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지피티4(Chat­GPT)가 출시되면서 인공지능 열풍이 일고 있다. 써 보니 환호할 만큼 성능이 경이롭다.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도 제57차 평화의 날 담화 제목을 ‘인공지능과 평화’로 삼았다. 그러면 이 놀라운 인류의 성취는 우리 종교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마침 써 놓은 글이 있어 독자들과 나누려 한다. 먼저 내가 2017년 '한국그리스도사상'(제25권)에 실었던 논문 '제4차 산업혁명시대 정보문화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부를 소개한다.1) ‘데이터 종교’다. 이에 이어 두 차례에 걸쳐 ‘인공지능과 종교’를 연재할 것이다.

기술과 종교

“하얀 거품이 이는 급류에서 카약을 타려면, 적어도 흐르는 물만큼 빨리 노를 저어야 하며, 우리에게 닥치는 정보, 변화, 교란의 엑사바이트 속을 항해하고 싶다면 그 물결이 흐르는 것만큼 빨리 흐를 필요가 있다.”

"기술의 충격"을 쓴 케빈 켈리의 이 말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종교에 요구되는 태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변화를 앞서가려면 물의 흐름보다 더 빨리 노를 저어야 하듯이 종교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앞서려 할 때도 이 흐름보다 빨리 노를 저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2차 산업혁명 이후 종교는 한 번도 변화의 급류에서 빨리 노를 저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물이 흐르는 속도에도 맞춰 본 적이 없다. 각 혁명을 주도하는 기술이 그에 상응하는 가치관, 태도, 사회구조의 신속한 변화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웹(web) 기술을 예로 들어 본다. 알다시피 웹의 기본 정신은 공유다. ‘웹은 자유로운 정보 공유, 자유로운 의사 개진과 자기표현, 열린 마음과 정보, 정보 분배를 통한 민주화, 규제와 단속(斷續)이 없는 네트워크를 통한 자유로운 정보 흐름 보장, 컴퓨터와 정보매체에 대한 무제한 접근, 전 세계를 연결하는 지구사회(global society) 구현’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 웹의 정신과 목표는 (1)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접속하여 이용할 수 있는 중단 없는 개방형 네트워크 구축, (2) 전 세계 어디서나 누구나 자유롭게 접속하여 원하는 정보를 창출하고 유통하며 획득할 수 있는 네트워크 구축, (3) 전 세계를 연결하는 컴퓨터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전자지구촌(Electronic Global Village) 실현 등이다.

이처럼 웹이 가진 정신과 목표는 애초에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있었고 종교의 적응 속도보다 앞서 있었기에 단순히 이 가운데 일부 기술을 활용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종교가 새로운 문화를 선도할 수 없었다.

가톨릭을 비롯해 모든 종교는 이 웹 기술 가운데 일부를 종교 내부에서 소통을 촉진하거나 선교(또는 포교)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그쳤다. 그 사이 인터넷은 전 세계를 연결하였고 가상 공간을 삶의 제2 공간으로 만들었다.

종교가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을 강조하는 데 반해 웹은 고정된 정체성을 해체하고 유동적이고 잠정적인 것으로만 보아 종교와 충돌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제3차 산업혁명 때부터 각 혁명을 대표하는 기술이 대부분 이와 같은 속성을 띠고 있었다. 당연히 종교가 따라가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기술은 단지 기술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기술에는 그에 상응하는 정신과 목표가 있다. 인간을 이롭게 하면서 동시에 그에 적응하는 수고도 요구한다. 경우에 따라 기존 사고방식과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종교는 내부적으로 이런 요구에 따르기 어려운 사정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종교가 모든 경우라 할 순 없어도 대부분 세상의 흐름을 추종할 뿐 흐름에 맞추거나 앞서지 못하였다. 그 결과 종교는 동시대 인간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했고 새로운 기술에 적응한 세대(generation)도 잃어 왔다. 과연 종교는 첨단 기술이 즐비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운위(云謂)하는 오늘 여전히 가치 있는 의미 체계와 세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종교학자, 신학자들은 이 질문에 아직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유발 하라리가 기성 종교는 곧 데이터(data)교에 자리를 내줄 것이라 전망하였다. 그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종교를 유일하게 예측하였기에 그가 미래 종교라 말하는 데이터교를 먼저 소개한다. 이어 변화를 종교의 본질로 파악하는 기술문명학자 케빈 켈리의 주장을 소개하며 종교의 미래를 전망해 본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데이터교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현상이나 실체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2)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데이터교를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2022년 1월 인터넷 이용자 수는 5029만 명이었다. 이 숫자는 2023년 전체 인구 5140만 명의 97.8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다. 전 세계 인터넷 이용자수는 2023년 현재 약 54억 명이었고 이는 세계 인구(2021년 78.88억)의 68.5퍼센트에 해당하였다. 우리나라의 이동전화 이용자수는 2022년 1월 말 기준으로 7315만 명이었고(2대 이상 사용자 포함) 이 가운데 스마트폰 회선이 5472만 대였다(역시 인구수를 초과한다).

이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SNS, 이메일, 온라인 쇼핑, 온라인 게임, 각종 지식 검색 등을 이용한다. 이용자들은 하루 평균 이 서비스들을 최소 1시간에서 최대 4시간 이용한다. 청소년은 평균 4.7시간 이용한다.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각자가 미디어에 올린 문자, 정지 화상, 동영상과 각종 데이터와 정보는 서비스 제공자의 정보저장소나 기타 누군가의 저장 장치에 저장된다.

아직 정보나 지식으로 가공되지 않은 이 데이터를 주(週), 월(月), 년(年) 단위로 분석하면 이용자의 생각 패턴이 정규 분포를 이룬다. 이 데이터를 수년치 더 모아 분석하면 이용자의 생각 패턴이 더 명확히 그려진다. 심지어 1분 뒤에 그가 내뱉을 단어 또는 하게 될 행동도 예측할 수 있다. 무의식에 머물러 있던 데이터를 이런 기술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신도 모르던 모습도 읽어낼 수 있다. 영성 수련을 오래 하거나 깊이 하는 이들도 드물게 해내는 이 일을 인공지능을 응용한 빅데이터 기술이 손쉽게 해내는 것이다.

만일 이 정보를 그가 자주 이용하는 의사에 제공하면 그의 정신병 여부를 진단할 수 있고, 징후가 있을 경우 그에 상응하는 처방을 받을 수 있다. 발병 가능성, 사고 발생 가능성도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예측이 불가능했던 미래, 즉 미래의 불확실성이 확실성 영역 안으로 들어온다. 예측과 관리가 가능한 영역이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그가 하는 일, 금융 거래, 상품 구매 등에서도 가공되지 않은 데이터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미 상품구매 사이트에서는 이용자의 주문 경향을 분석하여 같은 상품을 샀던 다른 이의 구매 패턴을 분석해 새로운 상품을 추천하고 있다. 구글은 이메일에서 사용한 단어를 빅데이터 기술을 이용해 분석한 다음 이용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상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큰돈을 벌어 왔다. 만일 여기에 자신이 직접 제공한 앞서 수많은 데이터를 추가한다면 이 예측은 이용자 욕구에 더 잘 부응할 것이다.

이렇게 한 개인과 집단이 지속적으로 사이버(혹은 전자) 공간에 공개하는 데이터를 모두 모아 분석하면 한 인간의 미래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할 경우 모두는 아니어도 다수는 데이터 분석을 종교의 가르침보다 더 신뢰할 것이다. 이미 종교인이 제공해 오던 정신 영역의 서비스를 상담 심리사, 신경정신과 의사, 심리 분석가와 심리 치료사들이 분점(分占)한 지 오래다. 심지어 종교인까지 이들에게 의존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데이터교는 전통적 의미의 종교는 아니지만 이러한 능력을 통해 종교의 지위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 유발 하라리의 예측이다. 디지털 미디어 이용자가 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한 데이터를 누군가가 분석해 그들이 가진 문제에 최적의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많은 이가 이 기술과 데이터를 더 신봉하게 될 것이다. 암 진단에서 인공지능 왓슨이 인간보다 더 높은 정확도를 보여 주면서 환자들이 인간 의사보다 그를 더 신뢰하게 만들었듯이 데이터교도 그렇게 인간을 자신의 신도로 만들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가 예상되는데 “가톨릭교회와 여타 유신론 종교들은 창조하는 힘에서 반응하는 힘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 혁신적 경제, 획기적인 사회사상을 창조하기보다 버티기 작전을 쓰기에 바쁘다. 다른 세력이 퍼뜨리는 기술, 방법, 사상들에 대해 번민하는 것이 요즘 이들의 주된 일과다.”3) 하라리는 요즘 종교가 처한 현실을 이처럼 희화화하였다. 종교가 처한 곤혹스러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풍자한 것이다.

기술을 통제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종교는 기술에 의해 자주 ‘종교적 비전의 범위와 한계’를 제약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신기술은 오래된 신을 죽이고 새로운 신을 탄생시킨다”4)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알고리즘들이 인간보다 더 잘 가르치고 진단하고 디자인할 수 있을 때 종교는 무엇을 할 것인가?”5)

실체 상실

기술문명학자 케빈 켈리가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종교에 위협적일 것 같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다른 유일신 종교에도 그럴 것 같다.

유일신 종교는 고정된 실체(substance)를 전제한다. 불변하는 본질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케빈 켈리는 종교에 다음과 같이 도전한다. “우리 사회는 계층 구조의 엄격한 질서로부터 탈중심화의 유동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명사로부터 동사로, 유형의 생산물에서 무형의 되어 가기로 나아가고 있다. 고정된 미디어에서 혼란스럽게 뒤섞인 미디어로 나아가고 있다. 저장에서 흐름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가치 엔진은 답의 확실성에서 질문의 불확실성으로 나아간다.”6) “무형의 디지털 세계에서는 정적이거나 고정된 것은 전혀 없다. 모든 것이 변해 간다.”7)

제4차 산업혁명을 달리 ‘인간생활 영역 대부분이 디지털 세계로 편입되는 현상’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편입되면 방금 켈리가 말했듯이 모든 것을 흐르는 것으로, 즉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유리, 구리, 전파로 이루어진 신경들을 엮어서, 우리 종은 모든 지역, 모든 과정, 모든 사람, 모든 인공물, 모든 감지기, 모든 사실과 개념을 연결하는 지금까지 상상할 수도 없던 복잡성을 지닌 거대한 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배아(胚芽) 단계의 망은 우리 문명의 협업 인터페이스, 이전의 그 어떤 창안물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감지하고 인지하는 장치를 탄생시켰다. 이 메가 발명품, 이 생물, 이 기계는 만들어진 다른 모든 기계를 포섭함으로써, 사실상 우리 정체성의 본질적 요소가 될 정도까지 우리 삶에 배어드는 유일한 것이 되었다.”8)

우리가 믿는 신 대신 점차 거대한 전자 정보망을 인간 정체성의 본질적 요소로 여기게 될 것 같다는 켈리의 주장은 유신론적 종교에 근본적인 도전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삶은 갈수록 더 복잡해지겠지만 우리는 적응할 것이다. 결코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9)

호모 파베르에게 기술은 신체 기능의 확장이다. 그런데 기술은 일정 수준까지는 인간에 순응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인간에게 명령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 제4차 산업혁명을 추동하는 기술도 사회적 통제 안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자체의 논리에 따라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다.

이런 기술의 변화에 대해 종교는 제3차 산업혁명기부터 적응에 실패해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수 신자와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종교가 이 변화를 선도하거나 동행하기를 포기한 순간 종교는 전통의 틀에 갇히게 되는 까닭이다. 이 상태에서 종교는 현상을 유지하며 남은 이들에게 행복감을 줄 테지만 사회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긴 어려워진다. 이 모습이 지난 기간 종교가 세상에 보여 준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통계 지표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모습이 그 예들이다. 미래에도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변화하는 현실을 읽을 수도, 그렇다고 동행하거나 앞서는 일을 하기도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1) 일부 통계는 최신 자료로 업데이트하였다.
2)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김영사, 2017, 503쪽.
3) 같은 책, 380쪽.
4) 같은 책, 372쪽.
5) 같은 책, 436쪽.
6) 켈리(2017), "기술의 충격", 민음사, 425쪽.
7) 같은 책, 13쪽.
8) 같은 책, 430쪽.
9) 케빈 켈리(2017), 343쪽.

박문수

가톨릭 신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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