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을 심문하였으니 황제께 아뢰나이다. 그들은 몽골 라마승의 복장을 하고 있고 중국어를 할 줄 압니다. 또한 만주문자와 몽골문자를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습니다. 티베트 문자와 말은 모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가베(噶畢)이고, 다른 하나는 에바리스트(额塞哩斯塔)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로 프랑스 사람이라 합니다.” - 도광(道光) 26년(1846), 주장대신(驻藏大臣) 기선(琦善)이 황제에게 올린 글(奏折)

여정의 시작, 티베트로 향하는 길

1844년 9월 10일, 세 사람이 길에 섰다. 이제 막 길을 떠나는 참이었다. 출발지는 마가자(馬架子)였다. 오늘날 내몽골자치구 츠펑(赤峰) 인근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나 가야 할 방향은 선명했다. 서쪽이었다. 유목민의 땅이자 티베트 불교의 대지였다. 아주 먼 길이었고 행로 역시 험난할 것이었다. 두 사람은 라자리스트 선교사였다. 조제프 가베(Joseph Gabet, 秦噶哗, 1808-53)와 에바리스트 윅(Évariste Régis Huc, 古伯察, 1813-60).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리고 삼다첸바(桑達钦巴)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두 사람을 안내했다. 감숙(甘肅) 출신의 몽골 라마승으로 가베의 전교로 신자가 된 이였다.

낙타 세 마리, 백마 한 필, 노새와 큰 개 하나도 여정에 함께했다. 덩치가 큰 가베가 낙타 하나를 탔고, 다른 두 마리에는 짐을 실었다. 짐 꾸러미엔 작은 나무상자 두 개가 있었다. 일과경, 미사 경본, 교리서와 소책자 몇 개가 그 속에 있었다. 선교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윅은 말에 올랐고, 삼다첸바는 노새에 올라탔다. 그 뒤를 큰 개 한 마리가 따랐다. 이름은 아르살란(Arsalan). 몽골어로 ‘사자’라는 뜻이다.

이들의 여정을 허락한 이는 물리(Joseph-Martial Mouly, 孟振生, 1807-68)였다. 그는 몽골대목구 초대 주교였다. 1844년 8월, 물리는 두 선교사에게 긴 여행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가베는 당시 물리의 지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의 게르(Ger)에서 또 다른 게르로, 한 부족에서 또 다른 부족으로, 어느 라마 사원에서 또 다른 라마 사원으로, 당신들은 나아가야 합니다. 하늘의 뜻이 당신들을 멈추게 하는 곳까지 말입니다.”("1847년에 교황 비오 9세에게 올린 보고서") 여정의 범위도 방향도 정해 주지 않은 지시였다. 두 선교사가 마침내 이르는 곳까지가 그들의 선교지였다. 담대한 명령이었다.

(왼쪽) 가베(Joseph Gabet, 秦噶哗)의 초상화와 서명. (오른쪽) 가베가 1847년에 교황에게 올린 서신, ‘교황 비오 9세에게 올리는 중국 선교 보고서’ 출판본 표지(Poissy, 1848). 가베는 1808년 12월 6일, 프랑스 쥐라(Jura) 지방의 네비쉬르세이유(Nevy-sur-Seille)에서 태어났다. 1833년 10월 27일, 사제 서품. 1834년 1월, 라자리스트 입회. 1835년 8월 29일, 마카오 도착. 1837년 3월, 서만자 도착. 티베트 여행 후, 프랑스로 귀국. 티베트로 돌아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49년에 브라질로 파송되었다. 1858년 3월 3일, 리우데자네이로에서 숨을 거뒀다. (이미지 출처 = limage-et-le-livre.com, 프랑스국가도서관)
(왼쪽) 가베(Joseph Gabet, 秦噶哗)의 초상화와 서명. (오른쪽) 가베가 1847년에 교황에게 올린 서신, ‘교황 비오 9세에게 올리는 중국 선교 보고서’ 출판본 표지(Poissy, 1848). 가베는 1808년 12월 6일, 프랑스 쥐라(Jura) 지방의 네비쉬르세이유(Nevy-sur-Seille)에서 태어났다. 1833년 10월 27일, 사제 서품. 1834년 1월, 라자리스트 입회. 1835년 8월 29일, 마카오 도착. 1837년 3월, 서만자 도착. 티베트 여행 후, 프랑스로 귀국. 티베트로 돌아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49년에 브라질로 파송되었다. 1858년 3월 3일, 리우데자네이로에서 숨을 거뒀다. (이미지 출처 = limage-et-le-livre.com, 프랑스국가도서관)

가베, 몽골 선교의 첫발을 떼다

첫 시작은 서만자(西灣子)였다. 몽골 선교가 시작된 곳이었다. 거기에 물리와 설마태오(薛瑪竇, Matthieu Sué, 1780-1860) 신부가 있었다. 가베가 서만자에 이른 건 1837년 3월이었다. 물리 이후로 온 첫 번째 프랑스 라자리스트였다. 가베는 중국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곧장 활동에 나섰다. 서만자 북쪽에는 광활한 평원이 뻗어 있었다. 지금의 내몽골 지역이다. 몽골 유목민이 거기 있었고 동북으로는 만주인이 있었다. 가베는 그 땅을 수차례 오가며 풍토와 사람들을 알아갔다. 몽골어와 만주어도 배웠다. 라마승을 선생으로 모시고 문자와 말을 익혔다. 간단한 교리서를 교재로 삼았다.

느리지만 성과는 컸다. 가베의 언어 실력이 느는 만큼 현지어 선생의 마음도 열렸다. 몽골 라마승 세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바오로(保祿), 베드로(凤, Pierre Fong, 1820-93), 삼다첸바(桑達钦巴)였다. 라자리스트가 몽골인 가운데서 거둔 최초의 결실이었다. 베드로는 나중에 첫 몽골인 사제가 된다. 서만자에도 신자들이 있었으나 거개가 한족(漢族)이었다. 신앙을 위해, 혹은 또 다른 이유로 만리장성 바깥으로 나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중국어(漢語)를 말했으며 이른바 ‘중원’(中原)의 관습을 따라 살았다. 서만자의 선교와 서만자 이북의 선교가 같을 수 없는 이유였다. 가베의 노력은 그래서 빛났다. 몽골인의 대지에서, 그들의 문자와 말로 이룬 첫 열매였다. 그가 처음이었다.

(왼쪽) 에바리스트-레지 윅(Évariste Régis Huc, 古伯察)의 초상화. (오른쪽) 윅이 쓴 책, "타타르-티베트 여행기"(1853)와 "중화제국"(L'empire chinois, 1854) 겉표지. 에바리스트 윅은 1813년 6월 1일, 프랑스 타른에가론(Tarn-et-Garonne) 지방의 카일뤼스(Caylus)에서 태어났다. 1836년 10월 9일, 신학교에 입학. 1839년 1월에 사제 서품. 그해 7월에 마카오에 닿았고, 1841년 6월에 서만자에 도착했다. 티베트 여행 후, 북경과 절강(浙江)에서 지냈다. 1852년 프랑스 귀국. 1853년 12월에 라자리스트를 탈퇴했다. 가베와 마찬가지로 윅 역시 티베트로 돌아가려는 갈망이 컸다. 하지만 티베트 선교지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지자 크게 분노했다 한다. 그가 라자리스트를 탈퇴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1860년 3월 25일, 파리에서 세상을 떴다. (이미지 출처 = abebooks.com, limage-et-le-livre.com)
(왼쪽) 에바리스트-레지 윅(Évariste Régis Huc, 古伯察)의 초상화. (오른쪽) 윅이 쓴 책, "타타르-티베트 여행기"(1853)와 "중화제국"(L'empire chinois, 1854) 겉표지. 에바리스트 윅은 1813년 6월 1일, 프랑스 타른에가론(Tarn-et-Garonne) 지방의 카일뤼스(Caylus)에서 태어났다. 1836년 10월 9일, 신학교에 입학. 1839년 1월에 사제 서품. 그해 7월에 마카오에 닿았고, 1841년 6월에 서만자에 도착했다. 티베트 여행 후, 북경과 절강(浙江)에서 지냈다. 1852년 프랑스 귀국. 1853년 12월에 라자리스트를 탈퇴했다. 가베와 마찬가지로 윅 역시 티베트로 돌아가려는 갈망이 컸다. 하지만 티베트 선교지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지자 크게 분노했다 한다. 그가 라자리스트를 탈퇴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1860년 3월 25일, 파리에서 세상을 떴다. (이미지 출처 = abebooks.com, limage-et-le-livre.com)

가베의 동역자, 에바리스트 윅

1840년 8월, 교황청은 몽골대목구를 설립했다. 물리가 초대 주교로 지명되었다. 그는 가베의 성과를 보며 몽골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못내 아쉬운 건 일손이었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했던가. 때마침 온 이가 있었다. 에바리스트 윅이었다. 1841년 6월, 그는 서만자에 도착했다. 그는 가베의 조수가 되어 북쪽 초원지대를 두루 다녔다. 서쪽의 귀화성(歸化城)에서 동쪽의 열하(熱河)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청더(承德)까지의 범위다.

가베와 윅은 티베트어도 배우려 했다. 몽골인의 삶에 티베트 불교가 깊게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들이 떠날 선교 여정과도 무관치 않았다. 티베트 불교의 성지, 라싸(拉薩)가 결국 둘의 최종 목적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속성으로 익힌 둘의 티베트어는 기초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래도 가베는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를 능숙하게 말했다. 그는 윅에게 이들 언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현지의 언어와 문화를 소중하게 대했다. 선교사에게 꼭 필요한 자질과 태도였다.

1843년 7월, 서만자에 새로운 일꾼이 왔다. 다갱(Florent Daguin, 孔, 1815-59)과 카라용(Laurent Carayon, 翁羊鐸, 1814-47)이었다. 이제 라자리스트 사제는 모두 여섯이 되었다. 서만자는 작은 마을이었다. 여섯이 함께 있는 건 낭비였다. 물리 주교는 윅을 내몽골 북동쪽 흑수(黑水)로 보냈고, 가베에게는 그 너머까지 두루 답사하도록 했다. 지리는 물론이고 거기 사는 이들의 언어와 문화의 성질을 알아야 했다. 이를 기초로 대목구의 경계가 그려질 것이었다. 몽골대목구와 만주대목구를 가르는 선이었다.

윅의 "타타르-티베트 여행기"(1853)와 "중화제국"(L'empire chinois, 1854) 속표지. "타타르-티베트 여행기"의 후속편이 "중화제국"이다. 각각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타타르-티베트 여행기" 제1권에는 흑수를 출발해 라싸를 지나 마카오로 돌아오는 여정이 담겨 있다. 프랑스어로 출판되었고 이내 영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와 생생한 묘사로 19세기 서구 독자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여행기였다. (이미지 출처 = limage-et-le-livre.com)
윅의 "타타르-티베트 여행기"(1853)와 "중화제국"(L'empire chinois, 1854) 속표지. "타타르-티베트 여행기"의 후속편이 "중화제국"이다. 각각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타타르-티베트 여행기" 제1권에는 흑수를 출발해 라싸를 지나 마카오로 돌아오는 여정이 담겨 있다. 프랑스어로 출판되었고 이내 영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와 생생한 묘사로 19세기 서구 독자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여행기였다. (이미지 출처 = limage-et-le-livre.com)

마침내, 서쪽으로 향하는 길

1844년 5월, 가베는 흑수로 가서 윅과 합류했다. 그들의 답사로 대목구의 동쪽 경계가 윤곽을 드러내었다. 문제는 서쪽이었다. 광대한 대지와 사막과 고원의 땅이었다. 그 경계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어디쯤에든 선을 그어야 했다. 대목구의 서쪽 경계 말이다. 그 너머는 새로운 선교구가 들어서야 할 땅이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러나 곧 태어나야 할 선교구였다. 그곳의 책임자는 가베가 될 것이었다. 윅은 재정담당으로 지명되었다. 물리 주교가 두 사람에게 부여한 새로운 직함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시했다. “나아가십시오. 하늘의 뜻이 멈추라고 할 때까지 나아가 보십시오.” 그해 9월 10일, 그들은 그렇게 길을 나섰다.

흑수(黑水) 인근에서 출발한 여정은 내몽골의 평원을 지나 후허하오터(呼和浩特)를 통과했다. 거기까지는 이미 답사해 본 지역이었다. 서만자에서 이를 수 있는 대략적인 활동 범위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그 너머로 향했다. 회족자치구인 닝샤(寧夏)를 거쳐 감숙(甘肅)과 청해(青海)를 지났다. 모두 거대한 영토였다. 그리고 1846년 1월 29일, 그들은 마침내 티베트 라싸에 이르렀다. 18개월의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애초부터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그들은 어차피 이방인이었다. 여정에서 만나는 그 모든 풍경이 길이었다. 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 라싸는 그들이 닿아야 할 집이 되어 있었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이가 마음의 고향으로 품고 있는 곳이었으니. 라싸에서, 그들은 비로소 이 여행의 끝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마음의 고향’, 라싸는 그들에게도 곁을 내어 주었다. 라싸의 사람들은 두 이방인 선교사를 기꺼이 환대했다.

가베와 윅의 여정을 표시한 지도. 1926년 북경 라자리스트 출판사가 윅의
가베와 윅의 여정을 표시한 지도. 1926년 북경 라자리스트 출판사가 윅의 "중화제국"(L'empire chinois)을 재출간했다. 아래 지도는 그 책에 등장하는 삽화다. 지도에는 표시된 굵은 실선이 그들이 이동한 경로다. 지도의 우측 상단에 ‘Eaux-Noires’로 표시된 곳이 흑수(黑水)다. 마가자(馬架子)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의 츠펑시(赤峰市) 외곽이다. 여정의 출발지였다. 지도의 맨 왼쪽에 있는 도시가 티베트 라싸(Lhassa)다. 라싸에서 추방된 두 사람은 쓰촨(四川)까지 호송된 후 풀려났다. 이후, 후베이(湖北), 장시(江西), 광둥(廣東)을 지나 마카오에 도착했다. 중국의 11개 성(省)을 돌아 닿은 종착지였다. (이미지 출처 = abebooks.com)

추방, 그리고 귀환

한 달 반, 라싸에서의 체류는 길지 않았다. 주장대신(駐藏大臣) 기선(琦善, 1786-1854)이 그들을 심문했다. 티베트를 관할하려 청 조정이 파견한 관리였다. 처리는 신속했다. 곧장 추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846년 3월 15일, 두 선교사는 라싸를 떠났다. 기선의 병사 몇이 그들을 사천(四川)까지 호송한 후 풀어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호북(湖北)과 강서(江西)를 지나 광동(廣東)의 중심인 광저우(廣州)에 이르렀다. 1846년 9월 말이었다. 10월 중순엔 마카오에 닿았다. 청 제국의 11개 성(省)을 돌아 닿은 종착지였다.

윅은 그 여행을 기록으로 남겼다. “타타르-티베트 여행기”다.(원제는 “Souvenirs d’un voyage dans la Tartarie et le Thibet, pendant les années 1844, 1845 et 1846”) 1853년 파리에서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앞서 서술한 여정까지가 제1권에 담길 내용이었다. 꽤나 흥미로운 필치로 서술한 여정이었다. 인기 있는 여행기였다. 곧 영어로 번역되고 입소문은 더욱 빠르게 퍼질 것이었다. 마카오에서 가베는 윅과 헤어졌다. 그는 프랑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 홍해를 지나 마르세유에 이르는 배였다. 윅은 몇 년 더 중국에 머물렀다. 윅이 프랑스로 돌아간 건 1852년이었다.

(왼쪽) 2004년에 출판된 가베와 윅의 서간집, "Lettres de Chine et d'ailleurs 1835-1860". 자크린 테베네(Jacqueline Thevenet)가 편집하고 마르틴 레보(Martine Raibaud)가 서문을 썼다. (오른쪽) 1847년에 가베가 쓴 "교황 비오 9세에게 올리는 중국 선교 보고서"(1848년 출판)는 1999년에 Valmonde et cie 출판사가 재출간했다. 재출간 된 책 제목은 ‘Les Missions Catholiques en Chine en 1846’. (이미지 출처 = Les Indes savantes, Valmonde et cie)
(왼쪽) 2004년에 출판된 가베와 윅의 서간집, "Lettres de Chine et d'ailleurs 1835-1860". 자크린 테베네(Jacqueline Thevenet)가 편집하고 마르틴 레보(Martine Raibaud)가 서문을 썼다. (오른쪽) 1847년에 가베가 쓴 "교황 비오 9세에게 올리는 중국 선교 보고서"(1848년 출판)는 1999년에 Valmonde et cie 출판사가 재출간했다. 재출간 된 책 제목은 ‘Les Missions Catholiques en Chine en 1846’. (이미지 출처 = Les Indes savantes, Valmonde et cie)

가베의 선교보고서

가베는 라싸로 돌아가려 했다. 그는 주장대신 기선이 부당한 추방을 했다고 여겼다. 프랑스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는 파리와 로마를 방문하며 중국 선교 상황과 티베트 선교의 중요성을 알렸다. 1847년 8월, 그가 교황에게 올린 서신이 있다. “교황 비오 9세에게 올리는 중국 선교 보고서”다.(원제는 “Coup d'oeil sur l'état des missions de Chine présenté au Saint Père le pape Pie IX”) 이듬해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글에는 그가 겪은 18개월의 험난한 여정이 담겨 있었다. 중국 선교를 위한 제언도 실렸다.

가베의 보고서는 윅의 여행기보다 훨씬 무게감 있다. 거기엔 중국 문화를 한층 깊게 이해하는 시선이 있었다. 중국적 가치에 대한 존중도 있었다. 그의 동료 선교사 대부분이 무능했던 지점이다. 가베는 중국 선교의 문제점을 낱낱이 열거했다. 선교회 간의 경쟁, 현지인 사제 양성에 대한 반감, 그로 인한 선교 일꾼의 태부족, 현지 언어와 문화에 무지한 선교사들. 중국이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이유였다.

가베의 통찰은 정확했다. 19세기 중국 선교가 깊이 새겨들었어야 할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귀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다. 가베의 생각에 닿아 있던 이를, 우리는 반세기가 지나서야 만나게 된다. 뱅상 레브(Vincent Lebbe, 雷鳴遠, 1877-1940) 신부다. 라자리스트 중국 선교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될 것이었다.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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