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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기의 한국 교회, 무엇을 얻었고 놓쳤나?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정기 심포지엄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이 ‘분단 시기의 한국천주교회’를 주제로 정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2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는 강주석 신부(의정부교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장), 김선필 박사(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변진흥 박사(코리아연구원장)이 각각 ‘한국전쟁과 순교’, ‘남북분단 고착화 시기의 한국천주교회’, ‘분단 시기의 북한 천주교회’를 주제로 발제를 맡았으며, 김영식 신부(안동교구),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맹제영 신부(의정부교구)가 논평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2017년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시기와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본 연장선상으로 분단 시기의 한국천주교회의 역할과 대사회적 태도, 그 의미를 살피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했다.

먼저 강주석 신부는 ‘한국전쟁과 순교’를 주제로 당시 한국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 가운데 복음을 전파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마음’을 통해 전쟁과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며, 상대를 연민하고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성찰했다.

한국 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한반도 전역에서 북한군에 체포된 성직자, 수도자는 한국인이 52명, 외국인 선교사 98명이다. 이 150명 가운데 전쟁 전과 전쟁 중에 희생된 이들은 한국인 52명 외국인 선교사 47명이며 나머지는 살아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강주석 신부는 이 가운데 외국인 선교사들의 희생 특히 춘천과 광주 지역의 골롬반회원과 메리놀회원의 이야기 그리고 평양 수용소와 북한 지역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기록과 생환한 이들의 경험을 살피고, 전쟁과 폭력을 마주한 선교사들의 ‘마음’을 분석했다.

강 신부는 기록으로 남은 이들의 전쟁 체험은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었다면서, “이들은 적대와 증오의 전쟁 가운데서도 종교적 가르침을 성찰해야 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자비와 연민을 찾았다”고 말했다.

속성 자체가 증오를 키워내는 동력을 가진 전쟁 그 자체, 양측의 끊임없는 희생, 민간인 학살과 이에 대한 처참한 복수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종교인들 역시 피해자였다.

강 신부는 “그러나 폭력과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것 또한 종교인의 본분”이었다면서, “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전쟁이 가져온 증오가 확대되고, 사람들의 마음에 내면화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들이 경험한 전쟁은 그런 소명을 더욱 절실하게 일깨우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1950년 9월 26일 군종 신부로 한국에 돌아온 메리놀회 클리어리 신부는 평양 지역을 돌아보는 여정을 통해 북한군의 만행을 듣고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는 전쟁은 단시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며, ‘공산주의자의 만행’이 얼마나 다층적인 요인들로 이뤄지는지 깨닫는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죽임당한 시체로 뒤덮인 목동 성당과 수도원 뒤편 언덕. (사진 출처 = 국방TV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강주석 신부는 클리어리 신부가 목격한 전쟁은 한 신자 부부가 공산주의자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고초를 겪는 것, 즉 공산주의자의 싹을 제거하는 행위가 ‘더 선한’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가져오는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강 신부는 분단과 함께 냉전의 전장이 된 한반도에서 가톨릭교회는 그 대립의 선봉에 나섰으며 한국전쟁으로 이는 더 강화되었고, 교회 지도부는 한국전쟁을 ‘성전’으로 규정했다며, “이러한 성전의 논리에 종교인들의 순교 담론이 연결되고, 고난과 죽음을 맞은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성전의 논리를 전파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종교인들에게 가중된 전쟁의 폭력은 자비라는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적에 대한 증오와 복수의 논리가 강화됐지만, 선교사들의 전쟁 경험은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닌 다양한 상황이었다”며, “선교사들은 공산주의 세력의 직접적 피해자이면서도, 불행한 전쟁을 겪는 불쌍한 이들을 연민하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는 적과 우리 편을 가르고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전쟁에서조차, 십자가 위에서도 박해자를 연민했던 예수의 마음을 닮아야 하는 신앙인의 순교는 결코 인간에 대한 증오와 복수로 이어질 수 없다면서, “너무 오래 서로를 미워하고 두려워했던 죄악을 끝내야 하는 소중한 기회를 맞는 지금, 단죄의 대립을 통한 평화가 아닌, 용서와 이해를 통한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논평을 맡은 김영식 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조선카톨릭교협회와 동반해 온 남북 교류와 지원을 위한 활동들을 소개하고, 이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아픔을 겪었던 이들과 국가폭력의 피해자, 교회 공동체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김 신부는 결국 자비와 연민을 이루는 길은 한반도 평화이고, 사제단이 북한 교회와 가진 것을 나누는 일도 결국은 한국전쟁은 물론 백오십 년 전부터 겪었던 야만성을 치유하고 평화로 가는 과정이라며, “오늘 무력한 이들이 사법권력과 언론권력, 자본권력의 포장된 폭력 앞에 죽어 가는 데도 무관심하거나 해결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돌아보는 한국전쟁과 순교는 아무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20일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정기 심포지엄이 '분단시기의 한국천주교회'를 주제로 열렸다. ⓒ정현진 기자

이어 김선필 박사는 남북분단 고착화 시기의 한국천주교회 모습을 살피고,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대사회적 관계, 복음화 사명과 관련해 제시했다.

김 박사는 먼저 분단이 고착화되던 시기, 한국천주교회는 미군정 우익 세력, 이승만 정권과 협력했으며 이는 무엇보다 한국교회와 우익세력이 ‘반공주의’를 공유했기 때문이라며, 반공 투쟁의 선도에 있던 교황청의 한국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공산주의 세력과 현실적 충돌을 겪는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신앙의 차원으로 격상될 수 있었고 이는 현실정치 적극 참여의 필요도 불렀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정권과의 밀회를 이어가던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와 부도덕성을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되면서 지지를 철회하고 탄압받던 장면의 편에 선다. 그러나 장면 정권이 1961년 5월 군부 쿠데타로 몰락하자 당시 주한 교황사절이었던 주피 주교는 반공체제의 강화를 들며 주한 외교사절 가운데 가장 먼저 쿠데타를 승인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를 지지한다.

김선필 박사는 이런 태도에 대해 “한국교회는 오랜 시간 국가로부터 박해받았던 경험이 있었고 국가에 의해 탄압을 받기보다는 순응하며 박해를 모면하는 일제시기 경험에 익숙했다. 또한 한국 교회는 군부세력과 반공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설명하며, “당시 한국교회는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장면과 그 정권의 몰락보다 교회의 안위와 반공주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과거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의중을 온전히 존중하되, 현재의 시각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단죄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통해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재점검하기 위함”이라며, 교회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교회의 복음화 사명 두 차원에서 방향을 짚었다.

그는 먼저 교회와 사회의 관계와 관련, 과거 교회가 우익세력과 밀월 관계를 맺은 것은 공산주의와 한국의 정권이 교회를 공격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며, 하지만 그런 태도는 의도와 상환없이 한국사회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미쳤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정권과의 대립으로 4.19혁명의 밑거름을 제공하는 긍정적 영향이 있었던 반면,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적 태도는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고 분단을 고착시키며 민주주의 성장을 늦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대해 김 박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천주교회는 세상을 적으로 삼았고 교회의 적극적 정치 참여는 내적으로 정당했지만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정치권력 획득에 따른 복음화는 더 이상 정당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논평을 맡은 조한성 선임연구원은 이승만 정권과 대립했던 시기의 한국교회 모습이 이례적이라면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탄압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교단 내부 진영을 설득하기 위한 나름의 내적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이어진 저항이 상당히 오래 이어진 만큼 내부의 고민은 대단했을 것이고 그 논리는 무엇이었는지 추적하는 것 또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국 전쟁 전후 북한에서 공산주의 체제하에 목숨을 잃은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 그림. (이미지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분단시기 북한 천주교회의 존재 양식과 이에 대한 이해와 접근에 대해서는 변진흥 박사가 발제했다.

변진흥 박사는 먼저 남한 교회가 북한의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를 맡으면서, “북한교회는 사실상 망명교회가 되었다”는 평가로부터 출발했다.

그는 한국 교계제도 설정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분단 고착으로 보편교회의 북한 지역에 대한 교도권 행사가 불가능하게 된 것을 현실적으로 진단하고 평가한 것이며, 실제로 남한교회는 보편교회의 이러한 조치를 이의 없이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천주교회 교계 제도가 설정되던 1962년의 한국교회는 분단을 영구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북한 공산체제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계제도 설정 당시 북한 교회에 대한 남한 교회의 인식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 변진흥 박사는 우선 남한 교회는 1962년 한국천주교회 교계제도 설정 당시 교황청이 분단을 임시적인 것으로 보고 통일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북한 교회의 법적 지위를 분단 이전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해석을 했다고 말했다.

이는 1962년 7월 1일자 <가톨릭시보>를 통해 서정길 대주교가 “법적 남한 정부하의 전 한국을 대상으로 교계를 설정한 것은 북한이 비합법적 정부임을 똑똑히 말해 준 것이고 남한 정부를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변 박사는 “이는 한국교회 차원의 아전인수식 해석이며, 한국천주교 교계제도 설정은 이미 동아시아 선교정책 전환을 아심 차게 추진해 온 교황청의 예정된 단계적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교황청의 동아시아 선교정책 전환은 1919년 11월 30일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서한 “위대한 임무”를 공표하면서 일으킨 20세기 가톨릭교회 선교의 일대 전환에서 비롯된다. 이 전환은 동아시아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중국이었다.

변진흥 박사는 “위대한 임무”로 대변되는 20세기 초반 교황청 선교정책 전환은 동아시아 선교의 정상화에서 출발했지만 정작 동아시아의 상황은 그 기본 취지를 살릴 수 없는 난관이 조성되던 때였다면서, 위대한 임무를 통해 제시된 선교지침의 핵심은 “현지인 사제양성을 통한 지역교회 설립, 유럽 열강의 식민 정치와 결별한 가톨릭 선교의 자유, 지역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적응”이라고 설명했다. 즉 서구 식민시대의 종식이라는 시대적 전환에 따라 새로운 정책을 선포하고 동아시아 선교의 정상화를 구체화했다는 것이다.

변 박사는 “그러나 특히 중국에서 선교의 자유와 지역교회 정상화라는 두 목적은 달성했지만 중국 공산화라는 복병으로 지역문화에 대한 선교적 적응에는 실패했으며 이와 함께 앞서 이룬 두 가지 조건도 위기를 맞았다”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이해와 적응 없이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중국의 현실은 분단된 한국교회의 현실에도 그대로 전달됐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위대한 임무”가 제시한 선교지침은 오히려 대화가 아니면 단절 또는 적대적 대립이라는 딜레마를 맞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은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들이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어머니와 교사', '지상의 평화'를 통해 무신론자들에 대한 진술을 가능하게 했으며, 가톨릭 신자와 비가톨릭인들과의 협력을 언급했다.

변진흥 박사는 1980년대 북한선교에 투신했던 고 마태오 신부의 접근법을 통해 북한 선교의 한 방향을 제시했다.

개성 출신의 도미니코회원 고 마태오 신부는 북한선교와 민족선교를 일치시켰으며, 민족선교의 핵심에서 북한 ‘인민화’를 강조했다. 그는 북한인민화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맥락에서 바라보고, 북한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북한 인민들의 생활 수준과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며, “인간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화가 선교의 진정한 방법과 길이 된다면 우리도 북한 사람처럼 되지 않고서는 북한 선교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는 한국교회에서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 남북한 평화공존 시대의 키워드는 관용과 소통이며, 상대의 실존과 존재양식에 대한 인정과 수용을 토대로 평화적 대화와 협력이 가능한 공존의 시대를 여는 것의 첫 걸음이 관용과 소통이라고 강조하고, 분단시기 북한교회의 존재양식을 이해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과연 북한교회가 잃어버린 망명 교회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위대한 임무”의 핵심 내용에 비춰, 북한 사회와 체제에 대한 이해와 인정(적응), 북한(민족) 선교를 위한 환경 조성, 현지인 사제 양성을 통한 지역교회 설립 차원의 교계제도와 상주사제 문제 접근 등을 제시하고, “결국 한국교회가 분단의식을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공존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과 북한 교회 존재 양식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근본적 이해와 접근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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