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월호가족 오준영 학생 어머니 임영애 씨

2017년 “세월호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 마련을 위한 사회적참사특별법”에 근거해 설치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기간이 올해 말로 완료된다.

1기 특조위 활동을 어렵게 이어받아 출발했지만 사회적참사특조위는 수사권과 기소권 없이 조사권만 가진 탓에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 반드시 필요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군, 국정원 등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세월호참사와 관련한 직권남용, 업무상과실치사상죄 등의 공소시효 7년도 정지되지 않고 진행돼 7주기인 내년 4월이면 만료된다. 이대로라면 6개월 뒤에는 단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관련 범죄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 가족들과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위해 활동해 온 관련 단체들은 “특조위 활동기간 연장, 특조위 조사인력 확대, 수사권 부여, 세월호참사 관련 범죄 공소시효 정지, 특조위 활동기록 이관 근거 규정 마련” 등을 위한 사회적참사특별법 개정, 대통령기록물 공개 결의를 위한 국민청원운동에 나섰다.

청원자 10만을 넘으면 국민의 이름으로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다. 청원기간 6일을 남긴 10월 30일 현재 2만 1000명이 더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세월호참사가 해결됐거나 곧 해결될 것이라고 여기는 시민이 많아졌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4.16 진실버스’가 출발한 이유다.

지난 10월 6일부터 26일까지 전국 27개 도시로 출발한 버스에는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오준영 학생(스테파노)의 어머니 임영애 씨(아가타)도 타고 있었다. 많은 이가 "세월호는 이제 끝난 것"이라고 알고 있는 상황에서 세월호 가족들이 또다시 나선 심정을 임영애 씨에게 들었다.

단원고 명예 3학년 5반 오준영 군은 유아세례를 받고 수학여행 전 견진성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손을 데인 엄마를 위해 직접 냄비 장갑을 만들어 줄 정도로 살가운 아들,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볶음밥을 만들어 주던 다정한 오빠 준영이는 차가운 바닷속에서 자신의 생일인 4월 23일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 아들을 잃은 임영애 씨는 6년 전 4월 16일 이후 지금까지 “그리움보다 죄책감이 큰 시간”을 살고 있다. 2년 전 안산에서 충남 홍성으로 이사한 이유도 목포, 서울, 안산으로 이동하기 쉽고, 어느 간담회에서 자식을 잃은 자신을 ‘엄마’라고 불러줬던 학생들 곁에 살고 싶어서였다.

그리움보다도 깊은 죄책감은 임영애 씨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이뤄야 하고, 그 결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거름이라도 되어야 “내가 죽게 만든 것 같은” 죄스러움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영애 씨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보다, 더 큰 죄책감이 자신을 일으킨 힘이었고 함께한 국민들이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 임영애)

“너무 염치가 없어요. 이번 청원을 국민들에게 또 부탁하면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우리가 참 많은 것을 요구했더라고요. 염치가 없지만.... 그래도 이번 한 번만 더 마음을 모아 주시길 국민들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네요.”

그는 ‘진실버스’로 대구, 수원, 밀양 지역 시민들을 만났다. 지지하고 응원하는 시민들도 많았지만, “세월호 해결된 거 아니었어요?”라는 물음, “놀러 가다 죽은 아이들....”이라는 막말을 여전히 들어야 했다.

임영애 씨는 “지난 6년을 버틴 것은 시민들의 힘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싸워서 이길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힘이 빠진 적은 없었다”며, “하지만 이번에는 청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커졌다. 피해자 가족이 되면서 정말 다른 이들은 이런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7년이 지나도, 10년이 더 걸리더라도 철저히 진상규명이 되기만을 바랍니다. 자식을 잃은 엄마니까, 미래의 아이들을 지키고 싶고 그 일을 위한 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거죠. 대통령도 여러 번 약속한 일이고, 이번만은 꼭 법이 개정되어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해요.”

임영애 씨는 시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청원 내용을 계속 외우고 정리한 메모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호소하고 어디든 공유했다. 그는 “이 일이 이뤄지든 안 되든 엄마로서 무엇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벅차다”며, “이것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그리고 반드시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해 왔다”고 말했다.

“건강이 나빠도, 좋아도 준영이에게 미안해요. 그래도 뭐든 해야 하니까, 진상규명이 온전히 이뤄지는 걸 봐야 하니까 버티는데, 그 버티는 이유조차 죄책감이 됩니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고요. 할 일이 더 많아질 테니까요. 그런데 피해자로서 진상규명을 당연히 요구하는데 왜 주눅이 들까요? 주눅이 들 때마다 아이들 생각이 더 많이 나요.”

그는 여전히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고통스럽다고 했다. 외부의 시선도 그렇게 느껴지고, 스스로도 강요한다. 기꺼이 호소하고, 부탁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엄마니까 당당하게 서야 한다고,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고 마음먹지만, “그 뒷면으로 주눅 들고 울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이 힘든 것은 사실”이라며, “가족들이 일상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에게 이제 돌아갈 일상은 없다. 가족들이 어떤 마음으로 싸우고 있는지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임영애 씨는 아이를 기다리던 팽목항에서 들었던 말들을 여전히 악몽으로 꾼다.

“(신자인) 당신이 냉담을 했기 때문”이라며 “아이가 힘들어 하니 울면 안 된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던 사람들의 말, 그리고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이 지금도 꿈으로 찾아온다. 그는 “그 순간이 나에겐 두 번째 참사였고, 두 번째 죽음이었다”고 했다. 이미 아이를 잃은 것은 내 탓이라고 여기던 자신에게 던진 말은 “아이를 죽였으니 너도 죽으라”는 선고였다.

정말 죽을 마음을 먹었던 그는 진상규명에 대한 책임과 희망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매일 아침 피켓을 들고 거리에 선다. 임영애 씨는 자꾸 “염치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래도 한 번만 더”라며, 마지막일지 모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 달라고 다시 한번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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