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교회, 우리의 도서관, 우리의 천문대입니다. 프랑스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우리의 집입니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선교단의 먹잇감으로 둘 순 없습니다. 그건 견딜 수 없는 수모입니다.” (1774년 10월 1일, 북당의 선교사 조제프 아미오의 편지)

예수회, 해체되다

예수회가 끝났다. 1773년 7월 21일,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교서 '주님이신 구세주(Dominus ac Redemptor)'에 서명했다. 예수회를 해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은 북경에도 전해졌다. 이듬해 8월이었다. 교서가 북경에 닿은 건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난 후였다. 1775년 11월 15일, 교서는 남경과 북경에서 동시에 공표되었다. 남경에서는 라임벡호벤 주교(Gottfried Xaver von Laimbeckhoven, 南懷仁, 1707-1787)가, 북경에서는 그의 대리인이 교서를 낭독했다. 북경 프랑스 예수회의 공식적인 최후였다.

그때 북당에는 예수회 선교사 11명이 있었다. 프랑스인 9명과 중국인 2명이다. 중국에 온 순서대로 호명하면 이렇다. 아미오(Jean-Joseph Amiot, 錢德明, 1719-93), 씨보(Pierre Martial Cibot, 韓國英, 1727-80), 돌리에르(Jean-François d’Ollières, 方守義, 1722-1780), 방타봉(Jean-Matthieu de Ventavon, 汪達洪, 1733-87), 부르주아(François Bourgeois, 晁俊秀, 1723-92), 콜라(Jean-Paul Collas, 金濟時, 1735-81), 그라몽(Jean-Baptiste Grammont, 1736-1812?), 프와로(Louis Antoine de Poirot, 賀淸泰, 1735-1813), 판지(Giuseppe Panzi, 潘若瑟, 1734-1812?). 북당의 마지막 예수회원들이었다.

북당의 예수회 선교사 조제프 아미오(Joseph-Marie Amiot, 錢德明, 1718-93)의 편지. 그가 파리의 베르탱(Henri-Léonard Bertin, 1720-92) 장관에게 보낸 것으로, 1774년 10월 1일에 쓴 장문의 글이다. 예수회 해체 소식이 북경에 알려졌지만 공식적인 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다. 이 편지에서 아미오는 북경 프랑스 예수회의 앞날을 걱정하며 북당 선교회를 지켜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편지는 모두 33페이지로 사진은 그 첫 페이지다. (이미지 출처 = Archives nationales d'outre-mer [recherche-anom.culture.gouv.fr])<br>
북당의 예수회 선교사 조제프 아미오(Joseph-Marie Amiot, 錢德明, 1718-93)의 편지. 그가 파리의 베르탱(Henri-Léonard Bertin, 1720-92) 장관에게 보낸 것으로, 1774년 10월 1일에 쓴 장문의 글이다. 예수회 해체 소식이 북경에 알려졌지만 공식적인 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다. 이 편지에서 아미오는 북경 프랑스 예수회의 앞날을 걱정하며 북당 선교회를 지켜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편지는 모두 33페이지로 사진은 그 첫 페이지다. (이미지 출처 = recherche-anom.culture.gouv.fr)

북당 선교사들의 반응

북당의 선교사들은 놀라지 않았다. 교서 내용은 이미 전해져 있었다. 그들은 담담하게 교서를 받아들였다. 슬픔이 컸지만 도리가 없었다. 사실, 몇은 그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소식이 처음 당도했을 때, 브누아(Michel Benoist, 蔣友仁, 1715-74)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황제의 별궁, 원명원(圓明園) 서양루를 설계한 이다. 그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두 달 후에 세상을 떴다.

아미오는 비애 서린 라틴어 시문(詩文)을 작성했다. 예수회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문이었다. 비문은 북경 선교사 묘지인 정복사(正福寺)에 세워졌다. 1774년 10월 14일자이니 브누아가 죽기 일주일 전이다. 아미오는 비문을 편지에 담아 프랑스 왕실에도 보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북당의 선교사들은 알고 있었다. 슬픔은 힘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 그들은 황제의 보호 아래 있었다. 그들은 청 조정에서 계속 일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로, 화가와 기계공으로, 음악가와 통역자로, 변함없이 일상을 살아갔다. 사제의 의무도 수행했다. 하지만 체념의 깊은 한숨은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원명원(圓明園)의 서양루(西洋樓) 가운데 하나인 ‘해안당’(海晏堂) 동판화. 원명원 서양루는 건륭 연간에 건립되었다. 북당의 예수회 선교사 브누아(Michel Benoist, 蔣友仁, 1715-74)와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郞世寧, 1688-1766)가 공동으로 설계한 건축이다. 그 모델은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원명원 서양루는 제2차 아편전쟁 때 파괴되었다. 1856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했다. 그때 원명원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이미지 출처: en.wikipedia.org)
원명원(圓明園)의 서양루(西洋樓) 가운데 하나인 ‘해안당’(海晏堂) 동판화. 원명원 서양루는 건륭 연간에 건립되었다. 북당의 예수회 선교사 브누아(Michel Benoist, 蔣友仁, 1715-74)와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郞世寧, 1688-1766)가 공동으로 설계한 건축이다. 그 모델은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원명원 서양루는 제2차 아편전쟁 때 파괴되었다. 1856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했다. 그때 원명원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이미지 출처: en.wikipedia.org)
현재 남아 있는 원명원 '해안당' 폐허 모습.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현재 남아 있는 원명원 '해안당' 폐허 모습.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독립된 선교구, 북경 프랑스 예수회

예수회 해체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회가 소유했던 모든 재산도 사람처럼 흩어져야 했다. 북당의 선교사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 문제에서만큼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당시, 파리에 도착한 편지들은 북경 선교회의 상황을 위태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북당을 지키고 싶었다. 그건 프랑스 예수회의 것이었다. 프랑스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프랑스인의 집이었다. 이탈리아나 포르투갈 선교단의 먹잇감으로 둘 순 없었다. 그저 그런 재산 다툼이 아니었다. 북당은 프랑스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곳은 청 제국의 안뜰이었다.

중국에서 북당의 지위는 독특했다. 독립된 선교구였다. 프랑스 국왕이 직접 후원했다. 중국 선교지(Vice-Province)는 모두 포르투갈 관할이었다. ‘선교 보호권’(Padroado) 때문이다. 포르투갈 정부는 선교사의 이동 항로와 안전을 보장했다. 대신, 선교사 파견과 관리의 권한을 가졌다. 중국으로 가는 모든 선교사는 리스본에서 출발해야 했다. 떠나기 전에 서약까지 했다. 포르투갈의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선서였다.

17세기가 되자 이 구도에 균열이 간다. ‘포교성성’(布敎聖省,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의 출현이 결정적이었다. 1622년에 교황청이 설치한 기구다. 선교를 전담하는 기관이었다. 이제 포교성성이 직접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지키려 했고, 교황청은 뺏으려 했다. 선교 보호권을 둘러싼 공방이 17세기 내내 이어졌다. 둘의 다툼과 타협이 중국 선교의 지형도를 그려냈다. 어떤 지역은 포르투갈 주교가 맡았고, 또 어떤 지역은 포교성성이 파견한 대목(代牧) 주교가 관리했다. 북당의 지위는 그래서 독특했다. 리스본에도 로마에도 속하지 않았다. 독립적인 선교구였다. 프랑스 국왕의 이름으로, 프랑스 예수회가 관할하는 공간이었다.

1665년 로마의 포교성성 신학교(Collegio de Propaganda Fide) 모습. 지오판니 팔다(Giovanni Battista Falda, 1648-78)의 에칭화 작품이다. ‘포교성’(布敎省,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은 1622년 6월 22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의 교서로 창설되었다. 20세기에 ‘포교성성’으로 개칭했다. 그 뒤 ‘인류복음화성’이라고 부르다, 지난해 교황청 기구를 개편하면서 복음화부가 되었다. 포교성성 신학교는 교황 우르바노 8세(재임 기간 1623-44)때 설립되었다. (이미지 출처 = abeBooks.de)
1665년 로마의 포교성성 신학교(Collegio de Propaganda Fide) 모습. 지오판니 팔다(Giovanni Battista Falda, 1648-78)의 에칭화 작품이다. ‘포교성’(布敎省,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은 1622년 6월 22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의 교서로 창설되었다. 20세기에 ‘포교성성’으로 개칭했다. 그 뒤 ‘인류복음화성’이라고 부르다, 지난해 교황청 기구를 개편하면서 복음화부가 되었다. 포교성성 신학교는 교황 우르바노 8세(재임 기간 1623-44)때 설립되었다. (이미지 출처 = abeBooks.de)
오늘날 ‘복음화부’ 문서 보관소. (사진 출처 = archiviostoricopropaganda.va)
오늘날 ‘복음화부’ 문서 보관소. (사진 출처 = archiviostoricopropaganda.va)

프랑스 정부의 대응

프랑스 정부는 신속히 대응했다. 1774년은 루이 16세가 즉위한 첫해다. 북경 선교지는 그의 재임 첫 달부터 주요 현안이 되었다. 이 사안의 중요성을 국왕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재정 지원부터 결정했다. 1775년 10월, 국왕의 첫 번째 지원금이 북당에 도착했다. 1만 5000리브르(livres)였다. 이어서 북당의 재무 담당에게 1200리브르가 갔다. 이듬해에는 과학 연구를 위해 1만 5000리브르를 지원했다. 선교사들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예수회 해체 이후엔 더욱 그랬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었다. 북당에는 새로운 선교사가 필요했다. 북당의 예수회원은 청 조정에서 일했다. 그들은 프랑스 ‘국왕의 수학자’(Mathématiciens du Roi)였다. 북당이 특권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적절한 이들을 새롭게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들을 양성하는 건 더욱 어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북경 예수회를 복원하는 게 최상이었다.

사실, 예수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러시아 서부, 지금의 벨라루스 지역에는 예수회가 존속했다. 교황 비오 6세는 1775년에 러시아 예수회를 승인했다. 거기엔 예수회원 145명이 있었다. 새로운 이들을 받아 교육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루이 16세가 시도해 볼 만도 했다. 그는 몇 가지 우회적인 방법을 강구했다. 그는 이내 깨달았다. 북경 예수회 복원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수회를 대체하라, 그런데 누가?

프랑스 정부는 다른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궁리 끝에 나온 대안이 있다. 새로운 선교구 설치였다. 만주에 프랑스 주교구를 설치하는 거다. 심양(沈陽)에 주교직을 만들고, 북당의 옛 예수회원에게 주교를 맡긴다. 그러면 북경 선교회가 자연스럽게 거기 속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 주교들과 엮일 일도 없다. 북당의 독립적 지위를 이어갈 수 있는 안이었다. 로마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난색을 표했다. 교황의 교서와 모순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포르투갈 정부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선교 보호권’이 여전히 그들에게 있었다. 그 힘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예수회를 대체할 다른 이들을 찾아야 했다.

로마는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적절한 인물을 찾아보자는 의견이다. 포교성성 책임자인 안토넬리(Antonelli) 추기경의 제안이었다. 외방전교회는 이를 거절했다. 그들에게는 청 조정에서 일할 만한 과학자 사제가 없었다. 1776년의 일이다. 생 모르 공동체(la communauté de Saint Maur)와 오라토리오회(oratoriens)도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배제되었다. 그러는 사이, 몇 년이 흘렀다. 시간은 프랑스의 편이 아니었다. 서둘러야 했다.

구원투수의 등장, 프랑스 라자리스트

자퀴에(Antoine Jacquier) 신부는 처음부터 이 사안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선교수도회’(Congrégation de la Mission)의 장상(1762-1787)이었다. 흔히 ‘라자리스트’(Lazaristes)라고 부르는 수도회다. 자퀴에는 세 번이나 제안을 거절했다.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국왕이 북경 선교회의 재산을 지키려고 벌이는 일이었다. 거기에 손을 빌려 주고 싶지 않았다. 1782년 11월, 해군 장관 카스트리 후작(Marquis de Castries)은 자퀴에에게 서한을 보냈다. 북경 선교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단호한 어조였다.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자퀴에는 서둘렀다. 그는 세 명의 선교사를 선발했다. 니콜라 로(Nicolas Raux, 羅廣祥 1754-1801). 그는 사제이자 과학자였다. 천문학과 지리학, 식물학과 자연사 분야에 해박했다. 그는 북경 프랑스 선교회 책임자(supérieur apostolique)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프랑스 정부 책임자(supérieur civil)이기도 했다. 북경의 프랑스 재산을 관리하려는 조치였다. 선교와 정치, 이중의 임무다. 북당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 신부는 동료 둘과 동행했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길랭(Jean-Joseph Ghislain, 吉德明, 1751-1812) 신부. 그리고 샤를 파리(Charles Paris, 巴正茂, 1738-1804) 수사다. 그는 기계 전문가였다. 하프시코드 연주자이기도 했다.

1783년 12월 7일, 포교성성은 교서를 공표했다. 북당 선교회를 프랑스 라자리스트에게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이듬해 3월, 브레스트(Brest)에서 중국으로 떠날 배가 준비되었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선박이었다. 라자리스트 선교사 세 명이 그 배에 올랐다. ‘국왕의 수학자들’이었다. 북당의 역사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17세기 파리의 생 라자르 성당(Eglise de St. Lazare). 라자리스트 본부에 있었던 성당이다. ‘선교수도회’(Congrégation de la Mission)는 1625년에 뱅상 드 폴(Vincent de Paul, 1581-1660)이 파리에서 창립한 수도회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흔히 ‘라자리스트’(Lazaristes)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코회(Franciscains)처럼 창립자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라자르(Lazare)는 이 수도회가 처음 태동한 파리의 지명(l'enclos Saint-Lazare)이다. 거기에 1515년에 시작된 옛 수도원(le Prieuré de Saint-Lazare)이 하나 있었다. 1632년, 그 수도원 건물을 뱅상 드 폴(Vincent de Paul, 1581-1660)이 양도받아 ‘선교수도회’의 거처로 만들면서 ‘Lazaristes’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경의 프랑스 예수회를 인도받은 후, 20세기 중반까지 북경 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다. (이미지 출처 =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17세기 파리의 생 라자르 성당(Eglise de St. Lazare). 라자리스트 본부에 있었던 성당이다. ‘선교수도회’(Congrégation de la Mission)는 1625년에 뱅상 드 폴(Vincent de Paul, 1581-1660)이 파리에서 창립한 수도회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흔히 ‘라자리스트’(Lazaristes)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코회(Franciscains)처럼 창립자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라자르(Lazare)는 이 수도회가 처음 태동한 파리의 지명(l'enclos Saint-Lazare)이다. 거기에 1515년에 시작된 옛 수도원(le Prieuré de Saint-Lazare)이 하나 있었다. 1632년, 그 수도원 건물을 뱅상 드 폴(Vincent de Paul, 1581-1660)이 양도받아 ‘선교수도회’의 거처로 만들면서 ‘Lazaristes’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경의 프랑스 예수회를 인도받은 후, 20세기 중반까지 북경 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다. (이미지 출처 =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오늘날 파리의 라자리스트 본부. 파리의 생 뱅상-드 폴 성당(Chapelle St. Vincent de Paul) (사진 출처 = mafenetresurparis.blogspot.com)
오늘날 파리의 라자리스트 본부. 파리의 생 뱅상-드 폴 성당(Chapelle St. Vincent de Paul) (사진 출처 = mafenetresurparis.blogspot.com)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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