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한국 남성의 중년기 과제

이 글은 <가톨릭평론> 34호(2021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중년기 이상 한국 남자의 심리적 성장은 문화의 경직성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먼저 권위주의 문화에서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반면에 그들은 자신의 역할과 사회적 신분(Social Status)을 결정해 주는 사회적 지위(Social Position)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자기를 형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사회적 지위에 주어지는 역할과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 경직된 문화는 사람들이 ‘자기주도적 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회화된 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집단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글에서는 한국 남자들이 ‘자기주도적 의식’을 갖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개성화 과정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한국 남자들은 변화된 사회 경제적 환경에서 방황하며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속하나?” 같은 중년기의 인생발달에 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개성화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와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중년기의 과제

남자들이 인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것은 어떤 물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젊음/늙음, 남성다움/여성다움, 파괴/창조, 그리고 애착/분리1) 같은 인생의 양극성에서 잘못된 선택과 관계된 문제다. 많은 경우 남자들은 늙음보다 젊음을, 여성적인 것보다 남성적인 것을 선호하며, 파괴와 분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결과적으로 일방적이고 균형 잃은 삶을 초래한다. 레빈슨은 중년기에 들어선 남성들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인생의 양극성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중년기는 인생의 주기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창조적인 계절일 수 있다. 이들은 야망, 본능적인 충동, 젊은 날의 환상 등의 횡포로 인해 시달림을 덜 받게 된다. 이들은 타인들에게 더욱더 깊게 애착을 형성할 수 있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자신의 내면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있다.”2) 그러므로 사람들은 중년의 양극성 통합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더 자유롭고 진정한 삶을 살도록 초대된다.

 

젊음/늙음 양극성

레빈슨은 ‘젊음/늙음’이라는 양극성의 균형이 모든 발달적 변화에서 안정을 위한 주요 과제라고 강조한다.3) 청년기에 사람들은 외부 직업의 일과 관계에 몰두하며 인생의 성공을 위해 사회 문화적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젊음의 주요 요소인 신체적 건강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삶과 활력을 젊음으로, 그리고 죽음과 쇠락을 늙음으로 연결하며 늙음보다 젊음을 선호한다. 문제는 누구도 늙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고,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상실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중년기에 접어들어 사람들은 자녀들이 결혼해서 독립해 떠나는 것과 신체적 허약함을 경험하고 주변의 지인과 친지들의 병고와 죽음을 접하게 된다. 이런 중년의 상실감은 종종 사람들이 “흔히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인식과 더불어 점차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한다.”4) 이로써 사람들은 나이 듦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중년의 도전은 늙음과 젊음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한다.

젊음/늙음은 단순히 나이의 적고 많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물학, 심리학 그리고 관계의 능력에서 매 순간 상대적으로 젊기도 하고 늙기도 한다. 그러므로 젊음은 가능성, 에너지, 잠재력을 의미하며 늙음은 완성, 안정성, 지혜를 의미한다.5) 우리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요소는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다. “남성은 이전의 젊은 성질 중 어떤 것은 포기해야 하는 반면에-약간 후회하면서, 어느 만큼은 안도나 만족감을 느끼고-새로운 삶 속에 통합할 수 있는 다른 성질은 보유하거나 변형시켜야 한다.”6)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삶의 자세에 쉽게 도달하지 못한다. 소수의 사람만이 과거 자신의 기술과 경력이 반드시 성공적인 미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부분 사람이 퇴직하거나 직장을 잃으면 상실감에 직면한다. 실제로 한국의 많은 노동자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실직에 노출되었다. 많은 사람이 40대의 이른 나이에 정리해고로 조기퇴직을 강요당했다. 자신감을 잃은 실직 노동자들은 스스로 성적 발기 부전에 비유해 ‘고개 숙인 남자’라 부르곤 했다. 이들에게 나이가 드는 것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최악의 경우 이런 자기비하는 개인적 관계와 가족관계의 와해나 자살을 초래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가치나 희망을 보질 못했다. 그러나 늙어간다는 것이 반드시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리고 실패의 순간도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이 순간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감 그리고 관계를 다룰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이는 젊음과 늙음이라는 양극성의 균형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들은 다른 직업을 선택하거나 완전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특히 요즘 같은 상황에서 실직자들은 일자리를 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이들은 다른 측면의 삶, 예를 들어 가족들에 투자하는 삶도 바람직하다. 경제적으로 압박이 없다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가를 즐겨 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젊음의 활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삶의 풍요를 위해서 나이 듦의 지혜도 필요하다.

이 두 극은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개인의 삶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균형을 잡은 사람들은 청년들이 자신들의 도전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인생 프로젝트를 다루도록 그들에게 지혜와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어울릴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젊음과 늙음이라는 양극성의 균형은 한국 중년기 남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생발달 과제다.

(이미지 출처 = ㅖㅑㅌ뮤묘)
(이미지 출처 = Pixabay)

남성성/여성성 양극성

현재 성소수자(게이/레즈비언/양성애자/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움직임이 있지만, 많은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성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받았다. “남자는 남성적이고 여자는 여성적이며 아무도 양쪽이 다 될 수는 없다.”7) 이러한 문화환경에서 남성성은 “신체적으로 강하고, 도구를 잘 다루며, 목표 및 성취 지향적이고, 감정과 대인관계 기술이 부족하며, 여자에 대해 지배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갖는”8)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여성성을 육체적으로 힘이 부족하고, 관계적이고, 배려와 정서적 요소로 여겼다. 더욱이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남자를 정신에 여자를 육체에 동일시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성적 이원론은 “여자에 대한 남자의 구조적 종속”9)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성적 이원론과 고정된 성 역할은 남자들이 자신과 사회에서 여성성을 억압하거나 거부하게 했다.

위계적인 문화에서 성장한 한국 사람 중 많은 남자가 관계적이지 못하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남자들은 강력한 힘 또는 권력을 남성성과 그리고 약함을 여성성과 연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약함이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경직되거나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아마도 남성성을 강함만으로 이해하며 여성성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을 느끼는 극단적 형태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일 것이다.10) 권위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다. 우리는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히 약해져야 한다.11)

둘째로 남성성을 독립적인 것의 하나로 이해하는 남자들은 친밀함과 애착을 느끼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친밀함과 애착 같은 감정은 남자들에게 강하고 자기 지배적이고 영웅적인 내면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2)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실패와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수치심은 그들을 자신들이 속한 집단에서 격리시킨다.13) 이것이 남자들을 관계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셋째로 남자들은 사고를 남성적인 것으로 감정을 여성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일을 “매우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며 성장했다. 이들에게 “의존성, 친밀감, 비애, 관능성, 취약성을 함축하는 감정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감정들은 어린애다움과 여성성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14) 그러나 감정이 공유되지 않는 한 친밀한 관계는 있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 문화에서 남자들은 관계적 역할보다는 기능적인 역할에 충실하다. 남자들의 젠더 사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군대 경험이다. 군대에서 남성우월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강조되는 것이 “‘국가-군대-남성’이라는 연결망 속에 던져진 ‘사나이’의 자긍심 고취다. 국가수호라는 숭고한 임무는 남성에게만 주어진 영광이며, 이를 위한 고된 훈련과 작업은 남성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이기 때문에 남성은 군대 경험을 할 수 없는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인식시킨다.”15) 그뿐만 아니라 남자들은 군대를 통해서 서열에 따라 권력이 정해지고 심지어 서열이 사람조차 규정하는 위계적인 군대문화를 습득한다. 권력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남자를 폭력적이며 권위적인 정체성의 한 형태인 권력지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낸다.16)

따라서 이런 군대문화의 영향을 받은 한국 남자들은 자신의 정신세계 안에서 여성적인 극성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문화적으로 박탈당했다. 군대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기업문화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업을 수행하는 강한 남성성을 선호한다. 그러나 “남성다움이 강하게 요구되는 사회에서는 권리보다는 의무가 강조되어서 결국은 자신의 욕구나 희망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17)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의 욕구와 희망을 억누르고 사회적 기대를 의무로 따르는 것을 배운다. 이로써 이들은 자신의 내면세계로부터 고립된다. 이러한 이유로 남자들이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인간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충만함이 있는 양성적이며, 각 성별의 가장 좋은 특성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18) 여성성은 남자의 성격에 불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남자들은 반드시 성격의 여성적인 면을 받아들여야 한다. 레빈슨은 남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여성성에 대해서 논한다. “여성적이 되는 것은 신체적으로 힘과 정력이 부족한 것이며, 사고보다는 감정과 더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 남자가(남성이) 부드럽고, 의존적이며, 최상을 위해 투쟁한다기보다는 차선책을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여성성이다. ‘감정’의 깊은 심연을 경험하는 것, 민감하고, 복종적이며, 심미적인 것은 그의 여성적인 성향이다.”19)

이를 위해서 남자들은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더욱 넓고 자유로운 역할을 하도록, 즉 여성들의 감수성을 발달시키고 그들의 관계 맺는 능력을 더욱 활용하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다.”20) 그러므로 남자들이 여성적인 면을 스스로 포용할 때 더욱더 관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한국 남자들에게 매우 도전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파괴/창조 양극성

파괴/창조 양극성을 다룰 때 갖게 되는 근본적 질문은 “내가 준 상처와 남이 나에게 준 상처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다루는가”21)다. 나는 이 질문이 우리가 관계를 맺고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위대한 선을 행할 힘을 갖기 위해, 우리는 약간의 악을 저지르리라는 것을―그리고 결국 선보다는 악을 더 많이 행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22) 즉 우리는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권력의 문제는 우리가 가진 파괴적인 힘을 의식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할 때다. 또 이 질문은 우리가 딱딱하고 까다로운 사람과 쉽고 부드러운 사람 사이에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고 싶은지와 관련이 있다. 딱딱하고 어려운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경직되고 융통성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위계적인 한국 문화 안에서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나누기보다는 타인을 통제하기 위해서 권력 행사를 한다.

그들은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고 일방적이다. 그러나 쉽고 부드러운 사람은 관계적이고, 그들이 맺는 인간관계는 생산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사고에 열린 사람이며, 타인에게 귀 기울이고 배우는 사람이고, 사상이나 의견이 융통성 없거나 굳어버린 과거 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23) 또 이들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고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도록 부추기는 자질”24)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생산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국 남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애착/분리 양극성

애착/분리 양극성과 관련한 기본적인 질문들은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인생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미래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25)와 같다. 이런 질문들은 사회적 기대와 문화에 지나치게 동일시함으로써 생기는 ‘거짓 자기’가 아니라 ‘진실한 자기’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내적 갈망과 진정한 자기의 욕구를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외부세계와 분리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더욱더 진정한 자기가 될수록 우리는 사회적 기대에 덜 집착하게 되고 더 자유로워진다.

한국 문화에서 중년기의 남자들은 가정을 위한 생계 부양자라는 사회적 정체성에 강한 애착이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게 매우 무거운 짐이다. 그들이 생계 부양자라는 정체성에 더 많이 집착할수록 그들은 직장에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자신의 내적 갈망에 대해서 덜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사회적 기대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중년기의 중요한 발달과제는 자기의 욕구와 사회의 요구 사이의 균형을 더욱 이루어 가는 것이다.”26)

이런 개성화 과정은 한국의 중년기 남자들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사회적 지위와 역할 그리고 진정한 자신에 대한 감각 사이에서 혼돈을 겪어 진정한 자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하여

한국 문화의 경직성은 한국 남자들에게 인생의 양극성 사이에서 한쪽을 선호하고 다른 한쪽은 배제하도록 가르쳤다. 이런 사회 문화적 환경은 남자들에게 진정한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삶 안에서 많은 갈등에 직면하게 한다. 남자들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이 인생의 양극성 사이의 균형은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젊음을 되찾지 못하지만 나이의 지혜를 수용할 수 있고, 여성성을 수용함으로써 타인에 공감하고 더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또 자신 안의 까다롭고 파괴적인 힘을 의식하고 좀 더 쉽고 관대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남자들은 생계부양자로서의 사회적 정체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사회적 기대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내적 욕망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1) 대니얼 레빈슨, 김애순 옮김,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330쪽.
2) 위의 책, 383-384쪽.
3) 위의 책, 330쪽.
4) 메리 다피츠, 남학우. 김효성 옮김, "정오에서 해질녘까지", 성바오로출판사, 2003, 79쪽.
5) 대니얼 레빈슨, 앞의 책, 331쪽.
6) 위의 책, 332쪽.
7) 위의 책, 361쪽.
8) Nelson, J., The Intimate Connection: Male Sexuality, Masculine Spirituality, Louisville, KY: The Westminster Press. 1988, p.19.
9) 위의 책, 22쪽.
10) 대니얼 레빈슨, 앞의 책, 366쪽.
11) Nelson, J., 앞의 책, p.71.
12) Osherson, S., Wrestling with Love, New York: Fawcett Columbine, 1992, p.46.
13) 위의 책, 35쪽.
14) 대니얼 레빈슨, 앞의 책, 367쪽.
15) 조성숙, '군대문화와 남성', "남성과 한국 사회", 여성한국사회연구회 편, 한국사회문화연구소 출판부, 1997, 160쪽.
16) 위의 책, 166-167쪽.
17) 손승영, '기업과 남성', 여성한국사회연구회, "남성과 한국사회", 사회문화연구소, 1997, 211쪽.
18) Carroll, P. & Dyckman, K. M., Chaos or Creation: Spirituality in Mid-Life, New York/Mahwah, NJ: Paulist Press, 1986, p.65.
19) 대니얼 레빈슨, 앞의 책, 368쪽.
20) 메리 다피츠, 앞의 책, 82쪽.
21) Carroll, P. & Dyckman, K. M., p.64.
22) 대니얼 레빈슨, 앞의 책, 353쪽.
23) 메리 다피츠, 앞의 책, 93쪽.
24) 위의 책, 86쪽
25) 대니얼 레빈슨, 앞의 책, 380쪽.
26) 위의 책, 382쪽.

김정대

예수회 사제. 1990년 예수회에 입회했고, 2000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주로 노동 문제와 사회정의 문제를 다루는 활동을 했고, 2004-11년 노동자를 위한 술집, ‘삶이 보이는 창’을 운영했으며, 요즘은 남성들에게 감성을 일깨워 주기 위한 활동을 고민 중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