상품이 사람을 만든다. 상품은 육신의 정상적 기능을 박탈했고, 전문직 분업화는 모든 사람을 신종 준장애자로 만든다. 과학으로 개량된 식품들은 현대 질환을 지배하고 있다.

2) 끝없는 성장 경제의 잔치(글로벌 금융 시스템과 거품 경제)
금본위 제도의 철폐 이후 세계는 무한 달러의 발행으로 세계 각국 정부와 지방 자체단체를 빚더미에 몰아넣고 부동산의 거품을 조성했고 그 붕괴의 고통은 모두 민초들의 몫이다.

3) 산업화의 위험한 질주: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산업화는 전기문명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속적인 에너지 확대와 대량 전력의 소비는 핵발전의 당위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4) 과잉사회: 시간과 공간의 대량 확대로 인한 중복 역할
교통편의 발달로 이동이 빨라지고 노동 연령도 길어졌지만 피로의 누적으로 인한 삶의 질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으며 무의미에 의한 질환을 부르고 있다.

5) 자발적 노예화와 자기 착취
강제노동과 임금착취의 근대적 문제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제 각자의 능력에 따르는 상품주의 가치관을 개별화시키고 스스로의 성과에 의한 일종의 자기 경영으로 높은 수익을 위해 스스로를 학대하고 착취하게 한다.

6) 노동의 상실과 우울증
노동 행위가 자동화, 노동 전문화에 의해 왜곡 위축되고 육체노동이 사라졌다. 이로 인한 건강 적신호로 국가 관리 비용의 폭발적 증가를 맞고 있다. 육체 건강의 정상적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필연적으로 우울증이 만발하게 된다.

* 이 외에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현상들은 저마다 생각만큼이나 무한할 수 있을 것이다.

(2) 공동체가 추구하는 원안사회

1) 대가족제도의 회복
대가족제도 가정에는 출산에서 죽음까지의 완벽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대가족제도를 가정에서 복구하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성되고 수행된 이들이 아니라면 공동생활을 통해서 가능하다.

2) 농업의 복구
농업노동은 노동과 청정 먹거리의 섭생과 경종축산순환농업으로 농촌문제를 해결하며 도시과밀화 현상을 해결하는 근본적 대안이며 식량의 위기를 준비하는 측면도 있다.

3) 작은 삶과 정주생활
산업화와 자유무역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작은 삶, 자급의 삶에 있다. 작은 삶에도 인간의 생노병사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다. 정주의 삶과 상통한다. 유희의 삶은 도시인의 특징이고 정주는 농산어촌인들의 특징적 생활양식이며 수행자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4) 공동체 교육
자녀교육은 상업주의가 조성하는 경쟁체제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으로 노동(삶)과 학습이 합일된 교육(노학일체/ 간디의 나히탈림)을 인격주의 가치관으로 교육한다. 

5) 생의 주기 수정
근대교육에 의해서 궤멸된 청소년 정신연령의 하향평준화 문제를 복구시키고, 결혼의 주도권을 부모가 가져야 하며 25세 이내에서 혼사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은퇴가 사람마다 적절해야 하며, 건강한 노령과 죽음을 위해 무한 수명연장의 상업주의 의학을 거부한다.

4. 결어: 수행, 고행의 삶

원안의 삶의 추구는 이미 길들여 진 전기문명과 도시화, 분업화 생활환경에 적응된 삶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완전한 기대는 자녀들일 수 밖에 없다. 기술제품에 길들여진 개인의 삶은 그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기간에 관계없이 극기와 고행을 요구하게 된다. 자녀들의 삶은 부모가 고행을 감내하는 생활로만 궤도수정의 가능성을 가진다. 편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기술문명을 발달시켰는데 이제 그 문명을 버린다는 것이 ‘극기’이고 ‘고행’이다. 현실적이지 못하지만 다른 어떤 대안이 없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수행이다.

“생각은 햄릿처럼, 행동은 돈키호테 처럼!”(톨스토이)

박기호 신부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 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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