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참으로 변하기 힘든 것이 종교라는 생각이 든다. 제도도 제도지만 종교 영역에서 종교인이 보이는 보수성 때문이다. 여기서 보수성은 익숙한 것을 그대로 고수하는 속성을 가리킨다.

변화에 저항하는 종교인의 보수성

2010년 <MBC>에서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5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아마존에 사는 부족들에 관심이 있어 본방을 사수하였다. 어느 편에선가 턱 밑 살갗을 뚫고 나무를 끼우고 사는 ‘조에족’이 나왔다. 피디가 조에족에게 물었다. “왜 나무를 턱 밑에 끼우고 사는 겁니까? 불편하지 않으세요?” 조에족 가운데 한 젊은이가 답했다. “불편해요.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계속 이렇게 해 와서 그냥 하는 겁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별것 없는 이유로 시작된 일도 대를 거듭하면 지키는 게 능사가 되는 것이 보수성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다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저 종교인에게 이런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턱 밑을 뚫어서 나무를 끼우는 아마존의 조에족. (이미지 출처 = MBC '아마존의 눈물' 갈무리)

종교인은 특히 미디어와 신기술에 보수성을 보인다. 문자가 발명되었을 때는 구전(口傳)을, 대중 매체가 발명되었을 때는 활자를 담은 종이책을 고수하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태도가 크게 약해졌지만 고령층과 일부 경건한 신자들은 여전히 활자 문화를 고수한다. 이는 대부분 고령자가 새로운 미디어에 적응이 더뎌 일어나지만 보수성도 영향이 크다. 지금처럼 미디어의 변화 속도가 빠른 시대에는 이 보수성이 더 강력해진다. 결국 이 보수성이 데이터교 확장을 억제하였다. 인공지능은 데이터교의 연장이니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어도 이런 종교인은 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가 젊은이가 사라지고 고령자만 가득한 교회, 성당, 법당, 회당이다. 일부 유대교 회당, 모스크, 힌두교 신전은 다를 수 있겠다. 유대교 회당은 일부 근본주의 교파가 수용을 거부하고 있고, 모스크와 힌두교 신전이 상징하는 지역들은 추종자에게 최신 정보미디어의 영향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해 보게 되는 점이 하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새로운 인공지능 기술 때문에 그리 요란스럽지 않은데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요란할까? 필자도 뾰족한 답은 없다. 다만 과거 이동전화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한 미디어 연구자가 비평했던 것이 답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한국은 생산기지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동전화가 대중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생산기업은 해외시장의 불확실성(리스크로도 옮길 수 있다)을 줄이기 위해 내수를 진작시키려 한다. 이를 위해 기술의 효용을 과장하고 뒤처지면 큰일 날 것처럼 광고로 소비자에게 위기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호기심, 좋게 말하면 얼리어댑터로서의 관심이 이를 촉진한 측면이 있다.

인공지능도 그렇다. 인공지능 기술에 앞선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들에 비해 기술의 효용을 더 긍정하고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요란하다. 우리나라도 인공지능 측면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다 보니 그런 측면이 있다. 게다가 이 기술은 디지털화(정보화로 옮겨도 되겠다)가 많이 된 나라일수록 효용이 크고 전파 속도도 빠르다. 가까운 일본은 적어도 이 영역에서는 우리나라보다 크게 뒤져 있기에 호들갑을 떨긴 해도 정보화 기반이 취약해 확산 속도가 느리다. 그렇다면 인공지능도 이전 유사 기술들에 비해 보급 속도가 빠르긴 하겠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더디게 수용될 것이라 전망하게 된다. 

종교에 남을 것   

인공지능을 적용한 기술이 일상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사람이 할 일이 거의 남지 않을 것 같다. 특히 패턴이 있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면서 돈이 많이 드는 일은 퇴출 1순위다. 인공지능 업계의 한 전문가는 노동의 미래를 이렇게 전망했다. ‘인공지능이 대부분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아마도 몸과 몸이 만나는 일, 즉 대면으로만 가능한 일만 남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 대부분은 소득이 높지 않다. 그래서 인구 대부분은 근근이 먹고 살 것이다. 그래서 기본소득이 중요해질 것이다.’ 비관적인 예측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부득이 이행한다 하더라도 속도는 조절할 수 있다. 다수가 이런 미래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 기업, 국가 간 빈부격차는 더 커져 다수는 지금보다 더 빈곤해질 수 있다.     

그럼 종교는 어떻게 될까? 인공지능 종교의 중요 양상인 ‘데이터교’가 대세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인공지능 종교도 대세가 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대면 접촉을 고수하고 활자 문화를 숭상하며 기존 관습과 전통을 중시하는 고령자들이 종교를 지켜낼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종교에 인공지능 도입이 가능한 영역은 제한적이다.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이 생존의 중요한 수단이 되는 나라에 속한 종교와 아닌 나라에 속한 종교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 인공지능이 생존에 중요한 수단이 되는 나라는 이미 제도 종교가 쇠퇴하고 있으므로 이 흐름이 가속화되지 않을까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을 적용한 기계들이 인간의 약점을 극복한 것이라 칭찬을 받는데 역설적이지만 이런 기계가 극복하고 있는 요소들이 인간의 고유성일 수 있다. 이를테면 끊임없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는 측면이다.

기계는 ‘시편(psalm)’을 쓰지 못한다. 설사 흉내를 내더라도 그 고난에서 오는 고뇌를 인공지능이 공감할 수 없다. ‘공감 compassion’은 인간의 고유함이다. 공감은 육체와 감정을 가진 인간이 전인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감을 기초로 다른 인간과 연대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함이다. 따라서 육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감’은 마지막까지 종교에 남을 소중한 자산이다.

강론, 설교는 이미 '케이블 티브이', '유튜브'를 통해 비교 평가가 이뤄졌다. 실제 이 분야의 능력자들이 공간, 소속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인공지능은 이와 같은 이들이 생산하는 콘텐츠와 유사한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으므로(무엇보다 평신도도 이런 정도는 다 지피티한테 구할 수 있으므로) 이보다 탁월한 수준 또는 체험에 기초한 강론, 설교를 할 수 있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이전에 나왔던 가르침은 모두 인공지능이 분석, 종합, 출력할 수 있고, 이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정형(定型)화되어 있으므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확률적으로 빈도가 높고 소구력 있는 메시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몸으로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자기가 직접 체험한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깊은 영적 통찰력을 보여 주며, 실천을 통해 말이 가진 힘을 보여 주는 일처럼 종교 본연의 역할과 기능이 미래의 가능성이 높은 영역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 특히 챗지피티4 같은 지능은 정신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게 확실하다. 이 때문에 이런 작업 결과를 식별하는 능력, 평가하는 능력, 과제 부여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전의 지식 습득 능력이 여전히 유효하리라는 것이다. 인공지능도 인간이 새롭게 생산한 지식, 창의적 예술품이 있어야 더 발전한다. 따라서 공부의 역할은 크게 줄지 않는다.

신기술을 활용하면서 뇌의 기능과 공간을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생긴 여유 공간을 인간들은 어떻게 활용할까? 창의적이고 성찰적인 작업에 쓰는가 데이터 스모그를 생산하는 데 쓰는가? 현재는 소수만 창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종교는 여유가 생긴 뇌를 이런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창의력과 성찰적 능력이 감소하는 것이 기존 흐름이었으므로 이 흐름 역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측면에서 뇌의 기능을 사용하게 될 것이고 이 때문에 정신 문제를 치유하려는 움직임은 커질 것이다. 이는 종교가 할 역할이다.

종교의 생명력은 강하다. 미래를 선도하진 못하지만 지키는 데는 명수다. 그래서 주류는 되지 못해도 존속은 할 것이라 보게 된다. 그렇지만 아쉽다! 앞선 종교를 전망할 수 없는 것이....

박문수

가톨릭 신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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