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입문하려는 이의 동기는 대체로 그가 바라는 바와 일치한다. 누군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종교에 입문했다면 이 동기가 대체로 그가 종교에서 바라는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물론 한두 가지 동기가 전적으로 입교를 결정하지 않고 또 바라는 바의 전부도 아니다. 그 동기와 바라는 바도 그야말로 대표적인 것일 뿐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대부분은 자기 마음을 움직인 내적 동기를 잘 모른다. 이런 동기는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눈치를 채는 경우가 흔하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데

지난 칼럼에서 새 신자의 가장 큰 입교 동기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 하였다. 이 동기는 비단 천주교에 입교하는 이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그러면 이들이 바라는 ‘마음의 평화’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 말에는 ‘현재(또는 그동안)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못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설문조사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따로 묻지 않아 이 답을 알기 위해서는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야 한다. 필자는 다행히 이와 관련된 빅데이터가 많아 이를 기초로 이들의 마음을 읽어보려 한다.

경제난

물질적 가난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사람은 마음의 평화가 이미 깨져 있고 제도 종교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사실 이런 이들에게 제도 종교가 해 줄 것이 많은데 국가 사회복지 수준이 비교적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가 이 역할에 소홀하다. 설사 도움이 된다 해도 제도 종교에는 자신보다 대부분 형편이 나은 이들이 있으므로 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달갑지 않다. 이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깨는 가장 큰 원인인 경제 문제가 입교의 일차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관계의 어려움

그동안의 경험에 미뤄 볼 때 가장 큰 동기는 ‘관계의 어려움’이었다. 이 어려움은 일차적으로 부부 간, 부부와 자녀 간, 형제 간, 시부모와 며느리 간, 처가와 사위 간의 관계와 같이 가족에서 온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큰 어려움이 부부 관계다. 가장 가까이 있는 만큼 어려움도 그에 비례해 커진다. 두 번째는 연인, 친구,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는 관계이기에 여기서 틀어지면 심리적 고통이 배가된다. 세 번째는 직장 분위기, 직업 적성 등이다. 특히 억압적인 조직 문화를 가진 직장, 적성에 맞지 않는데 생계를 위해 억지로 일해야 하는 경우는 마음의 평화가 심각하게 깨진다. 이 세 가지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접촉 빈도가 높은 관계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이다.

이러한 동기를 가진 이들은 제도 종교 안에서 새로 시작하는 관계가 세상과 정반대일 것이라 기대한다. 천국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자기가 탈출하고 싶어 하는 공간과 확연히 대비되는 곳일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만이 실제로 이런 행운을 얻는다. 대부분은 이 공간도 세속과 확연히 구별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기대가 컸던 탓에 미미한 장점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기대가 좌절되거나 상대적 비교우위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은 곧 소극적이 되거나 냉담을 선택한다.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막상 해결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존 구성원도 대부분 마음의 평화를 찾아 들어왔는데 이곳에서 다른 이를 새로 맞는 일이 일상이 되면 이 평화가 깨지는 까닭이다. 그저 할 수 있을 만큼 해야 하는데 이들이 먼저 평화를 누리고 다른 이의 평화까지 보살피려면 마음의 크기가 커야 한다. 이들도 누릴 권리가 있으니 무작정 양보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게다가 남은 이들은 결속력이 더 강해지는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새로 들어오는 이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된다. 새 입교자 숫자가 기존 신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때는 이런 문제가 덜하지만 현재와 같이 입교자가 소수일 경우에는 영향이 크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세상에 대한 회의

관계의 어려움이 결국 세상에 대한 환멸을 갖게 하고 대안적인 사회로 종교를 선택하게 만드는 경우가 일반적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관계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세속 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 때문에 구도의 방편으로 제도 종교를 선택한다. 궁극적인 평화를 얻고 싶어 하는(존재론적인 문제에 답을 얻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진지한 이들이 성직자와 수도자의 길을 택한다. 불교에서는 출가를 택할 것이다. 이들보다 덜 진지한 이들은 평신도로 남아 공동체 안에서 구도의 방법을 찾게 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기존 본당(성당) 단체에 들어가거나 수도회 재속회 가입, 본당 범위를 넘어선 평신도 단체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러는 교회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이런 이는 다원주의 성향이 강하고 소속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다. 이런 이들은 본당에서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는 이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본당만큼 자신을 지지해 줄 준거집단이 적어 관심을 지속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이들은 머지않아 아주 적극적이 되거나 떨어져 나가거나 둘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당연히 후자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전 종교의 분위기

천주교 전례의 엄숙함과 격식, 성당 건축 양식, 장식과 음악에서 오는 거룩한 분위기에서 평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개신교에서 개종하는 이들 가운데 많다. 두 교파의 확연히 대비되는 전통과 방식이 영향을 준 것이다. 이들은 전에 있던 교파나 종파에서 얻지 못한 종교적 분위기를 천주교에서 만끽한다. 이곳에서 누리는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아도 전례가 좋고 분위기가 좋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어떤 좋은 것도 영원할 수 없다. 권태가 찾아오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권태가 찾아오면 집단의 구속력이 거의 없었기에 이탈이 앞의 두 경우보다 더 많이 일어난다.

건강 상실

몸이 아픈 이들도 마음의 평화를 갈망한다. 장기 질환, 불치, 난치병 환자에게 치유는 곧 마음의 평화다. 이들에게 치유는 복음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구원이다. 실제로 병을 통해 종교의 깊은 본질을 만나는 이들이 있다. 치유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임종을 앞두고 대세를 선택하는 이들도 이와 유사하다.

이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욕구’는 사람의 다양한 비구원 조건과 연결돼 있다. 대부분은 기존 삶에 대한 회의가 영향을 준다. 회의가 큰 만큼 제도 종교에 대한 기대도 크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본인 노력 못지않게 기성 신자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들이 새로운 이를 돕기 위해서는 본인 자신이 먼저 마음의 평화를 누려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누리는 마음의 평화가 더 커야 한다. 그러니 이들이 충만한 평화를 누리도록 돕는 것이 궁극에 새 신자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

 

박문수

가톨릭 신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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