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의 김대중 토마스 모어 선생 추모글

▲유품 중 김대중 전 대통령이 손때가 묻도록 보시고 간직했던 성경

김대중 토마스 모어 선생님께서 마침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셨답니다. 김 토마스 선생님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안식에 들기를 기도합니다. 가족들의 슬픔과 그 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이들과 함께 애통한 마음을 함께 합니다.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님은 신심이 좋으셨습니다. 도쿄에서 납치되어 선실에 던져졌을 때 하얀 옷을 걸친 예수님을 붙들고 한번만 더 살려주십시오. 애걸했었다는 신앙고백은 이미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님의 본당인 서교동 성당에서 4년 동안 주임을 맡았습니다.

가끔 자택으로 미사를 봉헌해 드리러 갔었는데 늘 인자한 아버지의 밝은 모습으로 매일미사 집과 오래된 듯한 가톨릭 성가집을 들고서 나오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퇴임 첫 번째 미사에서 말씀으로는 몸이 너무너무 안좋아서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못나갈 정도로 힘들었다고 술회하면서 지금은 조금 좋아진 거라고 하셨습니다.

토마스 모어 축일에는 꼭 생미사를 신청하셨고, 일본에서 생환되었던 기념일에는 해마다 생환감사미사를 신청하고 가족과 몇 명의 지인들과 함께 참석하셨습니다. 본당 교우들의 바자회에는 당신이 선물로 받았던 기념품들을 기증해 주셨습니다.

산위의 마을로 와서 한창 지내던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에 전화를 주셨던 일이 있습니다. 다른 본당으로 간줄 알았는데 공동체 하러 간 것이냐 지낼만한가 힘들지 않은가 좋은 일이니까 성공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성경을 선물하며 박기호 신부가 쓴 카드


열심한 신앙인으로서 시대적 변혁기 한국 사회의 정치인으로서 김대중 님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현실 정치인이라는 생각으로만 보기는 이해를 넘어서는 너무 큰 이상가였습니다.

현실주의자는 타협을 잘해서 자신의 가치지향을 견지하지 못해 천박해지는 경우가 많고 이상주의자는 이상을 땅에 뿌리내리지 못해 자기 궤멸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이 강한 지도자는 현실을 무시해버린 나머지 정적에 의해 비극적 종말을 맞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상이 정치에 물들면 변질되기 십상이고 정치가 이상에 메이면 무력하기 쉬운 것이 현실입니다. 공자의 현실과 노자의 이상이 한 인간과 동시대 안에서는 사실상 공존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김대중 선생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잃거나 변질시키지 않은 위대한 현실주의 정치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한 현실 정치에 기반을 두고서도 자신의 철학과 시대의 소명을 한번도 놓치지 않음으로서 현실 세계를 버리지 않고도 자기 이상을 실현했고 정치를 고귀한 도구로 보았기에 절차라는 민주주의를 손상시키지 않았던 분으로 더러운 정치판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집권을 통해 이상을 실현한다.’ 는 정당 정치의 이념을 철저히 관철한 사람
해야할 일 앞에서 비겁하지도 물러서지 않았고
타협을 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기본에서 양보함이 없었던 사람.
최고의 권좌에서 하층민의 눈물을 잊지 않았던 사람.
고착화 된 분단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부수어야할 대상으로 보고 덤볐던 사람.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에서 권양숙 여사를 보고서 그렇게 퍽퍽 울었던,
동병상린의 아픔을 가진, 감성과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간디의 이상도 김구의 현실도 박정희의 정치도 뛰어넘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칩니다. 정말 그런 분을 우리 생전 이 땅에서 다시 만나기는 어렵다 싶습니다.

내가 모르는 인간적인 허물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겸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거의 완덕에 가까웠던 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예상도 했었지만 정작 떠나셨다고 하니 마음이 너무 허허 합니다.
김추기경님과 바보 노무현에 이어 김대중 님까지. 큰 별들이 무리져 떨어지는 2009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라는 독려의 해 인것 같아요.

인류 문화사의 족적을 보면 위대한 인물들은 항상 동시대에 짧은 시간을 두고 무리지어 태어난 특징이 있습니다. 이 땅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무더기로 태어나고 성장하고 우리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비전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홀로 서라. 국민들 홀로 서라. 원로들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함께 손잡고 좋은 나라를 건설하라. 이런 건 아닐까요.

고인의 삶을 추모하면서 그분께서 남기신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양심은 양심 없는 행동이 만들어낸 대한민국을 치유할 것입니다.

주님, 김대중 토마스 모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생명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박기호 (신부, 예수살이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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