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우리는 양동에 삽니다”
"취약하고 불안정한 인생들"이 사회에 던지는 질문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우리는 양동에 삽니다”,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지음, 후마니타스, 2021. (표지 제공 = 후마니타스)

서울역 앞 양동 쪽방촌 주민 8명과 주거 빈곤 현장 활동가 2명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왔다.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에 참여한 작가 11명이 이들을 인터뷰하고 정리해 엮은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우리는 양동에 삽니다”이다.

일생을 빈곤에서 헤어나올 수 없던 이들이 꺼내놓은 이야기는 빈곤이 개인과 사회, 시대를 아우르는 입체적 문제이자 이에 대해 사회는 과연 무엇을 했고 해야 하는가란 물음을 담고 있다. 

행정구역으로 양동은 서울시 남대문로5가동이다. 양동이란 지명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1980년에 사라졌지만 이곳에 오래 살아온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양동이다.

한국전쟁 직후 맨손으로 상경한 이들, 넝마주이, 구두닦이, 껌팔이들의 하루 잠자리 돼 준 하숙집과 판자촌이 형성됐다. 1960-70년대 도심 재개발로 판자촌이 대거 철거되고 힐튼호텔 등 고층 건물이 속속 들어섰지만, 1998년 외환위기로 이곳에 가난한 이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쪽방촌이 됐다.

최근 2년 동안 주민들은 재개발 바람에 내몰리고 있다. 2019년 10월 서울시가 ‘양동 도시정비형 재개발 구역 정비 계획 변경안’을 가결하면서 당시 400명 정도였던 주민들이 절반으로 줄었다. 재개발 소식에 건물주들은 “사업이 잘못돼서”, “리모델링 공사”, “게스트하우스로 업종 변경”, “붕괴 위험으로 일시 폐쇄” 같은 이유로 주민들을 쫓아냈다. 보통 두어 달치 월세를 면제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세입자 보호에 대한 정보를 모르거나 압박과 갈등에 부대껴 한 푼도 못 받고 떠난 주민들도 있다. 건물주 누구도 재개발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개발 시작 전 빈집이 돼야 도시정비법과 토지보상법이 세입자에게 보장하는 주거 이전비, 임대주택, 이사비 등과 같은 의무에서 벗어나기 때문이었다.

2019년 400명 정도였던 주민들은 집주인들의 퇴거 종용으로 이제 200명 정도 남았다. ⓒ김수나 기자<br>
2019년 400명 정도였던 주민들은 집주인들의 퇴거 종용으로 이제 200명 정도 남았다. ⓒ김수나 기자

“가난한 나의 이름으로 내 삶과 내 집을 말하다”

책에 나오는 이들은 굶주림과 가정폭력, 가족의 해체, 생계 등으로 어린 나이에 서울로 왔다. 노숙을 하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반복되는 오랜 노숙으로 대부분 병을 얻는다. 아픈 몸이 됐을 때 겨우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됐지만 안정된 삶을 살기에 수급비는 턱없이 적다. 그마저도 평당 강남보다 높은 임대료를 챙기면서 건물 관리를 방치하는 건물주, 십일조로 수급비 대부분을 헌납받는 교회, 치료와 복지라는 허울 아래 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버린 정신병원과 복지시설 등으로 알뜰히 흘러간다.

힘없고 아는 것이 없어 명의도용 범죄집단에 휘말려 수천, 수억에 이르는 정체 모를 빚을 떠안기도 한다. 기술을 쌓거나 벌이가 있어 안정된 삶을 바라보던 이들도 1998년 외환위기로 쓰러진다. 살아오면서 이들에게는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거나 도와주는 사람도 제도도 없었다. 사회는 오히려 이들의 가난을 먹이 삼았고, 기회와 자원이 없는 삶은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기 어려웠다.

여덟 살에 양동에 들어와 몇 번의 철거와 강제이주에도 70년 가까이 양동을 지킨 권용수 씨.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노숙을 시작해 오랫동안 서울역과 병원을 오가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됐고, 늘 “마지막”이라며 방을 잡지만 여전히 양동에서 이사를 반복하는 강성호 씨.

부유한 어린 시절 호강하고 14년 동안 외항선을 타며 남 부럽지 않게 돈을 벌었지만, 모든 재산을 챙겨 달아난 형의 배신과 IMF 외환위기로 거리 생활을 시작한 김강태 씨.

30년을 양동에 살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산 탓에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주민’이었던 적은 없고, 병을 얻은 뒤에야 기초 생활 수급자로 전입신고를 한 문형국 씨.

배곯았던 머슴살이, 누명으로 소년소에 가게 돼 억울함에 발을 동동 구르고 서울로 와 넝마주이를 하며 리어카 위에서 한뎃잠을 자면서 "내가 생각해도 대단해요, 살아 있는 게"라고 말하는 이석기 씨. 그는 10년 동안 염전 노예노동 끝에 경찰의 도움으로 겨우 받아 낸 임금을 집에 다 줘버리고 다시 거리 생활을 하다 예순이 훨씬 넘어 양동에 “첫 내 집”을 얻었다. 

열세 살에 친정으로 갔다는 엄마를 찾아 집을 나와 걸어서 서울에 온 뒤 아동보호소, 넝마주이를 거쳐 노숙과 쪽방을 오가다 명의 범죄 일당에게 당해 큰 빚을 지고 파산신청으로 겨우 회생한 장영철 씨.

1976년 서울에 온 뒤로 서울역 근처를 맴돌며 살다 딸을 낳았지만 강제로 헤어지고, 임금보다 살 곳이 없어 선택했던 머슴살이 끝에 양동에 정착해 딸과 다시 만날 날을 꿈꾸는 김기철 씨.

남편의 폭력을 피해 찾아든 양동에서 오랜 시간 의지처가 돼 준 “우리 아저씨”와 함께 이웃들을 살뜰히 챙기며 살아가는 이양순 씨.

이들이 바로 양동 쪽방촌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들이다.

힐튼호텔이 바라다보이는 양동 쪽방촌 한가운데 골목길. ⓒ김수나 기자
힐튼호텔이 바라다보이는 양동 쪽방촌 한가운데 골목길. ⓒ김수나 기자

"취약하고 불확실한 인생을 하루하루 이어가는 의지"
나누어진 쪽방이지만 살아 있는 관계와 돌봄

젖소농장, 양계장, 새우 배 등 안 해 본 일 없는 김기철 씨는 노숙하며 살다 겨우 가정을 이뤘지만 쪽방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며 어느 날 구청이 말도 없이 아이를 시설로 데려가 딸과 헤어졌다. “임대주택에 들어가게 된다면 (딸과) 다시 함께 살고 싶다”는 딸을 향한 애끓는 그리움과 함께 양동에 대한 미움과 분노도 크지만 주민 공영 장례를 꼭 챙기는 애정도 보여 준다.

이들은 서로 동료가 돼 함께 나눈다. 김강태 씨는 “내가 (일을) 갔다 오고 나면 내가 돈 주고, 그 사람이 갔다 오면 내한테 돈도 주고 먹을 것도 사주고, 그래가 다 씁니다. 대한민국에 그런 법은 없지만, (거리에서) 그 좋은 법을 만들어 놨어요.... 내가 놀게 되면 다른 친구가 내한테 돈도 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니까요.”

쪽방은 얇은 벽 사이로 겹겹이 가깝지만 누가 죽어도 별 관심을 갖지 않을 만큼 단절된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양순 씨는 옆방에 돌봄이 필요한 이웃이 살면 먹을 것을 갖다주고 잘 지내는지 살핀다. 수급비가 제때 들어오지 않자 또 하나의 이웃인 동주민센터가 아니라 구청으로 바로 달려가 세게 항의하는 권용수 씨는 쪽방 주민의 권리를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공사판 잡부부터 그릇닦이와 요리, 식당 운영까지 해 봤지만 “가진 거 없고 배운 거 없는 사람이 내 노력한 만큼 먹고 살겠다 하니까 쪽방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 권용수 씨는 누구보다 빈곤의 굴레가 단지 개인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임금 노동자든 시설 봉사자든 “이곳저곳에 자리를 만들어 가며 꾸준히 일해 온” 김강태 씨는 모질고 비인간적인 쪽방 주인들의 면모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쪽방 주인들이 죽은 사람 지갑 빼서 돈만 챙기는 인간들이야. (세입자가) 오줌 누러 가는 것도 안 보이고 그러면, 쪽방 주인이 “어이 누구야 누구야” 깨워 보면 가만 있어요. 죽으면 112고 119고 신고를 해야 되는데 주인들은 지갑에서 돈 빼기 바빠요. 주인이 그런 짓거리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 시체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그의 인터뷰를 정리한 박소영 씨, 이채윤 씨는 “일평생 열심이었고, 오래도록 가난했던 삶. 우리는 그의 부지런함과 가난을 어떤 접속어로 이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의 부지런함을 우리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럼에도 가난한”이라는 말로 잇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취약하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인생 속에서도 하루하루 일상을 이어가려는 의지에 가까웠다”고 적었다.

이 책은 “홈리스들의 일상과 심리는 경제적 상층은 물론이고 하위 노동자 계층과도 많이 다르다”고 말한다. 홈리스 대부분은 건강과 노동력, 가족관계를 회복하고 노동 시장과 소비 시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막혀 있다. 시장 자본주의의 이른바 ‘건강한’ 근로 능력과 효율성, 생산성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홈리스를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입주민이 퇴거한 뒤 폐쇄된 양동 쪽방촌 건물. 문과 창틀을 나무 등으로 막아놨다. ⓒ김수나 기자<br>
입주민이 퇴거한 뒤 폐쇄된 양동 쪽방촌 건물. 문과 창틀을 나무 등으로 막아놨다. ⓒ김수나 기자
입주민이 퇴거한 뒤 폐쇄된 양동 쪽방촌 건물. 문과 창틀을 나무 등으로 막아놨다. ⓒ김수나 기자
입주민이 퇴거한 뒤 폐쇄된 양동 쪽방촌 건물. 문과 창틀을 나무 등으로 막아놨다. ⓒ김수나 기자

"마을을 일궈 온 쪽방 주민들의 노고와 권리"
익숙해서 떠날 수 없는 양동,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동네를 만들어 낸 과정

대학생이던 1995년부터 주거 빈곤 현장에서 활동하며 전국실직노숙자대책종교, 시민단체협의회,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노실사), 실천단에서 일한 이동현 활동가는 홈리스행동의 전신 격인 노실사 사랑방 시절부터 이어온 홈리스들과의 인연을 소개한다. 반 빈곤 운동 활동가로서만이 아니라 홈리스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엿보인다.

그는 책에서 ”(화자들의 이야기에는) 우리 사회에서 가난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덫에서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이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해 왔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갈 곳 없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감금되고, 착취되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재료로 소모될 때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는가? ‘재개발’을 명목으로 우리는 이들이 또다시 어디론가 휩쓸려 가도록 내버려 둬야 할까?” 이제 더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책을 엮어낸 이유다.

이동현 활동가는 겨우 정착했던 삶을 또다시 유랑하게 만드는 반복되는 재개발과 강제 퇴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지금껏 쪽방이 재개발돼 나가야 했던 사람들이 옮겨 간 삶들을 보면, 아주 잘해 봐야 수평 이동이에요. 더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원하는 지역으로 간 게 아니기 때문에 수평 이동이라고 하기도 어렵죠.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쪽방 주민들이 그동안 여기 살면서 마을을 일궈 온 노고와 권리를 인정하고 살던 자리에 주거 공간이 마련돼야 해요. 이분들도 그걸 원하고요.”

2019년부터 해피인 서울역 위원장으로 매주 양동에 도시락을 전하며 주민의 일상 곳곳을 살피는 신종호 씨. 그는 집주인과 관리인들이 쪽방의 열악한 환경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열악한 방을 내주고 그 대가로 (허공에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만큼의 월세를 받는 게 굳어진 것”이라며 주민과 관리인, 집주인 간의 격차가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이유로 건물을 폐쇄했지만 실은 재개발을 앞두고 입주민을 퇴거시키기 위한 건물주들의 꼼수다. ⓒ김수나 기자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이유로 건물을 폐쇄했지만 실은 재개발을 앞두고 입주민을 퇴거시키기 위한 건물주들의 꼼수다. ⓒ김수나 기자

양동은 지금 재개발이 확정돼 건물 곳곳이 폐쇄됐다. 200명 남짓 남은 주민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서울시는 지난 10월 양동 구역 정비계획 관련 결정안을 수립했다. 결정안에는 쪽방 주민 182세대에 대한 임대주택 공급 계획이 포함됐지만, 그 대상에는 독립생활이 불가능한 자가 제외됐고 주거면적이 14제곱미터(약 4.2평)에 불과한 등 해결할 과제가 많다. 임대주택이 제공되더라도 마을 운영에 대한 주민들의 주체성과 운영권이 존중되고 이들이 각자 집에 고립되지 않도록 공유 공간이나 운영 원리 등의 장치들이 꼭 필요하다.

지금도 주민들을 겁박하는 방식의 사전퇴거는 계속되고 있다. 주민들이 퇴거하면 건물은 곧 매각된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제 강제 퇴거에 맞서 기자회견, 집회, 의견서와 청원서 제출, 토론회 등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7일 열린 북콘서트에서 이 책에 참여한 최현숙 작가는 “살아있는 한 이분들 안에는 가난을 견뎌낼 힘이 있다. 그 힘은 이 가난을 구체적으로 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갖지 못한 힘”이며 “고통의 쓸모, 빈곤의 쓸모를 깨닫는 것이 이런 작업들의 의미”라고 강조했다. 

이어 조문영 교수(연세대)는 “이 책은 주류 미디어가 해왔던 빈자들의 품행론에 맞서고 있다”면서 “이들이 교육 등 어떤 기회나 자원이 있었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운데도 소년행이나 감옥행이 너무 쉽게 이루어지고 주변에서 말 한마디 해 주거나 가장 힘들었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 다른 선택지를 알 수 없고 그쪽으로 이동할 수 없는 삶이 상당히 아팠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익숙한’ 양동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잠시 떠났다가도 또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삶들, 익숙해지기까지 이들은 얼마나 절박한 시간들을 보냈는가.

조 교수는 “‘쪽방’, ‘도시락’, ‘사랑의집’, ‘교회’, ‘급식소’, ‘해피인’, ‘박스’, ‘신문지’, ‘고물상’, ‘서울역’, ‘남산’, 이 하나하나의 단어들은 이들이 자기 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과정 자체가 이 동네를 만들었던 것이며, 익숙함이란 것은 기회와 자원을 가까스로 힘겹게 연결해 얻어낸 것이기에 이 말은 매우 주효하다”면서 “개인의 삶에서 사회의 문제를 바라봐야 하고, 제도, 정책, 세상의 시선이 서로 연결돼 이들의 현재 몸이 형성됐을까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