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교회비평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정교 분리 정책[교회비평 - 김진소]
이 글은 천주교주교회의의 <사목> 1995년 2월호(제193호) 특집 '일제 치하의 한국 천주교회' 에 실린 글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재를 허락해 주신 김진소 신부님께 감사합니다. -편집자


1. 정교 분리 정책과 정교 유착 

일제하 우리 민족이 당면하고 있던 가장 큰 역사적 과제는 외세 침략의 상황 때문에 강도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업 수행에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교회도 어떤 형태로든 참여해야 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1906년 10월 19일 <경향신문> 창간호를 통해 정치 불간섭주의적인 정교 분리 원칙을 선교 정책으로 발표하였다. 즉 교회의 고유한 선교활동에 전념할 뿐 정치적인 문제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본래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와 국가가 자기의 활동 영역을 지키는 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리다. 정교 분리 원칙의 근본 취지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데 있다. 

한국교회는 1899년 3월 9일 조선정부와 '교민조약’(敎民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이때 조선 정부와 한국교회는 정교분리 원칙을 문언으로 규정했다. 즉 교회는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며 정부는 교회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조약은 1904년 '선교조약’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일제하의 정교 분리 원칙은 정교 유착의 성격이 강했다. 1906년 2월 초대 통감인 이등박문은 개신교의 선교사들에게 회유책을 폈다. 그의 제의는 "한국 정치는 통감이 맡고, 정신적 교화는 종교가 맡는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제측은 정치 분야를, 선교사 혹은 목사는 정신계, 종교 분야를 계도한다는 이른바 '역할 분담론’ 이었다. 그러나 근본 정의는 교회 세력을 정치권으로부터 철저히 차단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저의를 교회가 모를 리 없지만 긴 세월 동안 박해의 체험을 가진 한국교회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석연치 않은 정교 분리 원칙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정치적 술수에 말려 들어 식민지 지배 통치를 묵인, 방조, 비호하는 정도를 넘어 동조와 협동, 봉사와 충성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에게 반침략운동을 금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단죄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태도는 역사의식과 민족 의식은 표리관계를 이룬다는 인식에서 볼 때 역사 의식과 민족 의식이 희박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으며, 결국 한국교회에 대한 민족사적 시각의 평가는 반민족 내지 비민족적이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 성직자와 신도들은 무력 항쟁으로 또는 온건한 방법 등 여러 가지 형태로 투쟁했었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학계에서 계속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체제의 특성상 통치권자인 제도교회, 곧 주교의 결정만을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로 간주하려는 사회 인식 때문에 한국교회의 민족운동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러면 한국교회가 반민족 내지 비민족적인 성향을 띠게 된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한국교회가 외국 선교사들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있었던 현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때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있는데 크게 나누어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요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1) 한국 선교의 책임자인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 2) 복음주의적인 신앙 구도 3) 선교사들이 모국과 교황청으로부터 이중의 영향을 받고 있던 점 등이다. 

2. 선교사들의 선교 방침과 민족의식 

파리외방전교회는 1831년 9월 9일 교황청으로부터 한국 선교를 위임받았다. 한국교회의 선교 방침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하여 현지 교회를 세우는 것,2)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것, 3)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회가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1659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의 훈령을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주 1)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순교자적인 삶으로 사목 활동에 분골쇄신하였다, 그들의 선교활동은 한국인의 영혼 구령에 있었지, 선교지의 민족 문제나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민족 의식은 가장 중요한 가치 규범이며 민족 의식이라는 말 속에는 민족에 대한 자긍심, 사명감, 민족의 안정과 발전을 희구하는 충성심과 같은 감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민족 의식은 향토애, 조국애에서 나온다. 천주교는 전통적으로 조국애를 국민의 중요한 덕으로 가르쳐 왔다.(주 2)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기 조국에 대한 존경과 의무감이 충실하여,제1차 세계대전 때 모국의 전쟁에 기꺼이 참전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서구 강대국의 민족주의이므로 프랑스 제국의 국민인 선교사들이 한국인 민족 의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제하 한국교회의 선교를 담당하던 선교 단체는 파리외방전교회 외에 독일 베네딕토회, 미국의 메리놀외방선교회, 아일랜드의 골롬반외방선교회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국민이었다. 이들의 의식은 제국주의 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선교지였지 조국은 아니었고,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주기 위해 수고하다가 떠나갈 손님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한국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렴할 수 없었다. 

선교사 빌렘 신부가 안중근의 사촌 아우인 안명근에게 "나는 서양 사람이어서 (조선에 대해) 애국심이 없다.”고 한 말은 솔직한 고백이다. 한국교회의 통치권자들이 한국인 성직자와 신도들의 독립운동을 정치운동으로 단정하고 단죄한 이유도 민족이 다른 까닭이었다. 그들은 한국인 개개인의 영혼을 구하러 온 손님이었으며, 그들의 의식에는 선교지의 정치적 '사회적 구원의 육화의식'이 없었다. 더구나 성속 이원론적인 신앙 구조는 독립운동을 세속의 문제로 단정하였다. 

선교사들이 민족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교회 중심주의, 선교를 우선으로 하는 선교 우선주의,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보수적인 자세를 가진 것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최대 과제가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해서 한국인들로 구성된 자치적인 교계제도를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마 교황청의 바람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는 "로마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고, 교회는 구원의 유일한 방주이고, 교회 안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누구나 멸망하리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선교사를 선도하던 시대였다. 

'러일전쟁' (1904)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3. 선교사와 모국의 관계 

한국교회는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뿐 아니라 주민과 발생하는 문제까지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프랑스의 한 교구로 생각하였다. 이런 의식은 한국인 신도들에게까지 연장되어 프랑스 국민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통치권자 곧 뮈텔 주교는 항상 모국인 프랑스의 정책과 궤를 같이했다. 프랑스가 친러배일(親露排日) 관계에 있을 때에는 뮈텔 주교 역시 그랬다. 1907년 프랑스는 불일협정(佛日協定)을 체결하고 일본의 한반도 소유를 용인하였다. 뮈텔 주교는 친일 노선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고, 정교 유착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교 분리 원칙을 결정한 것에는 모국인 프랑스교회의 상황도 한몫을 했다. 1905년 프랑스교회는 정부와 정교 분리 정책을 체결하고 말았다. 교황 레오 13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반성직주의가 드세어 분리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06년 2월 11일 비오 10세는 정교 분리 정책을 단죄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프랑스 주교들은 일본 제국을 합리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조선을 일본 제국의 종속국이 아니라 일본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반정부운동으로 단정하였다. 월남을 침략하고 있는 제국주의 프랑스 국민의 눈에는 일제의 침략 행위가 정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무모한 짓으로 판단했다.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는 것이다. 그런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1911년 6월 11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서품식이 있었다. 16일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조선 총독 테라우치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뮈텔 주교는 “천주교는 정치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고, 나는 항상 일본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나와 우리 모든 신부들의 공통된 생각이고 또한 신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충성스럽게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3.1운동 때에 한국 주교들은 한결같이 이 운동을 단죄하였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는 "일본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다. 우리 가톨릭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황제)에게 바쳤다”고 성서를 인용하며 충성을 선언했다. 그리고 대구의 신도들에게 만세운동에 가담하면 대죄를 범하므로 지옥에 갈 것이라고 흥분하여 말했다. 

드망즈 주교는 1933년 자기 관할 구역의 한국인 성직자에 대해 개탄하였다.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있어서 포교 정신이 결여된 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그들의 '민족주의’로서, 프랑스 선교사에 대한 불신이다.”라고 했다. 그는 교회의 최대 사명인 선교보다 한국인의 민족주의를 더 크게 걱정했다. 

일제하 한국교회에는 5명의 주교가 있었지만 선임 주교들의 정책을 따라갈 따름이었다. 

4. 교황의 외교 정책 

한국교회 통치권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끼친 것은 모국의 정책 외에 교황청의 정책으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뮈텔 주교가 친일 노선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등박문이 교황 레오13세를 만나고 난 후였다. 이등박문은 친러 배일의 감정을 갖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이 땅에서 대체해 줄 것을 청하러 교황을 방문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등박문은 교황에 대해 "참 놀라운 지혜를 가지신 분이다. 그분은 조선의 비참한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외교관이다.”라며 감탄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904년 2월 9일,러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조선통신문 2월 16일 자에 따르면 교황이 일본 정부에 전쟁 동안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뮈텔 주교는 자기를 주교로 임명한 레오 13세를 의식한 듯하다. 외교 선호가인 교황은 1892년 회칙 '새로운 근심 걱정 속에서'(1892년 2월 16일)를 프랑스어로 발표하였다. 그 회칙에서 교황은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정교 분리를 묵인할 수 없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정교 분리가 묵인될 수 있다고 하며 정교 분리를 시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권력을 받아들여야 함은 허락될 뿐 아니라 요구되는 일이며, 권력을 낳고 이를 유지하는 사회적 유대관계에 의하여 강요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국이 어떤 체제를 갖고 있든 간에 외교관계를 맺겠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교황은 여러 가르침을 통해 교회와 국가가 현대사회라는 틀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권장하는가 하면, 비그리스도교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맺어 가고 있었다. 

1919년, 교황청은 일본에 대사관을 설치하면서 한국교회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이런 조처는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의 일부로 생각한 것으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정당하게 인정해 준 것이 되었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15세는 1922년 조선 총독 사이토와 정무총감 미즈노 그리고 총독 부인 미쓰미야에게 성 실베 스텔 훈장을 수여하였다. 포상 이유는 한국 주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데 대한 답례였다. 총독은 한국 주교들을 빈번하게 식사에 초대하고 베네딕토 수도원의 대원장인 독일인 주교 사우어(신)와는 아주 막역하게 지냈다. 이런 행위는 일제가 정권을 지지하도록 종교를 이용하는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교황청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지지하고 정당화 내지 신성화한 극단적인 표현은 신사참배를 허용한 일이다. 로마교회는 한 번도 약소 민족과 피압박 민족의 편에 서서 고통에 동참한 적이 없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주교가 사임하고 1942년 한국인 주교가 통치권자가 되었어도 그 역시 과거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역사는 반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과거 제국주의자들의 힘의 논리에서 벗어났지만 문화 식민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교회를 활성화한다는 이유로 회자되고 있다. 언제 우리에게는 민족 문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신학, 우리의 정서에 맞는 신앙운동이 일어나고, 지나치리만큼 철저한 로마 의존, 중세교회의 유물인 제도교회의 틀을 깰 수 있을까, 그날이 보고 싶다. 

1) 교황 알렉산데르 7세, 1659년 통킹과 코친차이나 교황 대목구장에게 보낸 인류복음화성의 훈령 본문, Collectanea Sacre Congregationis Propaganda Fide, Rome(1907) 1, 42-43면. 
2) "신학대전", 2부 2편, 101조 1항. 

김진소 

전주교구 원로사제, 전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