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長城)을 지나자 기온은 이내 4도가 떨어졌다. 낮 기온 영하 2도. 창밖 풍경은 곳곳이 눈밭이다. 북경 칭허(淸河)역에서 장자커우(張家口) 총리(崇禮)역까지는 한 시간 반의 여정이다. 총리에는 스키장과 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북경 동계올림픽을 위한 시설이다. 그 덕에 북경 시내에서 총리까지 고속철도가 깔렸다. 열차의 속도만큼이나 쾌적한 이동이 된 것이다.

원래 그곳은 칼바람 몰아치는 만리장성 깊은 고갯마루였다. 몽골 초원 지대와 거친 벌판으로 나아가던 길목이었다. 옛사람들에겐 꽤나 고된 길이었다. 그 길 언저리에 서만자촌(西灣子村)이 있었다. 만리장성 밖 작고 외딴 마을이었다. 서만자촌은 그런 곳이었다. 거기에 서만자 성당이 있었다. 한 시절, 북경 선교의 맥을 이어낸 자리였다. 19세기 초에 북경 선교는 거의 허물어져 있었다. 사라져가던 맥박을 중국인 라자리스트가 이어 내었다. 서만자는 그들이 활동한 곳이었다. 서만자에 가 봐야 할 이유였다.

총리역 풍경. 북경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서만자로 갈 수 있다. 열차는 북경 북역(北驛) 혹은 청허역(淸河驛)에서 출발해 총리역(崇禮驛)까지 간다. 총리역이 종점으로 하루 다섯 차례 열차가 있다. 북경 동계올림픽을 위한 시설이니만큼 깔끔하고 쾌적하다. ©오현석
총리역 풍경. 북경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서만자로 갈 수 있다. 열차는 북경 북역(北驛) 혹은 청허역(淸河驛)에서 출발해 총리역(崇禮驛)까지 간다. 총리역이 종점으로 하루 다섯 차례 열차가 있다. 북경 동계올림픽을 위한 시설이니만큼 깔끔하고 쾌적하다. ©오현석
서만자 성당 가는 길에 보이는 스키장 풍경. 장자커우시(張家口市) 총리구(崇禮區)에는 두 대형 스키장이 있다. 스키장 주변으로는 리조트 시설이 늘어서 있다. 북경에서 스키를 즐기려는 이들은 모두 이곳으로 간다. 겨울 시즌 주말이라면 일찌감치 열차표를 예매해 두는 게 좋다.&nbsp;©오현석<br>
서만자 성당 가는 길에 보이는 스키장 풍경. 장자커우시(張家口市) 총리구(崇禮區)에는 두 대형 스키장이 있다. 스키장 주변으로는 리조트 시설이 늘어서 있다. 북경에서 스키를 즐기려는 이들은 모두 이곳으로 간다. 겨울 시즌 주말이라면 일찌감치 열차표를 예매해 두는 게 좋다. ©오현석

서만자 천주교의 시작

총리역은 마을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역 앞에는 택시가 늘어서 있을 게다. 하루에 다섯 차례, 열차가 닿는 시간마다 택시가 줄을 선다. 역을 나오면 택시를 타야 한다. 하지만 마을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다. 15분이면 서만자 성당에 닿는다. 그곳 사람 모두가 성당을 안다. 성당이 하나밖에 없는 데다가 제법 큰 규모라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19세기 풍경 속 성당은 아마 더욱 그랬으리라. 편벽한 마을에 서양식 건축이 있었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을 거다. 실제로 당시 마을 사람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다. 첫 시작은 강희(康熙) 연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00년 즈음이었다.

강희제는 당시 북방 원정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황제는 북쪽 변방에 많은 군사를 주둔시켰다. 몽골과 인접한 곳인 장자커우(張家口) 역시 주요 주둔지 중 하나였다. 그곳에 예수회 선교사 파르넹(Dominique Parrenin, 巴多明, 1665-1741)도 있었다. 황제의 수행자로 온 것이었다. 이때 서만자의 촌부 하나가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장근종(張根宗)이라는 이다. 마을에서 힘 꽤나 썼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전교로 1백여 명의 촌민 대부분이 신자가 되었다 하니 말이다. 그때부터 선교사들이 서만자촌을 오가기 시작했다. 1726년 즈음에는 마을에 작은 성당이 섰다. 서만자에 세워진 첫 번째 성당이었다.

서만자 성당 모습.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지금의 건축은 2009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수년 동안 공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성당은 전면에서 후면까지 길이가 61미터, 폭 25미터, 종루의 최고 높이는 58미터다. 성당 공간은 크게 두 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성당 전면 계단을 올라가 진입하게 되는 본당 구역과 그 아래층에 있는 사무 및 거주 구역이다. 성당의 주요 부분과 각종 조형물은 모두 석재로 지어졌다.&nbsp;©오현석<br>
서만자 성당 모습.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지금의 건축은 2009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수년 동안 공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성당은 전면에서 후면까지 길이가 61미터, 폭 25미터, 종루의 최고 높이는 58미터다. 성당 공간은 크게 두 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성당 전면 계단을 올라가 진입하게 되는 본당 구역과 그 아래층에 있는 사무 및 거주 구역이다. 성당의 주요 부분과 각종 조형물은 모두 석재로 지어졌다. ©오현석
서만자 성당 앞 모습. ©오현석
서만자 성당 앞 모습. ©오현석

북경 프랑스 라자리스트의 상황

서만자가 주요 선교 기지로 부상한 것은 1829년부터다. 북경 선교가 몰락한 결과였다. 1801년 11월, 북당 프랑스 라자리스트 책임자인 로(Nicolas Raux, 羅廣祥, 1754-1801)가 사망했다. 뇌졸중으로 인한 급사였다. 포르투갈 예수회원 데스핀하(José d‘Espinha, 高慎思, 1722-88)의 뒤를 이어 흠천감정에 올랐던 이다. 로의 죽음은 엄청난 손실이었다. 로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선교구장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학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문학에 소질이 있었고 일을 기획하거나 경영하는 솜씨도 좋았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능숙하게 중국어를 말했다. 만주어로도 소통이 가능했다. 만주어 문법 책을 편찬했고 타타르어-만주어 사전도 펴냈다. 그리 보내기엔 못내 아쉬운 사람이었다.

로의 자리는 라자리스트 동료인 길랭(Jean-Joseph Ghislain, 吉德明, 1751-1812)이 이어받았다. 로와 함께 북경에 파견되어 북당 예수회를 인수한 이다. 길랭은 로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그는 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각종 기계와 기술에 밝았다. 기계 만지는 솜씨는 청 궁정에서 특히 유용했다. 하지만 그의 활동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중국 관리를 상대하거나 교류하는 일에 그는 서툴렀다. 인문과 예술 분야 지식은 그리 높지 않았던 탓이다. 혼자 일하길 좋아하는 성격도 한몫 했다. 북당에 온 초기부터 로가 모든 대외적인 일들을 맡았던 이유다. 대신 길랭은 선교 본연의 업무에 집중했다. 신학생 교육이었다.

성당 앞뜰에는 서만자 천주교 역사를 소개한 안내판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다.&nbsp;©오현석<br>
성당 앞뜰에는 서만자 천주교 역사를 소개한 안내판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다. ©오현석
서만자 성당 앞 거리. 성당 맞은 편으로 가면 시장이 있다. ©오현석
서만자 성당 앞 거리. 성당 맞은 편으로 가면 시장이 있다. ©오현석

라자리스트 북경 신학교

1785년 로 일행이 북경에 이르렀을 때, 북당에는 신학교가 없었다. 북당과 부속 건물, 정복사 묘지 그리고 옛 예수회원 몇이 북당 선교지의 전부였다. 물론 교리교육이 수시로 행해졌고, 소수의 중국인에게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를 세워 정규 과정을 운영한 건 아니다. 그에 반해 현지인 성직자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프랑스혁명으로 선교사가 더는 오지 못하고 있었다. 북경 현지 상황도 좋지 않았다. 황제는 천주교를 더욱 적대시했다. 로 신부가 현지인 신학교 설립을 타진한 이유다.

로의 애초 계획은 북경 신학교가 아니었다. 그는 중국 바깥에 신학교를 세우려 했다. 마다가스카르섬 동쪽에 있는 프랑스령 부르봉 섬(le Bourbon)이 후보지였다. 지금의 레위니옹 섬(la Réunion)이다. 중국에 있던 유럽인 사제들은 현지인 사제를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의 인식 속에서 중국인은 사제에 어울리지 않았다. 로의 계획은 그런 분위기를 고려한 것이었다. 북경 신학교를 결정한 건 의외로 파리 본부였다. 그쪽이 재정 운영 면에서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로 신부는 파리 본부의 결정을 신속히 이행했다. 북당 부속 건물에 신학교를 만들고 길랭에게 운영을 맡겼다. 교사는 북당의 선교사들이 맡았다. 포르투갈 신부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동당(東堂)의 페레티(Ferreti)가 북당에 와서 중국어로 철학을 가르쳤다. 1801년 11월 16일, 로가 사망했을 때, 북당 신학교에 있던 중국인 성직자는 사제가 셋, 수사가 둘이었다. 신학생은 일곱이 있었다. 신학 과정이 둘, 라틴어 과정이 다섯이었다. 신학교 밖에서 예비생으로 있던 인원은 더 많았다고 한다.

서만자 성당 주일 미사 광경. 지난 11월 26일의 모습이다. 주일미사 시간은 낮 12시 반이다. 본당 1층 좌석이 모두 찼고, 뒤편에 서 있는 이들도 많았다. 2층에는 의자가 없었는데 십여 명 정도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어림해 보니 대략 1천여 명이었다.&nbsp;©오현석
서만자 성당 주일 미사 광경. 지난 11월 26일의 모습이다. 주일미사 시간은 낮 12시 반이다. 본당 1층 좌석이 모두 찼고, 뒤편에 서 있는 이들도 많았다. 2층에는 의자가 없었는데 십여 명 정도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어림해 보니 대략 1천여 명이었다. ©오현석

길랭의 제자들, 그리고 설마태오

로가 죽자 길랭은 교육에 더욱 집중했다. 1812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20명의 뛰어난 중국인 사제를 양성했다. 길랭은 수시로 북경과 인근의 선교지를 순회했다. 20-30리 이내에 있는 신자 공동체였다. 그 과정에서 사제 지망자를 계속 발탁하고 관리했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1805년 교안(敎案)으로 선교사들의 상황이 갈수록 나빠졌다. 선교사 입국도 전면 금지되었다. 1811년에는 청 조정에서 일하는 다섯을 제외하고 모두 북경에서 추방되었다. 중국인 선교 일꾼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길랭이 길러낸 사제들은 여러 선교지에 파견되어 그 몫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설마태오(薛瑪竇, Matthieu Sué, 1780-1860)다. 산서(山西) 사람으로 180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즈음 북경 선교지는 위태로움의 연속이었다. 1808년 남당(南堂)에서 북경 주교 구베아(Alexandre de Gouvéa, 湯士選, 1751-1808)가 사망했다. 1812년에는 동당(東堂)이 철거되었다. 거기 있던 포르투갈 라자리스트들은 남당으로 피신했다. 북당 상황도 좋지 않았다. 폭우로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걸 보수하느라 재정이 바닥나버렸다. 근근이 버티는 시절이 이어졌다. 1820년에는 라미오(Louis Lamiot, 南彌德, 1767-1831)마저 추방되었다. 북당의 마지막 프랑스 선교사였다.

(왼쪽부터) 니콜라 로의 초상화, 설마태오의 초상화. (이미지 출처 = Vincentian Sources;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br>
(왼쪽부터) 니콜라 로의 초상화, 설마태오의 초상화. (이미지 출처 = Vincentian Sources;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서만자, 북경 선교의 맥을 잇다

북경을 떠나기 전, 라미오는 설마태오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북당 프랑스 선교구장을 맡겼다. 하지만 해 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북당의 운명도 다해 가고 있었다. 1827년, 청 조정이 북당을 폐쇄하고 국가 재산으로 삼았다. 설마태오는 북당 식구들을 이끌고 남당으로 갔다. 남당 역시 안전한 거처가 아니었다. 불안이 도처에서 엄습했다. 새로운 피난처가 필요했다. 북경을 멀리 떠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찾은 대안이 서만자(西灣子)였다. 외진 산골이라 외부에 노출이 덜한 곳이었다. 피신하기엔 제격이었다. 작은 숫자지만 거기에 신자들이 남아 있었다. 훗날을 도모해 볼 만한 장소였다.

1829년, 설마태오는 북당 프랑스 선교구를 서만자로 옮겼다. 그리하여 서만자는 북경 선교의 맥을 잇는 곳이 되었다. 그저 피난처만은 아니었다. 설마태오 일행은 거기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서만자촌 150여 가구 대부분이 신자가 되었다 한다. 그 결실로 이룬 것이 서만자 성당이었다. 크고 아름다운 건축이었다. 또한 신학교와 교리 교사를 위한 학교도 세웠다.

1835년, 프랑스 라자리스트 물리(Joseph-Martial Mouly, 孟振生, 1807-68) 신부가 서만자에 이른다. 그는 1841년에 몽골대목구 초대 주교가 되었다. 이로써 서만자는 선교기지로서의 격이 한층 더 높아진다. 현지인 사제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북당 신학교가 길러낸 이들이었다. 그들의 손으로 일군 결과였다. 그들의 몸짓이 이어낸 역사였다.

20세기 서만자 성당과 신학교의 1920-40년 풍경이다. 북경 조약(1860)이 체결된 이후, 프랑스 라자리스트는 북경 선교지로 돌아간다. 그들에 이어 몽골대목구를 맡은 이가 성모성심수도회(CICM)였다. 정식 명칭은 “La Congrégation du Cœur Immaculé de Marie”이다. 창립된 곳이 벨기에 안데를레흐트(Anderlecht)의 스쿠트(Scheut)여서 흔히 ‘스쿠티스트’(Scheutiste)라 부른다. 중국 선교를 위해 창립한 수도회다. 1865년 12월, 창립자인 페르비스트(Théophile Verbist, 南怀义, 1823-68) 신부는 동료 네 명을 이끌고 서만자에 이르렀다. 몽골대목구를 넘겨받은 이후, 그들은 20세기 중반까지 몽골 지역 선교를 맡았다. 서만자 성당이 그들의 중심이었다. (이미지 출처 = <a data-cke-saved-href="https://digitallibrary.usc.edu/asset-management/2A3BF1EPMBS2?FR_=1&amp;W=1912&amp;H=916" target="_blank" href="https://digitallibrary.usc.edu/asset-management/2A3BF1EPMBS2?FR_=1&amp;W=1912&amp;H=916">digitallibrary.usc.edu</a>)
20세기 서만자 성당과 신학교의 1920-40년 풍경이다. 북경 조약(1860)이 체결된 이후, 프랑스 라자리스트는 북경 선교지로 돌아간다. 그들에 이어 몽골대목구를 맡은 이가 성모성심수도회(CICM)였다. 정식 명칭은 “La Congrégation du Cœur Immaculé de Marie”이다. 창립된 곳이 벨기에 안데를레흐트(Anderlecht)의 스쿠트(Scheut)여서 흔히 ‘스쿠티스트’(Scheutiste)라 부른다. 중국 선교를 위해 창립한 수도회다. 1865년 12월, 창립자인 페르비스트(Théophile Verbist, 南怀义, 1823-68) 신부는 동료 네 명을 이끌고 서만자에 이르렀다. 몽골대목구를 넘겨받은 이후, 그들은 20세기 중반까지 몽골 지역 선교를 맡았다. 서만자 성당이 그들의 중심이었다. (이미지 출처 = digitallibrary.usc.edu)
20세기 서만자 성당과 신학교의 1920-40년 풍경. (이미지 출처 = <a data-cke-saved-href="https://www.delcampe.net/fr/collections/cartes-postales/chine/china-le-seminaire-de-si-want-tze-tchagar-1894876383.html" target="_blank" href="https://www.delcampe.net/fr/collections/cartes-postales/chine/china-le-seminaire-de-si-want-tze-tchagar-1894876383.html">delcampe.net/fr</a>)
20세기 서만자 성당과 신학교의 1920-40년 풍경. (이미지 출처 = delcampe.net/fr)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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