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1. 이 정도면 콜드 게임이다. 0패를 면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야구 경기 스코어라면 차라리 나으리라. 다시 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 1552년부터 1800년까지 중국에는 975명의 예수회 선교사가 있었다. 그 가운데 중국인 수사가 36명, 사제는 고작 9명이었다. 대략 22대 1의 비율이다. 예수회 역사학자 드에르느(Joseph Dehergne, 榮振華, 1903-90)의 자료에 따른 수치다.(“Répertoire des Jésuites de Chine de 1552-1800”, 1973)

명말의 문호였던 양정균(楊廷筠, 1557-1627) 같은 이도 수사였다. 그는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5-1630)와 함께 ‘중국 천주교의 세 기둥’으로 일컬어진다. 범위를 좀 더 확장해 봐도 결과는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1870년까지 셈해 보면 예수회가 배출한 중국인 사제는 모두 45명이 된다.(“Catalogus patrum ac fratrum S.J.”, 1892) 의미 있는 증가지만 딱히 성에 차지는 않는다. 3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안해 보면 말이다.

라자리스트 선교사 브란트(Joseph Van Den Brandt, 方立中, 1883-1957)의 자료는 그래서 흥미롭다. 그가 집필한 “중국 라자리스트 열전”(Les Lazaristes en Chine, 1697-1935)에는 238년 동안의 선교사 명단이 담겨 있다. 모두 964명이다. 그 가운데 355명이 중국인이었다. 전체 숫자의 3분의 1이 넘는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그들 대다수가 사제라는 사실이다. 출신 지역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예수회와 라자리스트는 시대를 달리하며 중국 선교를 주도했다. 예수회를 대체한 이들이 라자리스트였다. 하지만 현지인 사제 양성에서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서로 다른 선교 전략이 빚은 결과다. 두 선교회의 현지 신학교는 그 차이를 좀 더 세밀히 보여 준다. 그 대비는 중국 선교의 풍경을 확연히 바꾸어 놓았다.

마카오 성바오로 신학교 성당. 1637년에 완공되었다. 1835년 화재로 성당의 전면부만 보존되어 있다. 마카오 최초의 신학교이자 동아시아 최초 서양식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오현석
마카오 성바오로 신학교 성당. 1637년에 완공되었다. 1835년 화재로 성당의 전면부만 보존되어 있다. 마카오 최초의 신학교이자 동아시아 최초 서양식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오현석

중국에서 신학을 가르치다

마카오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신학을 가르친 곳이다. 1553년, 명 조정은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의 무역을 허가했다. 1557년에는 장기 거주까지 허용했다. 포르투갈 정착민이 늘어나자 자연스레 학교가 필요해졌다. 포르투갈 예수회는 소학교를 세웠다. 기초교육을 위한 학교였다. 포르투갈어 등 기초 과목만을 가르쳤다. 몇 년 후엔 라틴어 교육도 이루어졌다. 중국의 첫 번째 서양식 학당이었다. 하지만 신학교 설립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다. 중국 선교의 선구자들은 아직 먼 곳에 있었다. 닿기까지는 아득했다.

1579년,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1543-1607)가 마카오에 이르렀다. 1582년에는 리치(Matteo Ricci, 1552-1610)도 거기 닿았다. 예수회가 중국 선교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점이다. 두 사람은 마카오에서 중국어를 익혔다. 이후, 선교사들이 속속 이르렀다. 우선 중국어를 배워야 했고 중국 문화도 익혀야 했다.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성바오로 신학교(聖保祿学院)가 세워진 이유다. 1594년 12월 1일, 학교가 문을 열었다. 마카오 최초의 신학교이자 동아시아 최초의 서양식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 디아스(Emmanual Diaz Junior, 陽瑪諾, 1674-1659), 바뇨니(Alphonse Vagnoni, 高一志, 1568-1640) 등 중국 선교의 주역들이 거기서 가르쳤다. 명실상부한 중국 선교의 베이스캠프였다.

보존된 마카오 성바오로 신학교 성당 전면과 후면. ©오현석
보존된 마카오 성바오로 신학교 성당 전면과 후면. ©오현석

성바오로 신학교의 교육

커리큘럼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인문학 과정은 중국어, 라틴어, 수사학, 음악 등이다. 철학 과정은 철학과 신학. 자연학 과정은 수학, 천문학, 물리학, 의학 등으로 이루어졌다. 라틴어와 포르투갈어는 필수과목이었다. 라틴어 수업은 오전에 두 시간 반(7-9시 반), 오후에 두 시간(3-5시) 진행되었다. 주일을 제외하고 매일 반복되었는데, 토요일은 한 시간 반만 수업했다. 졸업 시험은 모두 라틴어로 행해졌고, 일상생활에서도 라틴어 노래와 극작품 공연이 있었다. 라틴어는 학교 전체의 업무와 생활언어였다.

라틴어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제가 집전하는 모든 미사가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63) 이후, 로마 가톨릭은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에 따라 미사를 행했다. 흔히 ‘트리엔트 미사’(Tridentine Mass)라고 한다. 라틴어 미사는 400년간 지속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가 새로운 형식의 미사를 채택할 때까지였다. 중국 선교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지인 사제가 나오기 어려웠던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정치-문화적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라틴어 학습은 만만치 않았다. 유럽의 신학생들은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를 익혔다. 소신학교를 거치고 대신학교를 마쳐야 비로소 익숙해졌다. 긴 세월의 교육이 필요했다.

하지만 예수회가 마카오에 세운 신학교는 목적이 달랐다. 긴 호흡으로 현지인을 교육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의 우선 과제는 유럽인 신학생과 사제를 중국에 적응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국인 학생을 유럽에 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정마낙(鄭瑪諾,  Emmanuel de Sequeira, 1633-73) 같은 이가 그렇다. 예수회의 첫 번째 중국인 사제다. 성바오로 신학교에서 얼마간 공부한 후, 선교사 로드(Alexander de Rhode, 1591-1660)를 따라 유럽으로 갔다. 그렇게 사제가 된 이들이 있었지만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력(吳歷, 호는 漁山, 1632-1713)도 성바오로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청초(淸初)의 6대 화가 중 하나였던 이다. 그는 51세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그는 선교사 쿠플레(Philippus Couplet, 柏應理, 1623-93)와 친밀했다. 원래는 쿠플레를 따라 유럽으로 가려 했다.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신학교 경험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도 신학교엔 중국인 학생이 더러 있었다. 정규 과정에 따라 라틴어를 배운 최초의 중국인들이었다. 신학교를 마치면 수사가 되어 활동했다. 유럽인 사제를 돕는 역할이었다.

성요셉신학교는 마카오에 세운 두 번째 예수회 신학교다. 1728년 설립하고 1762년 폐교되었다. 1784년에 포르투갈 라자리스트가 신학교를 재건했다. ©오현석
성요셉신학교는 마카오에 세운 두 번째 예수회 신학교다. 1728년 설립하고 1762년 폐교되었다. 1784년에 포르투갈 라자리스트가 신학교를 재건했다. ©오현석

프란치스코회 샤오저우 신학교

중국에서 신학교를 운영한 건 예수회만이 아니었다. 17세기엔 프란치스코회도 신학교를 열었다. 중국 천주교사학자 방호(方豪, 1910-80)는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한다. 그의 논문 ‘라틴어 중국 전래 연구’(拉丁文傳入中國考)에는 편지 하나가 소개된다. 키에사(Bernardino della Chiesa, 伊大仁, 1664-1721) 주교의 편지다. 프란치스코회 신부로 북경 초대 주교(1690-1721)를 지낸 이다. 1695년(강희 34년) 11월 2일, 그는 남경에서 편지를 썼다. 로마 포교성에 보내는 서신이었다. 추기경에게 알려야 할 사항이 담겨 있었다.

편지엔 그해 5월에 프랑스인 2명이 왔다는 언급이 있다. 귀에티(Gaspar François Guéty, 方舟, ?-1725)와 리로(Jacques Lirot, 李雲, 1664-1723)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다. 1690년 즈음에 중국에 온 후, 광동성(廣東省) 샤오저우(韶州)로 갔다. 지금의 샤오관시(韶關市)다. 그곳엔 프란치스코회가 세운 신학교가 있었다. 거기서 4-5년의 수련 과정을 끝내고 남경에 온 것이다. 그들을 사제로 서품한 이가 키에사 주교였다. 여기서 방호는 샤오저우(韶州) 신학교에 주목한다. 창립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중국 내륙에 정식으로 세워진 최초의 대신학교(seminarium)였다. 방호의 추정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중국인 사제의 이름을 찾아내는 건 거기서도 쉽지 않다.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신학교 사진. ©오현석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신학교 사진. ©오현석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신학교 사진. ©오현석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신학교 사진. ©오현석

라자리스트, 변화의 시작

성요셉신학교(聖若瑟修院, Seminário de S. José)는 마카오에 세워진 두 번째 신학교다. 이 역시 포르투갈 예수회의 작품이다. 1728년 설립 때부터 1762년 폐교될 때까지, 총 14명이 그곳에서 수학했다. 포르투갈, 프랑스 등에서 온 이들이었고 중국인도 있었다. 교사로 일한 선교사는 23명이었다. 일구는 건 지난했으나 허물어지는 건 별안간이었다. 1762년 7월 5일, 마카오 총독은 예수회원 20명을 체포하여 추방했다. 포르투갈 정부의 명령이었다. 그때 신학교도 폐쇄되었다. 마카오의 예수회 신학교 두 곳이 그렇게 사라졌다. 1774년 교황청이 예수회를 해산하자 중국 선교 전체가 흔들렸다. 타격은 불가피했다.

신학교가 재개된 건 22년 지나서였다. 1784년, 북경 주교로 임명된 구베아 일행이 마카오에 이르렀다. 그들은 신학교부터 재건했다.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발렌테(Manoel Correa Valente, 1735-1804)와 빌라(Jean-Augustin Villa, 1752-1803)가 재건의 첫 발을 뗐다. 옛 예수회 신학교는 이렇게 라자리스트 신학교로 새단장했다. 1784년부터 1832년까지, 중국에 들어온 포르투갈 라자리스트는 21명이었다. 숫자로나 세력 면에서 수위였다. 성요셉신학교가 그들의 기반이었다.

포르투갈 라자리스트는 프랑스 라자리스트와 선교지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갈등했지만 협력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요셉신학교 교육이었다. 프랑스 라자리스트가 교사로 참여하며 신학교 재건을 도왔다. 현지인 성직자 양성은 양국의 라자리스트에게 모두 중요했다. 거기서 양성된 중국인 사제는 주로 광동(廣東)과 광서(廣西)에서 활동했다. 북경에도 일부가 파견되었다. 북경은 프랑스 라자리스트의 선교지였다. 성요셉신학교가 북경 선교지 재건에도 도움이 된 셈이다.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라틴어 교재. ©오현석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라틴어 교재. ©오현석

프랑스 라자리스트, 기지개를 펴다

같은 시기(1784-1800)에 프랑스 라자리스트는 11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마카오, 호북(湖北)과 호남(湖南), 북경 등에 흩어져 있었다. 북경의 로(Nicolas Raux, 羅廣祥, 1754-1801), 길랭(Jean-Joseph Ghislain, 吉德明, 1751-1812), 파리(Charles Paris, 巴正茂, 1738-1804)가 첫 번째로 도착한 인원이었다. 그들은 북당 옛 예수회를 인수했다. 그 후 30년간(1800-29),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라자리스트는 없었다.

상황은 1829년부터 달라졌다. 그해에 토레트(Jean-Baptiste Torrette, 陶若翰, 1801-40)가 중국에 왔고 마카오 라자리스트 장상이 된다. 또한 라자리스트가 관할하는 프랑스 선교구 순찰사를 맡았다. 이때부터 프랑스 라자리스트가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829년부터 1850년까지 모두 32명이다. 프랑스 라자리스트가 맡았던 선교구는 4개였다. 북경 교구, 그리고 하남(河南), 절강(浙江), 강서(江西) 대목구였다. 오뱅(Raymond Aubin,  1759-95), 페스네(A.-Louis Pesné, 1707-95), 클레(J.-François-Régis Clet, 劉方济, 1748-1820) 등이 지역 대목구에서 활동했다. 선교의 제약이 컸던 시절이다. 서양인 선교사는 위험했다. 현지인 사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라틴어 교재. ©오현석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라틴어 교재. ©오현석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라틴어 교재. ©오현석
마카오 성요셉신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라틴어 교재. ©오현석

현지인 사제 양성을 위하여

여기서 라자리스트 가베(Joseph Gabet, 秦喝哗, 1808-53)의 보고서는 매우 의미 있다. 그는 1835년 마카오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왔다. 에바리스트-레지 윅(Evariste-Régis Huc, 古伯察, 1813-60)과 함께 몽골과 티베트를 여행한 인물이다. 1846년 교황청에 보낸 보고서(“les Missions Catholiques en Chine en 1846”)에서, 그는 현지인 사제 양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우선적인 이유는 당시 중국 선교지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들 수도회의 이념도 중요한 이유였다. 라자리스트는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 창립한 수도회다. 예수회와는 결이 다른 조직이었다. 그들이 중시하는 선교 대상은 일반 백성이었다. 그 몫은 현지인 사제가 가장 잘할 수 있었다.

가베는 말한다. “중국인 성직자에 대한 비난은 확실하지도 명백한 사실도 아닙니다. 이 문제에서 유럽인 성직자는 선입견과 낡은 관습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중국인의 마음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라자리스트에게 현지인 사제 양성은 핵심 과제였다. 그 중심에 신학교가 있었다. 그들 신학교를 통해 19세기 북경 선교의 맥이 이어졌다. 북당 신학교가 길러낸 중국인 라자리스트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다룰 주제다.

중국 천주교사학자 방호의 논문집 “방호육십자정고”(方豪六十自定稿). 목차에 나오는 첫 번째 논문이 ‘라틴어 중국 전래 연구’(拉丁文傳入中國考)다. 방호 신부는 현대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다. 동서교류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이 있고, 홍루몽 연구에서도 큰 성과를 남겼다. (이미지 출처 = 孔夫子旧書網)
중국 천주교사학자 방호의 논문집 “방호육십자정고”(方豪六十自定稿). 목차에 나오는 첫 번째 논문이 ‘라틴어 중국 전래 연구’(拉丁文傳入中國考)다. 방호 신부는 현대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다. 동서교류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이 있고, 홍루몽 연구에서도 큰 성과를 남겼다. (이미지 출처 = 孔夫子旧書網)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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