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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나중에'가 '지금여기'입니다[언제나 시기상조]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수상한 세월입니다. 코로나19(COVID-19)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고,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확진자가 많이 나타나는 한국에서 현재 2000명이 넘은 확진자가 생겼고, 지금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감염 사실이나 경로 등을 숨기다 발각된 사람들도 있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상 ‘국가적 재난 사태’입니다. 한국 천주교 차원에서도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모든 미사를 중단했다니, 더 무겁고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행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불행은 안타깝게도 ‘차등 적용’됩니다. 단편적 예로, 경상북도 청도에 있는 대남병원은 정신병동에서만 감염자 100여 명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천지의 사주를 받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저 환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신병동은 특성상 폐쇄성이 강하고, 그 덕에 감염병이 돌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습니다. 비단 정신병동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을 사실상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른바 ‘시설’ 등에서도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고, 그 때문에 시설이 격리되거나 폐쇄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안의 장애인 당사자들은 물론 자신의 의사나 상태와 관련 없이 격리되어 있습니다.

비단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불행은 계급, 젠더, 성적 지향, 장애 유무 등의 조건에 따라 모두에게 차등 적용됩니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미디어들처럼 특정한 ‘기준’이 가시적으로 작용하진 않지만요. 사실 이러한 ‘차등 적용되는 불행함’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안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고뇌에 가까운 고민 끝에,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1세기 민주정부, 여성들의 삶은?

3월 8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바로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입니다. 80억 인구의 절반을 이루는 여성에게,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시대’라는 21세기에 무슨 특별한 ‘날’까지 필요하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합니다. 단편적으로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8.8퍼센트(2019)에 불과합니다. ‘만성적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여전히 임신과 출산은 경력단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버닝썬’ 사건이나 승리, 정준영을 비롯한 남성 연예인들의 카톡방 사건은 어느 순간부터 흐지부지되었는지 뉴스나 신문 구석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성범죄나 성구매 이력이 있는 연예인들, 성폭력적 콘텐츠들은 미디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리벤지 포르노가 유통되는 이른바 ‘텔레그램 N번 방’ 사건도 수사가 지지부진하고요.

좀 더 놀랄 만한 사실들을 이야기하자면, 여성 국회의원은 전체 300명 중 17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장 중에도 여성은 찾아보기 힘든 수준인데요. 특히 광역자치단체장은 전멸이다시피 합니다. <여성신문>에 따르면, 2018년에는 일간지 여론조사에서 후보 적합도 1위를 기록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홍미영 전 인천 부평구청장이 인천광역시장 후보 당내 경선에서 큰 차이로 탈락하기도 했습니다. “메갈 후보는 안 된다.”, “페미질 하지 말라.”라는 비방을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2018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 당내 광역지자체장 공천을 통과한 사람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여성 후보자 또한 3명밖에 되지 않았고, 여성전략공천 또한 단 한 건도 없 었고 말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여성으로 성별정정수술(‘성전환수술’이라고 흔히 불립니다)을 받은 MTF(Male-to-Female) 트랜스젠더 여성 군인 변희수 하사가 강제 전역 위기에 몰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속 부대에서는 변 하사의 성별정정 과정을 지원했지만, 육군 차원에서 ‘음경과 고환의 적출’을 문제삼아 전역을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트랜스젠더 여성 A 씨가 숙명여대에 합격했지만 지속되는 사이버불링에 입학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건 또한 있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성소수자가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이자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들이었습니다.

1월 22일, 성전환으로 강제 전역이 결정된 변희수 부사관은 계속 군인으로 남고 싶다는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연합뉴스TV 채널 동영상 갈무리)

돌아오지 않는 ‘나중에’

플라톤이 이야기한, ‘폴뤼프라그모쥐네'(polypragmosyne)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발음하기도 힘든 이 단어는 ‘많이’, ‘지나치게’ 하는 것, 아무런 것이나 되는 대로 하는 것을 뜻하는데요. 그가 보기에 ‘민중(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다수성은 공동체로 신체들을 질서정연하게 분배하는 일 일체에 잘못/왜곡을 가하기에’(자크 랑시에르, "불화" 재인용) 그걸 비판하기 위해 만든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2017년에 있었던, ‘나중에’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성소수자 친화적이지 않은 정책에, 곽이경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는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제 평등권을 반반으로 자를 수 있냐는 말입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당시 문재인 후보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지만, 그건 너무나 시혜적인 말장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라”는 묵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언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성소수자 여성의 발언 기회는 문재인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에게 무슨 맥거핀이었던 걸까요? 아마 ‘폴뤼프라그모쥐네’였을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 내각의 30퍼센트에 여성을 임명하는 전례 없던 행보를 보여 주었지만, 그 뒤로 (예컨대 생활동반자법 같은)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정책은 여전히 뚜렷하지 않고 ‘나중에’로 밀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다름이 우리를 뭉치게 한다’

"우리의 다름이 우리를 뭉치게 한다"(Nos differences nous unissent)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에 적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연대를 한마디로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세상에는 수많은 여성과 성소수자가 있고, 연대의 싹이 움트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많은 여성이 있습니다. 시스젠더(cis-gender, 생물학/해부학적 성별과 젠더가 일치하는 경우) 여성, 트랜스젠더/젠더퀴어 여성, 동성애자 여성, 이성애자 여성, 유색인종 여성, 빈곤한 여성, 장애인 여성, 노동하는 여성, 육아하는 여성, 공부하는 여성 등, 여성인 이들은 각자의 정체성과 지향성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그만큼 ‘여성’이라는 확실한 범주는 없습니다. 수많은 정체성과 지향성들 사이에서 여성이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그래서 ‘여성’보다는 ‘여성들’이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곽이경 활동가의 말처럼, 그 누구도 이들의 정체성이나 지향성을 반으로 가를 수 없습니다. 인권은 합의나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요.

세상은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만, 여성의 날은 다시 돌아왔고, 그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하려는 ‘다름의 연대’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진보정당들 위주로 이번 총선에 여성과 성소수자 후보들이 출사표를 던지기 시작했고, 남성 후보들에 비해 턱없이 낮았던 여성 후보들의 비율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비록 여성들과 성소수자들 몇 명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저는 그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시스젠더-이성애자-남성에게 이롭도록 기울어진 운동장이 조금씩 평평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고, 우리는 그 주체이자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성과 소수자들의 인권은 ‘언제나 시기상조’였고, 그때 그 ‘나중에’는 한참 참아 줘서 ‘지금여기’입니다.

2017년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 여성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성평등이라는 새로운 봄을 열어 가겠다고 약속했다. (이미지 출처 = 유튜브 문재인 공식채널 동영상 갈무리)

장성렬(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정치학과 사회학을 배웠고,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있다. 권위와 폭력을 늘 경계하고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대해 글 쓰며, 비슷한 주제로 사진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활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청년담론> 평등문화위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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