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미국 사목 서한 '평화의 도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

여성 청년 6명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미국 주교회의 사목 서한을 번역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의정부교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번역팀 이름으로 모인 청년들이 번역한 이 서한은 1983년 미국 주교회의가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성찰하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새롭게 고찰해 낸 '평화의 도전 – 하느님의 약속과 우리의 응답'(The Challenge of Peace)이다.

'평화의 도전'은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냉전이 고조되고, 핵무기 등 무기 경쟁이 가속화되던 1980년 당시 미국 주교들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새롭게 검토하기로 결정하고,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존 로치 대주교가 임시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시작됐다.

위원회는 2년 반 동안 관련된 군사전문가, 신학자, 국제관계학자, 평화운동단체 등 수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초안을 작성한 뒤, 주교회의 총회 논의를 거쳐 1983년 주교 247명 가운데 238명의 찬성으로 최종 승인됐다.

사목 서한 '평화의 도전'은 전쟁과 군비 경쟁, 핵무기 사용, 평화 증진 등에 대한 가톨릭교회 가르침의 원칙과 규범, 전제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종교적 관점과 원칙을 통한 “현대 사회의 평화에 대한 고찰”(1장), “현대 세계에서의 전쟁과 평화”(2장), “평화의 증진”(3장), “사목적 도전과 응답”(4장)과 결론으로 구성됐다.

'평화의 도전' 원본. ⓒ정현진 기자

“전쟁 무기의 균형으로 평화가 이룩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신뢰에 의해서 참된 평화가 확립된다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교황 요한 23세, ‘지상의 평화’)

‘평화의 도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에 근거하며, 전쟁과 평화에 대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한다. 또 자칫 냉전의 시대에 ‘정당한 전쟁’, ‘제한전’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서한은 윤리적 기준을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역설한다.

서한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모든 경우에 전쟁 반대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이어, “부당한 공격에 대항해 방어할 권리와 의무”를 말하면서도, “형태와 관계없이 모든 침략 전쟁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를 사용해 도시 전체나 광범위한 지역,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행위, 민간인이나 비전투원을 의도적으로 살상하는 행위, 과잉 방어 특히 핵무기를 사용하는 방어전략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또 군비 경쟁에 대해 “인류가 마주한 가장 끔찍한 저주 가운데 하나”라며, “군비 경쟁은 위험이자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공격 행위이며, 어리석은 행동으로 단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핵무기 사용, 핵전쟁 도발, 제한 핵전쟁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가장 우선적인 임무는 어떤 핵무기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다.

서한은 ‘정당한 전쟁’, ‘제한전’ 교리를 뒷받침하는 윤리 이론은 “이웃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명제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우리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가늠하는 핵심 기준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런 전제를 가진 우리가 어떻게 남의 목숨을 빼앗는 무력 사용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어 “과연 언제 최후의 수단인 무력 사용이 이를 강력하게 거부하는 기본 전제에도 허용될 수 있는가”는 전쟁 개시 조건 기준에 따라 판별되며, 정당한 무력 사용의 경우에도 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전쟁 수행 조건에 따른다고 이른다.

이에 따른 전쟁 개시 조건은 “실제하고 확실한 위험에 대항한다는 정당한 명분, 공동선과 연결된 합당한 권위, 어떤 국가도 절대적으로 정의로울 수 없다는 상대적 정의, 정당한 명분과 관련된 바른 의도, 평화적 대안을 모두 사용한 이후 최후의 수단, 무모한 저항으로 피해를 입지 않을 성공 가능성, 전쟁에 따른 피해에 비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선에 대한 비례성” 등이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장 강주석 신부는 서한이 제시한 이 원칙은 전쟁 결정의 충분 조건으로 “이 원칙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인간은 전쟁을 할 수 없으며, 이 원칙에 맞춰진 수행 조건 역시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또 “‘정당한 전쟁론’은 악용하면 정당성을 부여하는 조건이 되지만, 사실상 이 조건에 맞는 전쟁은 있을 수도 있었던 적도 없다.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도 이 조건을 어긴 전쟁”이라며, “비폭력 평화주의가 이상이지만 결국 전쟁의 윤리적 조건을 내건 정당한 전쟁론은 결과적으로 비폭력 평화주의와 다르지 않다. 역설적으로 비폭력적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며, 결코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강주석 신부(왼쪽)와 번역 및 감수팀. ⓒ정현진 기자

한편 번역팀에 참여한 이들은 김예슬(아기아가타), 고민정(마리아), 박민아(루치아), 양서희(카타리나), 장은희(아녜스), 정승아(테레지아) 등 6명이다. 이들은 각각 북한학과 신학, 미디어공학, 종교학 등을 공부하고 서울대교구 청년부와 주교회의,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등에서 일하거나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각 장을 맡아 번역하고, 논의와 검토 과정을 함께 거치면서 번역 과정 자체도 평화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끝없는 도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김예슬 씨는 “1983년에 발간된 서간인데도 현재에 유효한 내용이 많았다는 것은 그 당시 주교단의 현대 사회에 대한 감각도 있었겠지만, 여전히 전쟁과 평화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평화에 대한 고찰 부분을 맡은 박민아 씨는 “번역을 하면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평화, 예수의 평화가 무엇인지 충분히 생각하며 살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며, “이번 번역은 비단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정승아 씨는 평화를 위한 윤리적 선택에 대한 부분을 번역하면서, 이 선택에 대한 질문과 성찰은 끊임없이 주어지는 질문이며, 만약 번역을 하지 않았다면 그저 국제정치나 윤리신학의 주요 이슈쯤으로 여겼을 것이라면서, “조금 더 이런 논의가 교회 안과 밖에서 공유되기를 바란다. 안보의 문제는 어쩔 수 없다는 의견도 아주 무책임한 것은 아니지만, 평화를 부끄럽지 않게 입에 담고 싶다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국가 차원, 세계 차원의 평화를 고민하는 것이, 각자의 삶이 너무 버거운 주변 사람들에게 실질적이고 절박한 고민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면서, “이 서한이 각 분야에 있는 이들 모두를 고려한 것처럼, 동시대를 사는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는 깊은 호소로 다가기를, 그리고 우리가 이 번역을 한 이유도 전달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민정 씨는 이 서한이 전쟁과 평화, 핵무기 사용에 대한 획일된 결론을 도출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그것을 모두 담아냈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그는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고 토론한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고, 지난 8개월 우리의 번역과 검토 과정 역시 이 서한이 이뤄진 과정과 닮아 있었다. 그 체험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장은희 씨는 “전쟁의 문제는 국가 간 차원이지만 비폭력적 평화는 결국 개인들의 선택이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무기를 통한 평화가 아닌 다른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서희 씨는 이 서한에서 통해 주교들은 교육자, 부모, 젊은이들, 군복무 중인 신자들, 방위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남녀, 과학자, 언론, 공무원 등을 구체적으로 호명하면서 평화를 위한 선택을 촉구한 내용을 들며, “어떻게 평화를 구체적으로 살 것인가는 정책뿐 아니라 일상에서 개인이 매일의 도전 속에서 이뤄야 하는 것이다. 이에는 영적 감수성이 상당히 중요하며, 최근 코로나19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번역의 감수는 박은미(팍스크리스티 코리아 상임대표 및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 씨가 맡았다.

박은미 씨는 '평화의 도전'은 교회의 평화에 대한 가르침이 압축된 문건이라고 설명하며, “그러나 한국 교회는 사목헌장조차 공부하지 않고, 정당한 전쟁론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와 개념조차 명료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냉전을 겪던 시기에도 미국 교회는 비폭력 평화주의의 씨앗을 뿌렸듯이, 2020년 분단과 전쟁 가능성을 안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교회가 비폭력 평화주의의 씨앗을 어떻게 뿌릴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주석 신부는 이 서한은 40여 년 전의 미국 교회가 지역의 평화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민한 것이지만, 이 문헌에서 제기된 평화의 문제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나 신학생 군복무 문제, 한미와 한일, 남북 문제 등에 모두 연결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는 이 서한 완역본을 6월 25일 즈음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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