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4호선은 청록색 라인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그중 절반이 하이디엔취(海淀區)를 통과한다. 북경의 서북쪽 지역이다. 이름난 대학과 연구소가 잇따라 늘어선 곳이다. 중국의 교육 1번지다. 국가도서관도 거기 있다. 이름 그대로 ‘국가’ 최고의 도서관이다. 우리는 4호선 국가도서관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도서관의 맞은편으로 가야 한다.

걸음을 재촉하면 공원 하나에 이른다. 석각예술박물관(石刻藝術博物館)이다. 옛 비석과 석조미술이 전시되어 있다. 아담하고 고즈넉하다. 거기 가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북경에 오래 산 이들도 그저 드물게 안다. 여행자나 유학생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몇몇은 오래도록 거기 머문다. 기억해야 할 이들이 거기 있는 까닭이다. 옛 북당의 그림자들, 선교사의 묘비가 그곳에 있다. 정복사(正福寺) 묘지의 비석이다.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선교사 묘비. 모두 34개의 선교사 비석이 있다. 대부분 북당 프랑스 선교사들의 것으로, 원래 정복사 묘지에 있었다. 비명(碑銘)은 라틴어와 중국어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각각의 묘비 아래에는 설명 표지석이 있다. 묘비 주인의 약력이 적혀 있다.  ⓒ오현석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선교사 묘비. 모두 34개의 선교사 비석이 있다. 대부분 북당 프랑스 선교사들의 것으로, 원래 정복사 묘지에 있었다. 비명(碑銘)은 라틴어와 중국어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각각의 묘비 아래에는 설명 표지석이 있다. 묘비 주인의 약력이 적혀 있다. ⓒ오현석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선교사 묘비. ⓒ오현석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선교사 묘비. ⓒ오현석

정복사 묘지의 시작

1701년부터 1724년까지, 북당의 선교사는 모두 책란(柵欄)에 묻혔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때부터 이어져 온 묘지다. 1610년, 리치가 죽자 만력제는 땅 하나를 내렸다. 부성문(阜成門) 바깥쪽 땅이었다. 사람들은 그 땅을 ‘책란’(柵欄)이라 불렀다. 황제가 하사한 장지(葬地)였다. 그 땅에 리치를 묻었다. 리치를 묻었던 이들도 차례로 그곳에 묻혔다. 북경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었다. 책란 묘지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20세기까지 이어졌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처음에 남당(南堂)에 살았다. 남당은 포르투갈 선교단의 집이었다. 포르투갈 국왕의 승인을 얻은 이들이었다. 프랑스인들은 달랐다.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북경에 왔다. 포르투갈의 승인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남당에서 그들은 눈칫밥 먹는 신세였다. 기회는 예기치 않게 왔다. 퐁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가 진상한 키니네(quinine) 덕분이었다. 강희제는 그에게 새로운 땅을 내어주었다. 북당(北堂)의 시작이었다. 북경 프랑스 예수회가 포르투갈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건이다. 1703년의 일이었다.

그들의 독립은 이승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저승의 공간에서도 그들은 독립을 원했다. 조국 프랑스의 자녀들을 더 이상 포르투갈 묘지에 누이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인만의 묘지가 절실했다. 1724년, 타르트르(Pierre Vincent de Tartre, 湯尙賢, 1669-1724)는 책란에 묻힌 마지막 프랑스 선교사였다. 그 이후로 그들은 새로운 묘지를 조성했다. 1724년에서 1730년 사이 어느 시점이다. 서직문(西直門)에서 서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정복사(正福寺) 마을이다. 인근의 불교 사원이 마을의 이름이었다. 거기 땅을 얻어 묘지와 여름 피정지를 지었다. 북당 프랑스 예수회의 묘지였다.

정복사 묘지, 책란 묘지, 석각예술박물관의 위치. 정복사는 붉은색 동그라미, 책란 묘지는 노란색 삼각형, 석각예술박물관은 파란색 네모로 표시했다. 주황색 별표는 국가도서관 위치다. 정복사 프랑스 선교사 묘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묘지가 있던 곳에 정복사 성당이 들어서 있다. 그곳에 있던 묘비 일부가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입장권을 사면 누구나 들어가서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歷史遺踪 - 正福寺天主敎墓地", 文物出版社, 2007, 2쪽.)
정복사 묘지, 책란 묘지, 석각예술박물관의 위치. 정복사는 붉은색 동그라미, 책란 묘지는 노란색 삼각형, 석각예술박물관은 파란색 네모로 표시했다. 주황색 별표는 국가도서관 위치다. 정복사 프랑스 선교사 묘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묘지가 있던 곳에 정복사 성당이 들어서 있다. 그곳에 있던 묘비 일부가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입장권을 사면 누구나 들어가서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歷史遺踪 - 正福寺天主敎墓地", 文物出版社, 2007, 2쪽.)
정복사와 책란 묘지의 위치. 정복사는 붉은색 네모, 책란은 파란색 동그라미다. 노란색 마름모는 북당. 주황색 세모가 남당. 녹색 동그라미는 동당과 서당이다. 책란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때부터 이어져 온 선교사 묘지다. 만력제가 리치의 장례를 위해 하사한 땅이었다. 부성문(阜成門) 바깥쪽의 땅으로 사람들은 그 땅을 ‘책란’이라 불렀다. (이미지 출처 - "歷史遺踪 - 正福寺天主敎墓地", 文物出版社, 2007, 3쪽.)
정복사와 책란 묘지의 위치. 정복사는 붉은색 네모, 책란은 파란색 동그라미다. 노란색 마름모는 북당. 주황색 세모가 남당. 녹색 동그라미는 동당과 서당이다. 책란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때부터 이어져 온 선교사 묘지다. 만력제가 리치의 장례를 위해 하사한 땅이었다. 부성문(阜成門) 바깥쪽의 땅으로 사람들은 그 땅을 ‘책란’이라 불렀다. (이미지 출처 - "歷史遺踪 - 正福寺天主敎墓地", 文物出版社, 2007, 3쪽.)

국왕의 수학자들, 거기에 묻히다

1730년, 새로운 묘지에 첫 번째 비석이 섰다.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였다. 정복사에 묻힌 첫 번째 인물이다. 그때는 묘지 터만 있었던 것 같다. 빈터에 부베를 묻었다. 묘지가 꼴을 갖춘 건 2년이 지나서였다. 묘지 한쪽에 돌로 만든 제단을 세웠다. 그 위에 화강암 십자가를 올렸다. 제단에는 1732년에 세운다는 글을 새겨 넣었다. 간략한 라틴어 문구였다. 그때 묘지의 봉헌식이 있었다. 비로소 격조를 갖추게 되었다.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의 묘비 표면 ⓒ오현석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의 묘비 표면 ⓒ오현석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의 묘비 아래 설명 표지석 ⓒ오현석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의 묘비 아래 설명 표지석 ⓒ오현석

3년 후에 묘지는 두 번째 손님을 들였다.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張誠, 1654-1707)이다. 그는 1707년 사망했고, 책란에 안장되었다. 부베와 제르비용은 북경 프랑스 예수회의 시초였다. 루이 14세가 파견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게다가 제르비용은 프랑스 선교단의 초대 책임자(1703)였다. 선교단 독립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를 책란에 둘 수는 없었다. 그의 묘소는 1735년에 정복사로 이장되었다.

그 이후로 23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1738년의 레지(Jean-Baptiste Régis, 雷孝思, 1663-1738)로부터 1793년의 아미오(Jean-Marie Amiot, 錢德明, 1718-93)까지다. 모두 북당의 선교사였다. 그들의 비석이 차례로 정복사에 세워졌다. 그들 옆에 8명의 중국인 선교사도 묻혔다. 라틴어와 중국어로 비명(碑銘)이 새겨졌다. 글자가 패인 깊이만큼 눈물도 고였다. 동료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마음이었다. 슬픔은 그렇게 돌에 새겨졌다.

조제프 아미오(Jean-Marie Amiot, 錢德明, 1718-93) 묘비 ⓒ오현석
조제프 아미오(Jean-Marie Amiot, 錢德明, 1718-93) 묘비 ⓒ오현석
조제프 아미오(Jean-Marie Amiot, 錢德明, 1718-1793) 묘비 아래의 설명 표지석 ⓒ오현석
조제프 아미오(Jean-Marie Amiot, 錢德明, 1718-1793) 묘비 아래의 설명 표지석 ⓒ오현석

예수회 해체, 스러져 가는 묘지

메리쿠르(Hubert de Méricourt, 李俊賢, 1729-74)의 죽음은 시기가 절묘했다. 그가 북당에 온 건 1773년이다. 그해에 예수회가 해체되었다. 그는 북당에 마지막으로 파견된 예수회원이었다. 이듬해에 그가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온 이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떴다. 예수회 해체 소식과 함께 사라진 거다. 그는 브누아(Michel Benoist, 蔣友仁, 1715-74)와 더불어 정복사에 묻혔다. 두 사람의 죽음은 북경 예수회의 마지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에 정복사 묘지는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황제들은 선교활동을 잇달아 금지했다. 선교사 추방령도 이어졌다. 청 조정에서 일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추방되었다. 그들은 북경의 성당에 흩어져 살았다. 북당을 포함한 4개 성당이었다. 선교사가 줄어드니 사망하는 이도 적어졌다. 정복사에 갈 일이 자연스레 줄었다. 묘지를 관리할 만한 이도 따로 없었다. 발길이 뜸해진 이유다. 1777년의 첫 번째 보수작업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니콜라 로(Nicolas Raux, 羅廣祥, 1754-1801) 신부의 초상화. 루이 16세가 북경에 파견한 라자리스트 선교사다. 그는 사제이자 과학자였다. 천문학과 지리학, 식물학과 자연사 분야에 해박했다. 그는 북당의 예수회를 이어 프랑스 선교회를 맡았다. 흠천감에서 일하며 북당의 선교업무를 책임졌다. (이미지 출처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니콜라 로(Nicolas Raux, 羅廣祥, 1754-1801) 신부의 초상화. 루이 16세가 북경에 파견한 라자리스트 선교사다. 그는 사제이자 과학자였다. 천문학과 지리학, 식물학과 자연사 분야에 해박했다. 그는 북당의 예수회를 이어 프랑스 선교회를 맡았다. 흠천감에서 일하며 북당의 선교업무를 책임졌다. (이미지 출처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북당의 예수회도 정복사 묘지처럼 스러져 가고 있었다. 지원 인원이 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프랑스 라자리스트(Lazaristes)는 세 명의 선교사를 북당에 보냈다. 니콜라 로(Nicolas Raux, 羅廣祥 1754-1801). 길랭(Jean-Joseph Ghislain, 吉德明, 1751-1812). 샤를 파리(Charles Paris, 巴正茂, 1738-1804)였다. 세 사람은 1785년 4월 24일에 북경에 도착했다. 북당에 남아있던 이들은 세 사람을 얼싸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기쁨과 회한의 눈물이었다. 안도와 위로와 포옹이었다.

라자리스트 이후의 정복사

로(Raux)는 프랑스 선교단의 새로운 책임자였다. 그는 북당의 예수회를 인수하여 다시금 꾸려갔다. 1794년에는 새로운 이들이 왔다. 라미오(Louis Lamiot, 南彌德, 1767-1831)와 한나(Robert Hanna, 韓納慶, 1762-1797)였다. 그들 역시 청 조정에서 일했다. 라미오는 러시아어 번역을 했고, 한나는 흠천감에서 로 신부를 도왔다. 두 사람은 북당 라자리스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인원이었다. 1835년에 이를 때까지 그랬다. 지난한 시절이었다.

어려움은 중국 내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복병이 있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다. 루이 16세의 처형(1793) 소식은 프랑스 선교사 전체를 뒤흔들었다. 북당 선교사들의 충격은 컸다. 북당은 프랑스 국왕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선교지였다. 아미오는 소식을 듣고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그의 사망원인이다. 약속된 자원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사람도 물자도 모두 끊어졌다. 중국으로 가는 길 자체가 막혀버렸다. 북당의 살림은 급속히 나빠졌다. 그래서였을까. 1797년에 한나가 죽었다.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북당에 온 지 불과 2년 반만이었다. 그는 정복사에 묻힌 첫 번째 라자리스트였다.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불렀다. 1801년에는 로 신부가, 1804년에는 파리 수사가, 1812년 8월에는 길랭 신부가 죽었다. 루이 16세의 수학자들이었다. 이들 라자리스트 모두 정복사 묘지에서 안식했다. 가경(嘉慶) 연간의 일이었다. 가경제는 1811년에 북경 선교사를 모조리 내쫓았다. 조정에서 일하는 5명의 선교사만이 북경에 남게 되었다. 길랭이 죽은 건 그 이듬해였다.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선교사 묘비. ⓒ오현석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선교사 묘비. ⓒ오현석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선교사 묘비 ⓒ오현석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프랑스 선교사 묘비 ⓒ오현석

이름 없는 비석

라미오와 한나가 도착하던 때, 북당에는 3명의 옛 예수회원이 있었다. 중국인을 제외한 숫자다. 그라몽(Jean-Baptiste de Grammont, 梁棟村, 1736-1811?), 판지(Giuseppe Panzi, 潘延璋, 1734-1811?), 프와로(Louis Antoine de Poirot, 賀淸泰, 1735-1813)다. 다행히 세 사람은 1803년에 예수회원의 신분을 회복했다. 그들은 러시아에 유지되고 있던 예수회에 새롭게 서원하고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 사람은 러시아 예수회에 합류하지 못했다. 러시아 예수회 역시 북당에 지원 인원을 보내지 못했다. 그들 셋은 1811년 이후 2년 사이에 차례로 사망했다. 북당의 마지막 예수회원이었다. 프와로 신부가 세상을 뜬 1813년은 예수회가 재건되기 한 해 전이었다.

세 사람의 묘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관련 기록도 뚜렷하지 않다. 아미오 이후에는 남겨진 비문(碑文)이 없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북당에는 이제 라미오만 남았다. 북당의 마지막 프랑스 선교사였다. 그는 조정의 일로 바빴다. 연락책의 임무도 있었다. 중국 다른 지역에 은거한 선교사들도 챙겨야 했다. 비밀리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중국인 선교사 몇이 더 있었으나 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아까운 일손을 죽은 이의 비문을 새기는 데 쓸 수 없었을 게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비석이 섰다. 동료의 무덤에 세운 문자 없는 묘비였다. 몇몇 자료는 그 무명의 비석에 관해 말한다. 1801년에서 1819년 사이에 사망한 이들이다. 그들이 북당의 예수회와 라자리스트 선교사임을 암시한다.

마지막 한 사람, 라미오는 1820년에 마카오로 추방되었다. 거기서 세상을 떴다. 1831년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북당 프랑스 선교단 역시 끝났다. 프랑스의 북경 선교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한 시절이 지나야 했다. 19세기 북경 선교는 물리(Joseph-Martial Mouly, 孟振生, 1807-1868)로부터 시작된다. 그 역시 프랑스 라자리스트였다. 그는 은밀히 북경에 들어갔다. 1835년 2월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북당의 식물학자 뎅카르빌(Pierre Nicolas d'incarville, 湯執中, 1706-57)의 묘비 설명 표지석. ⓒ오현석
북당의 식물학자 뎅카르빌(Pierre Nicolas d'incarville, 湯執中, 1706-57)의 묘비 설명 표지석. ⓒ오현석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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