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니모 조제 다 마타(Jeronimo-José da Matta, 馬熱羅, 1804-65). 포르투갈 라자리스트(Lazaristes)로 제12대(1845-62) 마카오 주교다. 1850년은 그가 마카오에 들어간 지 25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에 마타는 갑작스런 훈령을 발표했다. 마카오 교구 신자들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내용은 다소 과격했다. 주교는 로마 포교성의 조치에 항의하고 있었다. 절제된 문장이었으나 담긴 뜻은 결연했다. 마타의 훈령은 중국의 모든 선교지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에게 ‘선교 보호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마땅히 포르투갈 여왕 폐하의 관할이었다. 반드시 지켜내야 할 권리였다. 마타의 훈령은 마지막 포효였다. 지난한 다툼의 끝물 같은 것이었다.

라자리스트의 시대

‘선교수도회’(Congrégation de la Mission). 라자리스트의 공식 명칭이다. 1625년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선교가 그들의 사명이었다. 중국 선교에 뛰어든 건 건륭 후기로 1780년대 이후다. 그 이전에도 몇몇 이들이 중국에 있었지만 손에 꼽을 정도였다. 포교성이 특별한 임무로 파견한 이들이었다. 예수회가 해체(1773)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누군가는 북당의 예수회를 대신해야 했다. 루이 16세는 프랑스 라자리스트를 선택했다. 북당의 재산 역시 그들에게 맡겼다. 1784년 1월 25일, 루이 16세는 조서로 이를 확정했다. 포교성도 이미 동의한 사안이었다.

포르투갈에게도 예수회의 빈자리는 컸다. 우선, 고아(Goa)의 옛 예수회가 시급했다. 거기엔 신학교가 있었다. 그들에게도 라자리스트는 좋은 대안이었다. 여왕 마리아 1세의 요청이 있었고, 포르투갈 라자리스트가 수락했다. 1781년의 일이다. 여왕의 관심은 이내 북경으로 향했다. 고아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었다. 여왕은 서둘렀다. 1782년, 구베아(Alexandre de Gouvéa, 湯士選, 1751-1808)가 북경 주교로 지명되었다. 포르투갈 사람으로 프란치스코회 신부였다. 그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북경은 먼 곳이었다. 긴 여정이 될 것이었다.

마카오 성요셉신학교(聖若瑟修院) 성당 외부. 오늘날의 모습이다. 성요셉신학교는 1728년에, 신학교 성당은 1758년에 건립되었다. 옛 성바울신학교(College of St. Paul's)와 더불어 마카오 예수회의 거점이었다. 중국 선교는 물론 일본 선교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마카오 여행자라면 꼭 한 번 들러볼 만한 장소다. ©오현석<br>
마카오 성요셉신학교(聖若瑟修院) 성당 외부. 오늘날의 모습이다. 성요셉신학교는 1728년에, 신학교 성당은 1758년에 건립되었다. 옛 성바울신학교(College of St. Paul's)와 더불어 마카오 예수회의 거점이었다. 중국 선교는 물론 일본 선교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마카오 여행자라면 꼭 한 번 들러볼 만한 장소다. ©오현석

마카오, 포르투갈의 전초기지

고아는 중요한 경유지였다. 중국으로 가는 이들이 반드시 지나야 했다. 구베아 역시 고아를 거쳤다. 1784년이었다. 고아에 머무는 동안, 그는 신학교의 체계를 재정비했다. 거기엔 라자리스트 선교사들이 있었다. 포르투갈 신부들이었다. 그는 여왕에게 건의했다. 고아의 신부들 몇을 마카오로 보내자는 제안이었다. 마카오에도 옛 예수회의 신학교가 있었다. 구베아는 마카오 선교지도 재건하려 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이 그의 여정에 가세했다. 발렌테(Manoel Correa Valente, 1735-1804)와 이탈리아인 빌라(Jean-Augustin Villa, 1752-1803)다. 둘 다 포르투갈 라자리스트였다.

1784년 7월 28일, 구베아 일행이 마카오에 다다랐다. 그들은 성요셉신학교(聖若瑟修院)부터 재건했다. 옛 예수회의 신학교였다. 이후 그곳은 포르투갈 라자리스트의 거점이 된다. 성요셉신학교에서 라자리스트는 수많은 중국인 사제를 양성했다. 그들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그리고 북경이었다. 마카오는 중국 선교의 전초기지였다. 예로부터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십분 활용해 왔다. 성요셉신학교가 그 역할을 다시금 이어받고 있었다. 발렌테와 빌라는 마카오에 남았다. 신학교 운영 책무가 그들에게 주어졌다. 구베아는 자신의 임지인 북경으로 향했다.

라자리스트, 경쟁의 시작

그해 8월 23일, 프랑스 라자리스트도 마카오 해상에 이르렀다. 로(Nicolas Raux, 羅廣祥, 1754-1801), 길랭(Jean-Joseph Ghislain, 吉德明, 1751-1812), 샤를 파리(Charles Paris, 巴正茂, 1738-1804)였다. 구베아 일행보다 한 달가량 늦은 셈이다. 9월 1일, 그들은 광동에 내렸다. 마카오에 정박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거기엔 필경 포르투갈인의 방해가 있을 터였다. 북당이 중요한 건 프랑스인만이 아니었다. 북당의 권리와 재산은 포르투갈에게도 핵심 사안이었다. 그들 역시 할 수만 있다면, 아니 최선을 다해 넘겨받으려 했다. 한시가 급했다. 가능한 빨리 북경으로 가야 했다.

이듬해 4월, 로 일행이 마침내 북경에 닿았다. 그들은 곧장 북당 프랑스 선교구의 권한과 재산을 인수했다. 5월 8일이었다. 그날 로 일행과 옛 예수회원은 교대를 위한 미사를 올렸다. 구베아도 참석했다. 그는 북경 주교 이름으로 교서를 발표했다. 라자리스트가 북경 예수회를 대체한다는 선언이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라자리스트는 두 무리로 갈라졌다. 북당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라자리스트, 마카오 성요셉신학교를 거점으로 하는 포르투갈 라자리스트였다. 그들은 각자 본국의 지원 아래 중국 선교에 임했다. 경쟁의 시작이었다.

오늘날 마카오 성요셉신학교(聖若瑟修院) 성당 내부. ©오현석<br>
오늘날 마카오 성요셉신학교(聖若瑟修院) 성당 내부. ©오현석

포르투갈의 대응

프랑스 라자리스트는 교황청 지지를 받고 있었다. 포교성 승인이 있었기에 그들이 북당을 인수할 있었다. 로마가 인정한 ‘공식 대표자’인 셈이다. 반면, 포르투갈은 중국 선교지의 주교 임명권이 있었다. ‘선교 보호권’에 따른 권한이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남경과 북경, 마카오의 주교를 잇따라 임명하기 시작했다. 모두 포르투갈 라자리스트였다. 1804년, 남경 주교 페레이라(G. Pires Pereira, 筆學源, 1763-1838), 1808년에는 북경 대목주교 사라이바(J. de Souza Saraiva, 1774-1818), 1818년 북경 주교 세라(V. Monteiro da Serra, 高守谦, ?-1852) 등이다. 마카오에서는 보르자(N.-R. Pereira de Borja, 1777-1845)가 주교로 지명되었다. 1841년 일이었다.

마카오는 특히 중요했다. 1784년부터 1839년까지, 모두 27명의 포르투갈 라자리스트가 중국에서 활동했다. 대부분이 성요셉신학교에서 일했다. 마카오와 광동 일대가 그들의 공간이었다. 드넓은 지역이었으나 중심에서 한참이나 멀었다. 그들은 중심을 차지하고 싶었다. 마음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1801년, 북경에 이른 포르투갈 라자리스트들이 동당(東堂)을 점거했다. 1812년에는 남당(南堂)에 강제로 진입했다. 그들은 두 성당을 기반으로 북경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물론 그 이상의 무엇은 없었다. 선교가 엄격히 제한되던 시절이었다. 남당도 동당도 그저 빈 공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두 성당이 상징하는 바는 컸다. 그 사건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중국 선교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선포였다.

프랑스 라자리스트 니콜라 로(Nicolas Raux)의 편지. 로 신부는 북경 라자리스트의 책임자였다. 그는 북당의 옛 프랑스 예수회를 인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다. 사진은 1788년 11월 15일에 그가 북경에서 쓴 편지다. 수신자는 파리의 시몽 드 라 투르(Simon de La Tour, 1697-1766) 신부. 프랑스 예수회에서 중국 문화를 담당했던 책임자다.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le-Grand) 학장이기도 했다. 이 편지에는 예수회 선교사 아미오(Joseph Amiot, 1718-93), 길랭(Jean-Joseph Ghislain, 1751-1812), 그리고 북당의 옛 선교구장 부르주아(François Bourgeois, 1723-92)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중국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예수회원 네 명, 즉 레옹 바롱(Léon Baron, 1738-84), 드 라 로슈(J.-B. de La Roche, 1704-85), 라드미랄(Pierre Ladmiral, 1723-84), 라 마테(Mathieu La Mathe, 1723-86)에 관한 문제도 있다. 로 신부는 또한 두 중국인 예수회원 고류사(Louis Ko)와 양덕망(Étienne Yang)도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는 베르사유의 베르탱(Henri-Léonard Bertin, 1720-92) 국무장관을 통해 투르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사진 출처 =&nbsp;<a data-cke-saved-href="https://www.bibliorare.com/lot/201398/" href="https://www.bibliorare.com/lot/201398/">bibliorare</a>)biblior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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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라자리스트 니콜라 로(Nicolas Raux)의 편지. 로 신부는 북경 라자리스트의 책임자였다. 그는 북당의 옛 프랑스 예수회를 인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다. 사진은 1788년 11월 15일에 그가 북경에서 쓴 편지다. 수신자는 파리의 시몽 드 라 투르(Simon de La Tour, 1697-1766) 신부. 프랑스 예수회에서 중국 문화를 담당했던 책임자다.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le-Grand) 학장이기도 했다. 이 편지에는 예수회 선교사 아미오(Joseph Amiot, 1718-93), 길랭(Jean-Joseph Ghislain, 1751-1812), 그리고 북당의 옛 선교구장 부르주아(François Bourgeois, 1723-92)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중국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예수회원 네 명, 즉 레옹 바롱(Léon Baron, 1738-84), 드 라 로슈(J.-B. de La Roche, 1704-85), 라드미랄(Pierre Ladmiral, 1723-84), 라 마테(Mathieu La Mathe, 1723-86)에 관한 문제도 있다. 로 신부는 또한 두 중국인 예수회원 고류사(Louis Ko)와 양덕망(Étienne Yang)도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는 베르사유의 베르탱(Henri-Léonard Bertin, 1720-92) 국무장관을 통해 투르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사진 출처 = bibliorare)

치열한 샅바 싸움

프랑스 선교사의 상황은 쉽지 않았다. 북경으로 가는 주요 경로에 어김없이 포르투갈인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라자리스트 입국을 백방으로 막았다. 가려는 자와 막아서는 자. 선교지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은 필연적이었다. 리슈네(Jean-François Richenet, 1759-1836)와 뒤마젤(Lazare-Marius Dumazel, 1769-1818)의 여정은 단적인 사례였다. 두 프랑스 라자리스트는 1801년 마카오에 도착했다. 중국 본토에 가려면 청 조정이 발행한 ‘표’(票)를 받아야 했다. 두 사람은 마카오에서 ‘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포르투갈인의 방해가 있었다. ‘표’를 받는다 해도 북경까지는 먼 길이었다. 가장 빠른 길은 수로를 통해 배로 가는 것이었다. 그 배는 모두 중국의 거대 상인들이 운영했다. 배를 타려면 이관(夷館) 책임자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관은 외국인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당시 광저우에는 10여 개 중국 상인 조합이 있었다. 그들은 유럽인과 교역할 수 있는 독점권이 있었다. 이관에서 올리는 보고는 대개 상인 조합의 수로를 통해 북경에 전달되었다. 길고도 지루한 절차였다. 이 과정에 포르투갈 측 중개인이 개입했다. 그는 절차를 일부러 지연시켰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포르투갈 정부의 조치는 한층 단호했다. 1799년 1월 16일, 포르투갈 여왕은 마카오 총독에게 엄명을 내렸다. 프랑스 선교사를 보호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마카오와 광저우의 모든 이동로가 사실상 봉쇄되었다. 리슈네와 뒤마젤은 마카오에서 발이 묶였다. 그들이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포르투갈 라자리스트가 북경을 선점했다. 1801년의 동당 점거가 바로 그 시작이었다. 그해에 페레이라(D.-J. Ferreira, 福文高, 1758-1824)와 리베이로(J. Ribeiro-Nunes, 李拱辰, 1767-1826)가 북경에 도착했다. 1804년에는 페레이라(Pereira)와 세라(Serra)가 뒤를 이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양국의 라자리스트가 불화했던 이유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석실성심대성당(石室聖心大教堂, Cathédrale du Sacré-cœur de Jésus) 외부. 파리외방전교회가 1863년에 광주(廣州)에 세운 성당. 1838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교서로 마카오 교구에서 광동과 광서 지역이 분리되었다. 이후 그곳은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았다. ©오현석<br>
석실성심대성당(石室聖心大教堂, Cathédrale du Sacré-cœur de Jésus) 외부. 파리외방전교회가 1863년에 광주(廣州)에 세운 성당. 1838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교서로 마카오 교구에서 광동과 광서 지역이 분리되었다. 이후 그곳은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았다. ©오현석

기울어지는 힘

교황청은 대책을 찾아야 했다. 선교지의 주도권 다툼이 중국 선교 전체를 해칠 수 있었다. 특단의 조치가 나왔다. 1838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취소했다. 16세기 이래로 이어진 포르투갈의 권한이었다. 후속 조치도 신속했다. 중국에 있던 기존 교구가 폐지되고 여러 개 대목구로 나뉘었다. 모든 대목구는 포교성이 위임한 주교가 관리할 것이었다. 마카오 주교 마타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마카오 교구 역시 분할되었다. 광동(廣東)과 광서(廣西)가 각각 대목구로 분리되었다. 두 지역은 파리외방전교회가 맡게 되었다. 마타 주교의 관할지역은 이제 마카오 섬 한 곳만 남게 되었다.

1850년, 마타가 발표한 훈령은 교황청의 조치에 저항하는 목소리였다. 이후에도 포르투갈 측의 저항은 간간이 이어졌다. 몇몇 지역에서 그들은 주교 임명권을 계속 주장했다. 주교 자리 하나를 놓고도 포르투갈 정부와 교황청의 명령이 상충했다. 난처한 건 해당 지역의 포르투갈 선교사였다. 둘 중 하나를 따르는 건 위험했다. 어떻게 해도 비난이 있을 터였다. 어떤 이들은 아예 임지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쪽도 택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추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프랑스의 승리가 명백해 보였다.

석실성심대성당(石室聖心大教堂, Cathédrale du Sacré-cœur de Jésus) 내부. ©오현석<br>
석실성심대성당(石室聖心大教堂, Cathédrale du Sacré-cœur de Jésus) 내부. ©오현석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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