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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변천 연구[자료 - 김연수]

아래는 김연수 신부의 박사논문인 ‘북한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변천 연구’(2018)에서 일부 요약문 부분만 모은 것입니다.

이 논문은 최근 남북 관계의 변화 속에 북한 교회와 신자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에 독자 여러분께 논문 전체는 아니지만 그 주요 내용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취지에 공감하여 논문을 제공해 주신 김연수 신부님에게 감사합니다. - 편집자

 

(국문 요약)

본 논문은 북한의 1950년 6월 이후 북한 지역에서 말살되어 사라졌다가 1980년대 말에 새롭게 드러난 북한 가톨릭교회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존재양식에 대한 인식의 틀 분석에 요구되는 효과적인 접근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북한 가톨릭교회는 처음 북한에 전래된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북한 공산 정권의 정책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과정을 경험하였다. 현재 북한 가톨릭교회는 ‘조선카톨릭교협회’와 평양 ‘장충성당’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선카톨릭교협회의 출현과 장충성당 건립이 북한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출발을 보여 준 것은 사실이지만, 남한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이 단체가 북한 당국의 통제 하에 활동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진정성에 대한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보편교회’라는 존재양식에 근거한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세계 어느 국가에서나 공통된 교계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의 종교정책은 가톨릭교회의 특성을 제거하는 것이므로 북한 당국의 직접적인 통제로 인한 비자율성은 당연히 그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북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현실적 이해와 접근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북한 사회주의체제 내 가톨릭교회의 존재양식 분석과 함께 이에 대한 다각적인 정치·사회적 성격 규명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통시적 접근을 통해서 북한 천주교회의 역사적 전개 형태를 분석하는 가운데 특히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된 과정을 살펴보고, 현재 사회주의적 종교의 형태로 나타나 기능하고 있는 북한 가톨릭교회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 지역에 가톨릭교회가 전래되고 성장한 이후 공산주의 사상과 만나 어떻게 관계를 맺었고 말살의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1980년대 말에 어떻게 돌출했는지를 통시적인 시각으로 분석하였다.

북한 정권이 소비에트화 과정을 거치면서 종교를 탄압하고 무자비하게 종교인들을 박해하고 살해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 상처는 여전히 가톨릭교회 안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면적 이해를 넘어서 다각적인 측면에서 북한 가톨릭교회의 존재양식에 영향을 미쳤던 배경들에 대한 연구와 현재 북한 가톨릭교회를 이해하고 남북 가톨릭 교류의 형식과 결실을 좌우하게 되는 본질적 요소들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처럼 본 논문의 북한 가톨릭교회 존재양식에 대한 통시적 연구는 분단구조 속의 북한과 남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현실적 이해에 그치지 않고, 그 존재양식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교계제도와의 관계 변화를 실증적으로 검증하여 향후 북한 가톨릭교회가 취해 나갈 진로에 관한 원론적 이해와 이에 입각한 비전 설정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그 존재양식을 결정짓는 교계제도 여부에 대한 판단과 분리될 수 없다. 분단 현실 극복을 위하여 남한 가톨릭교회와 바티칸이 북한 가톨릭교회와의 교류를 지속해 오면서도 ‘상주사제문제’의 해결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의 북한 가톨릭교회는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 지배하는 특수한 조건 속에 존재하고 있다. 북한 가톨릭교회 신자들 역시 일반적 의미의 종교 자유가 없는 체제와 한계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 가톨릭교회의 존재양식은 남한 가톨릭교회가 종교의 자유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과 는 판이하게 다르다. 때문에 우리의 시각이 아닌 북한의 특수한 체제와 현실 여건을 감안하여 북한 가톨릭교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한 가톨릭교회가 북한 가톨릭교회의 현실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북한 가톨릭교회 단체나 신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만이 커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제1장 서론

(서론이라 따로 소결 요약문이 없음.)


제2장 일제 강점기 북한 지역의 가톨릭교회

제4절 소결

일제 강점기 이전 북한 지역의 가톨릭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로 신자들이 북한 지역으로 유배를 오거나 피신을 오면서 자리 잡기 시작되었다. 신자들은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 이를 피해 가며 지리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찾아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들에게 가톨릭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60년대에 이르러 북한 지역에 가톨릭 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성직자가 순회하면서 신자들을 돌보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 지역은 선교사가 이들을 돌보기 전 약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평신도들 스스로에 의해 가톨릭이 전래되고 성장되었다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1866년에 전국적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북한 지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더욱 강한 믿음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전교활동을 하였고, 그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신앙공동체는 계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880년대 개항기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활발하게 전교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원산과 평양에 본당이 설립되고, 선교사들에 의한 본당 활동이 가능하게 되어 일제 강점기 전까지 본당과 신자의 수가 늘어나게 된다.

가톨릭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에 놓이게 된다. 일제는 처음에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종교자유를 허락한다고 약속하였지만, 반종교정책을 실시하면서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사립학교 규칙을 개정하여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금지하고, 포교규칙 시행을 내세워 종교 시설과 성직자들을 통제하는 반종교정책을 공공연히 폈다. 특히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인적 물적 징발과 수탈을 감행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지도층은 이런 일제의 종교정책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독립운동을 배격하고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가톨릭 신자들이 항일운동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가톨릭교회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일제의 이러한 반종교정책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반발하지 못하고 교회의 명맥 유지를 위해 오히려 일제의 한반도 강제 점령을 합법적으로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하지만 신학생들과 평신도들은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특히 가톨릭계 독립운동은 북한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중에는 한국인 사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임시정부를 도와 독립군 군자금을 모금하고, 동료사제들과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는데, 결국 뮈텔 주교의 반대와 제재로 더 이상 독립운동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가톨릭의 특성상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가 가톨릭 전제를 대변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본 논문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반공의식이 언제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위해 8.15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 초래된 가톨릭교회의 수난과 이를 바라보면서 반공의 기치를 앞세웠던 남한 가톨릭교회의 뿌리 깊은 반공의식의 출발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그 단초를 일제 강점기의 한국 가톨릭교회 모습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제 강점기에 한국 가톨릭교회가 조우한 공산주의와의 관계를 함께 살펴보았다.

특히 일제 강점기는 3.1운동 이후 민족독립운동이 고조되어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해외의 항일무장투쟁이 본격화되었고, 그 와중에 민족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볼셰비키혁명으로 탄생한 레닌 정부와 조우하게 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와의 관계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대상이었다. 분석 결과 볼셰비키혁명의 성공과 함께 피압박 민족들에게 반제독립투쟁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공산주의는 민족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등장했으며, 조선공산당이 국내에서 만들어지려는 시도와 실패를 살펴보았다.

한편 전 세계 가톨릭을 대표하는 바티칸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고, 레닌의 볼셰비키혁명으로 무신론적 국가가 설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종교 투쟁을 통한 교회 탄압이 가시화되는 참상을 목격하면서 격렬히 이를 비판하고, 또한 러시아와 스페인 그리고 멕시코 교회 등의 박해 상황을 지역 교회들에 전하는 교황의 회칙을 발표하여 1930년대에는 그 내용이 일제 강점기의 한국 가톨릭교회 언론을 통해 전달됨에 따라 원론적 차원의 반공주의가 이식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한국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는 북한 가톨릭교회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만주 간도 지역의 연길교구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겪게 된 수난을 통해 현실감과 적대감을 강화하게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일제 강점기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친일적인 태도와 반공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한국인 성직자, 신학생, 수도자들, 신자들은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이념의 허구성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폭력성 등을 폭로하는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자 했던 면에 대해서도 객관적 평가가 필요하다. 이는 반공주의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는 이를 둘러싼 의미구조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반공주의의 결함을 보완하고, 이를 넘어선 가치의 창출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장 북한 정권 수립과 가톨릭교회

제4절 소결

해방 후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눠지고 가톨릭교회도 분단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북쪽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스탈린의 통일전선정책에 발맞추어 북한 주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포용적으로 종교정책을 실시하였다. 김일성의 북한정권도 소련군이 주둔해 있는 기간 동안에는 소련군정의 종교정책을 감안하여 내적으로는 종교탄압을 가속화하면서도 외적으로는 기독교도련맹 등 애국적인 종교단체들을 만들어 정부를 지지하고 협조하도록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무신론적인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분명한 거부 입장을 밝히면서 북한정권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종교단체에 가입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다.

북한정권은 토지개혁, 학교의 공교육화, 주요산업국유화 정책을 실시하며 가톨릭교회의 경제적인 자립과 전교활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가톨릭교회는 북한정권 초기의 민주개혁 정책으로 피해를 보았지만 공산당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간접적·소극적으로 저항하였다. 이 시기에 가톨릭교회는 북한정권에 대응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소후원회를 만들어 신학생을 교육하는 데 노력하였다. 북한 가톨릭교회가 소극적 간접적으로 공산정권에 저항하고 있을 때, 남한 가톨릭교회는 종교 자유를 표방하는 미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북쪽 지역의 가톨릭교회가 박해 받는 상황을 대대적으로 비판하고 여론화 하면서 반공주의를 강화하였다.

북한은 정권 수립 후 소련군이 철수하자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북한당국은 덕원수도원과 신학교의 선교사, 수도자, 신학생들을 연행하거나 추방함으로써 수도원과 신학교를 폐쇄하였다. 북한정권은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그리고 황해도 지역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연행하면서 가톨릭교회의 기능을 철저히 마비시켰다. 북한 가톨릭교회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본국으로 송환되는 상황이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북한 가톨릭교회는 북한정권 수립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월남한 극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성직자 수도자들이 체포당했다.

남북한 가톨릭교회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다른 종교에 비해 북한정권에 의한 피해가 훨씬 컸다. 그 이유는 첫째, 남한 가톨릭교회 대부분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북한군의 점령 지역에 그대로 남아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당 신자들을 돌보면서 신자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북쪽에 남아서 박해를 각오하였다. 둘째, 북한 가톨릭교회가 무신론을 주장하는 북한 당국에 비협조적이었으며 반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북한 공산정권의 탄압이 가중되었었다. 마지막으로 남한 가톨릭교회는 북한 가톨릭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 당국을 맹렬하게 비난하였기 때문에 북한 정권과의 충돌이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공간의 남한 가톨릭교회는 미국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며 남한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반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북한 공산당 정권을 물리치기 위한 국제사회와의 공조에 힘을 쏟고 있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가톨릭교회 안에 엄청난 물적·인적 피해를 가져왔다. 이처럼 북한정권으로부터 받은 피해 외에도 또 하나의 큰 피해는 남북한 가톨릭교회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다. 이 시기에 북한정권이 가톨릭교회에 행했던 탄압과 박해가 북한 가톨릭교회를 인식하는 데 지배적인 역할하고 있고, 남한 가톨릭교회 안에는 반공의식이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죽고 죽였던,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들에 대한 박해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이 상처는 남한 가톨릭교회 안에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반공주의는 남한 가톨릭 신자들 안에 더욱 깊이 내면화되었고,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반공주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마저 말살시켜 버렸다.

전쟁 이후 북한에 남아 있는 가톨릭 신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잃어버렸지만, 보이지 않게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북한 신자들은 전쟁 이후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반종교 교육을 받으며 종교를 포기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감시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박해시대의 전통을 이어 나가는 힘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온 신자들의 상세한 내용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개인적인 신앙을 유지하는 독특한 상황을 견뎌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가톨릭교회의 경우는 기독교도련맹에도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교회의 형태로 인정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개신교 신자들보다 더 엄격한 감시의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북한정권은 그들의 거주지를 제한하고 감시와 교화의 대상으로 특수 관리 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은 지금이라도 북한 당국이 이를 공인해 준다면 언제든지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장충성당 내부 모습.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제4장 북한 가톨릭교회의 재출현

제4절 소결

북한 가톨릭교회는 오랫동안 침묵을 깨고 1988년에 가톨릭교회를 대변할 수 있는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가톨릭교회가 재출현하게 되기까지 북한 내외의 변화 요인을 정리하면서 북한 가톨릭교회 재출현이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북한은 김정일 세습권력을 공식화하는 가운데 주체사상을 확립하고 김일성 제체를 공고화하였다. 북한 내부적으로도 정치적으로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를 통일전선에 이용하는 정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주체사상이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사상임을 강조하였고, 종교에 대한 이해도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여 종교를 인정하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북한의 매체들은 주체사상이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종교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고 그 가치를 공명정대하게 평가한다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북한 당국은 주체사상의 확립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종교관과 차이를 두고 종교를 실용주의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자 하는 정책을 취한 것으로 학자들은 이를 북한의 신종교정책으로 평가했다. 

북한 당국은 신종교정책을 앞세워 주체사상의 관점에서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정립하고 종교를 배척하기보다는 종교인들과 함께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 지도부가 주체사상 확립을 통해 종교인들에 대해 확실히 교화를 이루었다고 평가하고, 종교에 대해 충분한 통제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은 이 시기에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객관적인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북한 종교인들의 국제적인 연대활동 노력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국제적인 연계가 비교적 용이한 기독교도련맹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같은 활동은 소련 및 동유럽, 비동맹국가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연합운동체인 세계기독교평화회의(WCPC)와 아시아기독교평화회의(ACPC)를 중심으로 하면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하려는 노력에 역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북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와 달리 해방 공간에서 기독교도련맹 가입을 거부하여 그들 자신을 대변할 단체를 갖지 못해서 바티칸을 비롯한 해외 천주교 단체와 교류를 가질 수 없었다. 한편 이 시기에 남한의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주교회의 산하에 북한선교위원회를 만들고 침묵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사제들을 북한에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종옥 신부가 파리에서 북한으로 파견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북한 관리들을 만나 북한 방문 계획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그는 파리에서 한국 가톨릭교회 주교들의 방북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파견되는 것이 좌절되었고 남북한 사이 정치적인 문제로 주교들의 방북도 어렵게 되었다.

결국 남한 가톨릭교회의 노력도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티칸은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한 후 직접적인 통로 마련을 강구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북한과 비공식적인 접촉과 공식적인 교류를 성사시키게 된다.

바티칸은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 북한에 원조를 하여 대화 창구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북한이 바티칸 대표단을 평양에서 열리는 비동맹각료회의에 초대하게 만들었다. 바티칸은 다시 초대의 답례로 북한 가톨릭 신자들을 바티칸에 초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교황과의 알현을 통해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가톨릭교회와의 교류를 위해서는 북한 내 가톨릭교회 단체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북한 당국은 1988년 6월에 ‘조선천주교인협회’를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평양에 장충성당을 설립하였다. 협회는 당국의 정책을 지지하고 선전하는 정치적인 활동과 가톨릭교회에 필요한 서적을 출판하거나 외부 종교 단체들과 교류를 하는 다양한 종교적 활동을 병행하는 양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북한 당국은 평양 장충성당에서 행해지는 종교적인 예식을 존중하며 장충성당에서 신자들은 종교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신자들도 비록 전교활동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들 스스로 모범적인 삶을 지향하며 신자다운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교를 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신자들은 장충성당에 사제가 상주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북한 가톨릭교회 관계자들도 교황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장충성당을 놓고 보면 정치적인 성격보다는 종교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확인할 할 수 있다. 다만 장충성당 신자들은 상주하는 사제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있는 실정이며, 주일에는 사제 없이 진행할 수 있는 공소예절을 평신도인 성당회장이 집전하고 있다.

비록 장충성당이 바티칸이나 남한 가톨릭교회와의 연계 속에서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장충성당이 건립된 직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특사 자격으로 1988년 10월 31일에 장익 신부가 방문하여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장충성당 축성봉헌 미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런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장충성당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시비가 불필요했던 것이다. 이후 재미 한국인 사제들이 방북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드렸고, 문규현 신부도 비공식적으로 방북하여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1998년 최창무 주교가 남북 분단 이후 최초로 주교의 사목적 방문의 성격을 가지고 북한을 방문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런 노력은 2015년 12월의 주교회의 민족화해특별위원회 대표단 방북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조선카톨릭교협회에서 발행한 교리서나 가톨릭교회 관련된 책자들을 보면 정치적인 색채는 드러나지 않고 종교적인 의미가 더 강조되고 있다. 책들의 머리말이나 내용에 김일성 교시가 들어가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북한 가톨릭교회에서 발간한 책들은 정치적인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또한 북한당국이 성당 안에서 북한 체제의 정치적 특성을 드러내지 않고 종교의 존재 양식을 존중하고 있어서 북한당국이 성당을 자율성의 공간이며 의식적, 형식적으로 보장하고 있으며 양해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북한 가톨릭교회의 재출현이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현실적인 의미를 갖추어 나가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제5장 결론

1801년에 평신도들에 의해 북한 지역에 최초로 전래된 북한 가톨릭교회는 일제 강점기 동안 지속적으로 성장하였고 1920년대 들어서 북한 지역에 세 개의 교구가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가톨릭교회는 친일 성향을 보였고 반공주의를 강화하였다. 북한 가톨릭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적지 않은 한국인 신학생들과 신자들의 적극적인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일제의 통치체제를 수용하며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다. 선교사들은 민족주의에 기반한 독립운동보다 교회의 존립과 전교활동을 더욱 중시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가톨릭교회는 공산주의와 조우하며 반공주의를 내면화하였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반공주의를 강화하였던 첫 번째 이유는 유물론적 무신론에 대항하여 신앙을 수호하고자 했던 바티칸의 정책 때문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방침에 따라 일제 강점기의 한국 가톨릭교회 언론은 반공주의를 담은 역대 교황들의 회칙을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두 번째 이유는 1930년에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5.30폭동으로 인해 간도 지역의 연길교구가 받았던 수난과 그로 인한 적대감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의 교회 박해를 직접 경험하면서 반공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가톨릭교회 안에 팽배하게 된 반공이데올로기는 해방 후 분단과정을 거치며 더욱 고착되었다.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주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유화적인 종교 정책을 펼쳤다. 소련 종교정책의 영향을 받았던 북한정권은 반종교 투쟁과 회유책을 함께 사용하는 이중적인 종교정책을 시행하였다. 북한정권을 지지하는 단체를 만들어 공산당 정책을 지지하고 협조했던 타 종교와 달리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북한 가톨릭교회는 공산정권에 비협조적이었고 소극적이며 간접적인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1년 전까지 북한 가톨릭교회는 특별한 박해를 받지 않았고 대체로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1948년 11월부터 북한 공산정권에 의한 가톨릭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북한 정권은 가톨릭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연행, 감금, 처형하였고, 수도원과 성당을 몰수하고 폐쇄하였다. 가톨릭교회가 북한정권에 비협조적이고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탄압의 주된 이유였다. 북한정권은 가톨릭교회를 체제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여 유사시에 정권에 저항할 수 있는 잠정적 위험 요소로 본 것이다. 이러한 탄압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공산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기존의 소극적이고 간접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죽음의 행진에 이르기까지 북한정권의 탄압에 의해 수많은 선교사들과 수도자들이 죽음에 이르렀다. 이 당시 북한정권의 박해는 이념적 갈등이나 대립보다는 전시 상황에서 후방의 안정화라는 측면이 강했다. 한국전쟁 기간을 거치며 북한 가톨릭교회는 공산정권에 의해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고, 그로인해 전쟁 이후에 북한에서 활동을 할 수 있는 단 한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잃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전후 국가 재건이라는 어려움과 북한 당국의 철저한 반종교 선전의 어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전교활동을 하였으며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러던 중 1970년대에 이르러 가정예배처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북한정권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시에 주체사상을 확립해 가고 있던 북한 당국에 의해 종교가 재해석되기 시작하였고, 북한 지도부에 의해 종교의 대외적인 필요성도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하였다. 남한 가톨릭교회와 바티칸도 기존의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북한 당국과 대화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북한 당국과 접촉이 가능해짐에 따라 바티칸은 북한에서 개최된 비동맹각료특별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당시 대표단에 포함된 장익 신부가 북한 교회 신자들을 만난 후 북한 신자들이 교황청의 초대로 로마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북한 당국이 가톨릭교회를 재인식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8년에 북한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재출현하게 되었다. 그해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었고, 평양 장충성당이 건립되었다. 조선카톨릭교협회는 종교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북한 당국의 정책 방향을 따르는 대내외적인 가교 역할을 수행하므로 정치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초기에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1995년 이후에 진행된 남북종교교류를 통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카톨릭교협회와 달리 평양의 장충성당은 처음부터 종교적인 성격이 강했다. 장충성당 신자들은 성당에서의 종교예식을 통해 종교 본연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고, 북한 당국 역시 종교 내적인 문제는 세밀하게 통제하지 않았다. 일례로 장충성당 신자들은 종교행사에 참례할 때 북한 당국의 허용 하에 성당 내에서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착용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일정 부분 종교의 고유성이 보장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편 장충성당 신자들은 북한 체제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신앙을 간직해 온 이들과 북한정권이 성립된 이후에 체제에 협조하며 적응해 온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 모두가 비록 통제된 체제 하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매주 일요일 공소예절에 참례하며 모범적인 삶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북한 가톨릭교회와 교류할 때 조선카톨릭교협회와 장충성당이 갖는 이러한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접근과 교류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조선카톨릭교협회와는 보다 외교적인 차원에서, 장충성당 신자들과는 보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지혜가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평양 장충성당은 남한 가톨릭교회와 북한 가톨릭교회가 사목적인 교류를 넓힐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다. 장충성당의 신자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역경을 이기며 신앙을 지키고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여기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고 있으며,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해 줄 수 있는 사제를 바라고 있다. 남북한 신자들이 속한 정치·사회·경제 체제가 다를 뿐 북한 가톨릭 신자들이 믿는 하느님과 남한 가톨릭 신자들이 믿는 하느님이 다르지 않고 북한의 신자들 역시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쪽 모두 동일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충성당 신자들의 진정성을 신뢰하지 못하는 남한 가톨릭교회 내부의 편견이 바로잡힐 필요가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전래 과정은 다른 나라에 비해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북한 가톨릭교회 역시 그렇다. 따라서 남한 가톨릭교회는 북한 가톨릭 신자들이 장충성당에서의 신앙생활을 통해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신들만의 고유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협력할 필요가 있다. 남한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북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북한 가톨릭교회의 역사적인 변천을 연구함으로써 북한 가톨릭교회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연구는 두 가지의 한계를 가진다. 우선, 개신교, 천도교, 불교와 달리 현재 북한 가톨릭교회의 교세가 약한 이유를 파악하고 비교 평가하는 작업이 연구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향후 북한 가톨릭교회의 활성화를 위해서 이러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 가톨릭교회와의 국내외적인 교류방안 역시 연구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20세기 중반에 공산화되었으나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계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아시아 공산국가로 중국과 베트남이 있고, 1990년대 이후에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체제전환을 이룬 동유럽 공산국가로 독일과 폴란드 등이 있다. 공산화된 이후에도 바티칸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가톨릭 교계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 국가들에 대한 사례 연구가 북한 가톨릭교회와의 교류방안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김연수

예수회 사제, 정치통일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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