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김선필]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하느님 백성이 토의하고, 지도자가 결정한다: 천주교회의 의사결정 방식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국정농단에 따른 촛불시위 등은 한국 시민에게 민주주의를 학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시민의식의 향상으로 이어졌고, 자신의 요구가 정책에 반영되기를 바라는 시민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러한 시민의 목소리가 모이는 공간을 공론장(public sphere)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공론장이 점차 확대되고 그곳에서 도출된 합의가 정책에 반영될수록,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역시 성숙해 갔다.

한국천주교회 구성원의 시민의식 역시 향상되었다. 그들은 교회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시민이기 때문에, 성장하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배경으로 교회 구성원 가운데는 ‘교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한국교회가 경직된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성직자와 평신도가 서로 협력하는 교회로 변화하길 바란다. 반면 교회 내에는 ‘교회 민주주의’를 반박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교회 지도자 즉, 성직자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교회 지도자들은 다수결로 뽑히지 않고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본질적으로 민주적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인간들, 그들의 모임인 교회는 신앙의 빛 없이 그 어떤 결정도 스스로 올바르다 단언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후계자를 뽑아, 그들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여러 중요한 결정을 해 왔다. 이처럼 교회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다수결보다는 하느님께서 교회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통해 지속해 왔다. 한편 성직자(지도자)는 수도자·평신도와 더불어 ‘하느님 백성(populus Dei)’을 구성하는 일원이다. 따라서 그들은 홀로 (혹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과 함께 결정을 내린다. 이 점에서 나는 ‘교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천주교회 안에 독특한 의사결정 방식이 존재한다고 본다. 최근 관심이 집중되었던 아마존 특별 주교 시노드는 천주교회가 지닌 독특한 의사결정 방식의 성격을 잘 보여 주었다. 아마존 시노드는 아마존 지역 주교들과 함께 아마존 원주민 지도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지역에 맞는 사목적 결정이 내려질 수 있도록 몇 가지 특별한 제안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아마존 지역에 한해 기혼 남성에게 사제 서품을 줄 수 있도록 하는 제안은 사제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 아마존 지역의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이 제안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달되었으며, 교황은 이를 참고해 최종 결정을 내리고 시노드 최종 문헌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 아마존 시노드는 교회 지도자가 홀로 사목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함께 고민하여 도출한 결과를 권위 있는 지도자가 최종적으로 결정해 주는 천주교회식 의사결정 방식의 전형을 보여 준다. 즉 천주교회는 하느님 백성이 한 데 모여 토의하고, 그것을 토대로 교도권을 가진 지도자가 결정을 내리는 고유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교회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점에서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신적 권위에 기대고 있으므로 완전히 민주적이지만은 않다.

2015년 10월 2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특별총회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 출처 = La Croix)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공동합의성 그리고 신앙 감각

사실 교회 안에는 교회 지도자가 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결정을 도출하는 전통이 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교회 안에서 소외당했던 이들, 즉 할례받지 않은 비유다인 신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들의 할례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사도 15,1-35) 그것은 교회 내 약자들의 처지에 눈감지 않았던 사도들의 섬세한 관심과 베드로 사도의 용기 있는 결단이 이루어 낸 결과였다. 이 최초의 공의회를 계기로 교회 안에는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함께 듣고 교회 지도자가 사목적 결정을 내리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공론장을 ‘시노드’ 또는 ‘공의회’라고 부른다.

이 전통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자체가 전통의 재발견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유럽인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이전 공의회와는 달리, 전 세계에 퍼져 있던 지역교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했던 진정한 보편공의회였다. 실제 공의회는 전 세계 지역교회로부터 의견을 받아 안건으로 올렸으며, 그 안건은 전 세계에서 모인 2600명 이상의 교부들과 평신도, 신학자, 형제 종교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논의되었다. 교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이 그 안건을 다루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자, 교회가 당면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것을 해결할 방안도 마련할 수 있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교회가 경청하겠다는 결정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보편교회는 전 세계 주교의 의견을 듣기 위해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설치했다. 또 한 교구 차원에서는 사제의 의견이 교구장 주교의 결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사제평의회’를, 평신도·수도자의 의견이 교구장의 결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교구사목협의회’를 설치했다. 본당 차원에서는 본당 구성원의 의견이 사목구 주임사제의 결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본당 사목협의회’를 설치했다. 이처럼 공의회는 보편교회에서 일선 본당까지 교회 구성원의 목소리가 지도자의 사목적 결정에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었다.

공의회 이후 지금까지 주교 시노드가 여러 차례 열렸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교 시노드를 자주 개최하여 주교들의 합의사항을 제출받아 자신의 사도적 결정을 위한 판단 근거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는 교황 자신이 홀로 결정하지 않고,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동료 주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경청하여 결정하겠다는 교황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실제 그는 2015년 10월 17일 가정과 관련한 제2차 주교 시노드 개막 연설에서 그러한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공동합의성(synodality), 곧 시노드의 여정은 하느님이 삼천년기 교회에 바라는 길이다. 공동합의에 바탕을 둔 시노드 교회는 듣는 교회로서 주의 깊은 청취는 그냥 듣는 것 이상이며, 사려 깊은 듣는 행위를 통해 서로 배울 수 있다.1)"

‘공동합의성.’ 여기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개념을 발견한다. 그는 교회가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synodos, συνοδος)’ 공동체라는 점을 깊이 이해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함께 토의하고, 지도자가 결정하는) 전통은 초대교회 때부터 존재해 왔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소통하며 의견을 모으는 과정 속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마태 18,20)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기원을 둔다. 교회는 이것을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sensus fidei)’으로 표현한다. 즉 하느님 백성은 ‘신앙 감각’을 통해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에게 신앙과 도덕 문제를 판단하는 능력이 있으며,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백성이 보편적 동의를 보일 때 그것은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선언('교회헌장' 12항)함으로써 신자들이 지닌 ‘신앙 감각’을 공식 인정하였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가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행위 즉, 공동합의성에 의한 의사결정은 하느님 백성이 지닌 ‘신앙 감각’을 통해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실제 제8대 국제신학위원회가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2014)이라는 문헌을 발표한 이후, 제9대 국제신학위원회가 발표한 문헌이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2018)이라는 점은 ‘신앙 감각’과 ‘공동합의성’ 개념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공동합의성을 지향한 한국교회의 도전

그렇다면 한국교회사 속에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이 공동합의성의 형태로 드러난 적이 있을까? 나는 1981년 11월부터 1984년 12월 1일까지 진행된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이하 ‘200주년 사목회의’)가 초대교회의 전통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200주년 사목회의는 말 그대로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해 개최된 행사였다. 이 회의는 전국의 성직자·수도자·평신도가 모두 모여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된 내용 가운데 일부를 주교회의가 지역교회법전에 반영한 전체 한국교회 최초의 공론장이었다. 즉 한국교회 안에 공동합의성이 발휘된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사실 한국교회사를 살펴보면, 여러 차례 교회 회의가 있었다. 조선 대목구 시절에는 1857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가 개최한 1차 교구회의(시노드)를 시작으로, 1868년 중국 요동 차쿠(岔溝)에서 열린 교구회의, 1884년 블랑(Marie-Jean-Gustave Blanc) 주교가 개최한 교구회의가 있었다. 한편 1911년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의 분할, 1920년 원산 대목구, 1927년 평양지목구 설립과 더불어 1917년에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반포한 "교회법전"의 등장으로, 한국교회는 전체 교구(대목구, 지목구)가 함께 모여 한국교회의 상황을 논의할 지역 공의회를 개최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이었던 1931년에 공의회가 열렸는데, 그것이 ‘조선지역공의회’였다. 이때 만들어진 한국 지역교회법전이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였다. 당시까지 개최된 교구회의나 시노드는 성직자가 중심이 되어 한국교회의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형태였다.

이후 1965년에 폐막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고, "교회법전" 또한 개정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국교회 역시 새로운 상황에 맞는 지역 교회법전이 필요했다. 이때 한국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시노드나 공의회가 아닌, 하느님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사목회의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200주년 사목회의’였다. 내가 볼 때, 이러한 기획과 결정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폐막한 지 1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성직자·수도자·평신도를 모두 아우르는 ‘하느님 백성’ 개념이 한국의 각 지역교회까지 널리 확산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성직자 중심 교회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교회 지도자가 성직자와 수도자·평신도가 모두 참여하는 사목회의를 기획하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선구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했던 당시 교회 지도자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200주년 사목회의 ‘의의와 목적’은 이를 잘 드러낸다.

"2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천주교회는 사상 처음으로 하느님의 백성 전체 즉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같이 참여하는 사목회의를 소집하여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목회의는 마치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온 교회와 전 세계에 대하여 한 바와도 같이 안으로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의 새로워진 모습을 지향하고 밖으로는 온 겨레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을 유감 없이 전하여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려는 것이다."(200주년 사목회의 의의와 목적)

실제로 200주년 사목회의는 교회 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는 사목회의 의제를 마련하기 위해 교회 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313개의 제안을 모았고, 그것을 교회 쇄신(내성, Ad intra)과 세상과의 대화(대화, Ad extra)로 구분하여 12개의 의제로 정리했다. 각 의제는 1년 동안 200차례의 분과회의, 간담회, 세미나, 연수회 등을 통해 검토되었고, 그렇게 마련된 의안 초안은 각 교구별 사목회의를 통해 재검토되었다. 재검토된 각 의안은 사목회의 대의원의 투표를 통해 승인되었으며, 그것 들은 1995년에 발간된 한국지역교회법전 즉, "한국천주교회 사목지침서"(이하 "사목 지침서")에 반영되었다.2)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 한국교회의 도전은 성공했는가?

일면 성공적인 도전으로 보이는 200주년 사목회의는 폐막 후 35년 이 훌쩍 지난 오늘날 한국교회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주지하듯,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이하 "200주년 의안") 속 제안이 "사목 지침서"에 반영될 수 있었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가 한국교회의 공식 지역교회법전에 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주년 의안"은 "사목 지침서"에 온전히 반영되지 않았으며, 분야에 따라 반영된 폭이 다르다. "사목 지침서" 편찬을 책임졌던 당시 교회법위원회 위원장 정진석 주교에 따르면, "사목 지침서"는 ‘하느님의 백성’, ‘전례와 성사’, ‘사목’ 분야 즉, 교회의 근간이 되는 제도적 부분은 "교회법전"의 내용을 압축하면서 "200주년 의안"의 제안을 수렴했고, ‘특수 사목’, ‘선교와 신자 단체’, ‘사회’ 분야는 "200주년 의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고 한다.3) 이처럼 분야에 따라 "사목 지침서"에 반영된 정도가 다른 이유는 아마도 교회 제도와 관련된 부분이 상위법인 "교회법전"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별법("사목 지침서")이 보편법("교회법전")에 우선한다는 원칙이 "사목지침서"에 제시4)되었지만, 성직자의 정년(65세) 규정, 교구장 임기(10년) 등의 인사규정 관련 제안("200주년 의안" 1 성직자 편, 47항)은 "교회법전" 개정5) 없이 "사목 지침서"에 반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대사회 분야의 제안은 "교회법전"의 개정 없이도 지역교회의 상황에 따라 반영될 여지가 컸으므로,6) 다수의 제안이 "사목 지침서"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실제 한국교회 현장에서 "200주년 의안"의 제안들은 얼마나 수용되었을까? 비록 "사목 지침서"에 전폭적으로 반영되지 않았지만, "200주년 의안"에서 제안된 성직자의 품위와 행동 부분을 통해 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200주년 의안"은 한국교회의 성직자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봉사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성직자는 친절과 온유로써 이웃을 대해야 하며 이웃과의 폭넓은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간 성숙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의 품위와 고유한 사명을 일깨우고 증진시켜 한국교회의 특성인 평신도들의 활동을 진작시키며, 그들이 받은 여러 가지 은혜로써 교회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주고 봉사자로서, 그리고 교회의 전승을 수호하는 자의 사명을 다하게 해야 할 것이다."("200주년 의안" 1 성직자 편, 10항)

안타깝게도 오늘날 여러 사람이 묘사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권위적인 성직자, 수동적인 평신도’로 수렴된다.7) 대다수 겸손한 성직자, 능동적인 평신도가 한국교회 곳곳에서 교회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지만, 현실과는 달리 한국교회가 상반된 모습으로 관찰·묘사된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200주년 의안"이 제시한 성직자·평신도 상은 아직까지 한국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200주년 의안"에 새겨진 교회의 공동합의적 성격은 교회의 교계제도를 부정하면서, 평신도가 성직자의 역할을, 성직자가 세속의 역할을 하는 것을 부추기는 개념이 아니다.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은 “평신도를 의사결정에서 제외시키는 지나친 성직주의의 유혹을 언제든 피하면서, 평신도를 성직자처럼 만들거나 성직자들을 세속화하지 않고, 각자의 선물과 역할에서 출발하여, 복음화를 위한 증언에서 모든 이의 상호 협력을 강화”8)하는 것이다.9) 따라서 공동합의성에 입각한 교회 내 공론장의 활성화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새롭게 제시한 교회 조직의 원리 즉, ‘교계적 친교(communio hierarchia)’10)를 풍요롭게 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교회적이다.

한편 ‘200주년 사목회의’ 과정을 통해 활성화된 평신도의 역할이 ‘사목회의’ 이후 상당 부분 위축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그것은 "200주년 의안"이 상당 부분 사문서화되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물론 2000년 대희년을 기점으로 여러 교구에서 교구회의(시노드)를 개최하고, 교구민의 의견을 수렴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문서로 남고 실행에 옮겨진 부분은 소수에 그친다는 점11)에서 1984년 ‘200주년 사목회의’ 에서 시작된 한국교회의 공동합의적 쇄신을 위한 도전은 절반의 성공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인 말이겠지만,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공론장’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합의된 것이 실제 실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다고 말한다.12) 한국교회의 ‘공론장’ 실험은 ‘200주년 사목회의’의 개최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법·제도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에서 온전히 실현되기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그것이 실현되려면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가 일상적(혹은 본당 내에서)으로 공론장에서 토의되고, 토의 내용이 지도자의 권위로서 실현되는 경험이 반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시노드, 사목회의, 지역 공의회처럼 공식화된 혹은 대규모 차원의 공론장이 아니더라도, 하느님 백성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상시적이고 일상적인 공론장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존재하는지 또 활성화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국천주교회의 오래된 미래였던 ‘공동합의적 교회 쇄신’, 이젠 미래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1) 황경훈,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 ‘공동합의성’을 돌아보다', <가톨릭 평론> 12호(2017), 38-39쪽.

2) 이미영, '한국천주교회 쇄신 프로젝트, 200주년 사목회의 30주년을 기념하며',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1051호(2014), 32-33쪽.

3) 정진석, '일러두기',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16-17쪽.

4) 위의 글, 12쪽.

5) 현 "교회법전"은 교구장 주교가 “75세를 만료하면 교황에게 직무의 사퇴를 표명하도록 권 고”(제401조①)하고 있으며, 본당 사목구 주임 역시 75세를 만료할 경우 “직무의 사퇴를 표 명하도록 권고”(제538조③)한다.

6) “5. 교회의 보편법 가. 교회의 보편법은 각 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언어와 풍속이 각기 다른 온 세계의 모든 신자들이 지키도록 제정된 법률이다.(교회법 제12조 1항 참조) 나. 그러기에 보편법은 각 민족에게 고유한 문화 전통과 사회 여건에 더 잘 맞는 구체적인 세칙 을 따로 제정하도록 각국의 주교회의에 위임하거나 허용한 사항들이 적지 않다. 다. 또 주 교회의가 해당 국가의 법률이나 관습을 참고하여 그 지역교회에 적합한 규범을 제정하여 야 할 사항들뿐 아니라 해당되는 지역의 국법을 그곳의 교회법으로 준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사항들도 있다.” 정진석, 앞의 글, 11-12쪽.

7) '교황 방한, 응답하라 2014 한국교회-교회 쇄신, 300인에게 물었다', <가톨릭신문> 2898호 (2014.6.8); '교황 방한, 응답하라 2014 한국교회 (2) 사제, 왕인가 종인가?', <가톨릭신문> 2900호(2014.6.22) 등.

8)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9), 99항.

9) 경동현, '성숙한 신앙, 시민성 함양을 위한 가톨릭 시민교육', "김수환 추기경과 삶을 살리는 시민교육", 제9회 김수환추기경연구소 심포지엄(2019.11.29), 105쪽.

10) ‘교계적 친교’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하느님 백성으로 친교를 이루지만, 교회 내 직무 에 따라 교계적 차이를 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1) '교황 방한, 응답하라 2014 한국교회-교회 쇄신, 300인에게 물었다', <가톨릭신문> 2898호(2014.6.8).

12) 낸시 프레이저, 김원식 옮김,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그린 비, 2010).

김선필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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