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디코즈)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적 주제들 가운데 양심에 대한 강조 만큼이나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킨 것은 거의 없다. 그가 양심을 강조한 것이 가장 뚜렷이 드러났던 것은 교황권고 ‘사랑의 기쁨’에서였는데, 그는 가톨릭교회는 “양심의 대체가 아니라 양심의 함양을” 요청받는다고 했다.(37항) 이에 대해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런 말은 이혼 후 재혼한 가톨릭 신자들이 성체성사를 받을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주관주의로 가는 문을 열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저술가인 오스틴 아이버레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양심은 실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가톨릭의 오랜 가르침이면서도 무시돼 왔던 것이라고 강조한다. “양심”의 위대한 옹호자였던 영국의 존 헨리 뉴먼 추기경(1801-90)을 지난 10월 13일 시성한 것은 이 무시되어 온 가톨릭 전승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손을 대는 것이 얼마나 신학적 깊이가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좋은 기회다. (편집자 주- 뉴먼 추기경의 공식 성인명은 성 요한 헨리코 뉴먼이다.)

성인들은 우리가 보통 나누는 좌파나 우파, 진보냐 보수의 범주로 잴 수 없다. 그리고 뉴먼의 경우에도 당연히 그러하다. 그는 19세기의 영국 지성계의 거성이고 (성공회 사제로서, 교회개혁운동인) 옥스퍼드운동의 주역이라는 사회적 명성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인 1845년에 성공회의 옥스퍼드 대학 대표라는 직위를 버리고 버밍엄의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톨릭 사제였다. 그는 신학과 문학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를 “뉴먼의 공의회”라고 불렀고 제임스 조이스는 뉴먼이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영어 문장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뉴먼은 양심에 관한 신학 논문을 쓴 적이 없지만, 양심이라는 주제는 그가 쓴 많은 위대한 저작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특히 그가 자신이 개종한 이유를 설명한 “자신의 삶에 대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 “동의의 원칙을 지지하며”(Essay in Aid of a Grammar of Assent), “노포크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Addressed to His Grace The Duke of Norfolk on Occasion of Mr. Gladstone's Recent Expostulation) 등이 그러하다. 뉴먼 전에도 가톨릭에서는 양심을 두 측면이지만 하나로 통합해 보는 신학 전승이 있었다. 양심은 첫째로, 진리를 추구하며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인간의 일반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본능적 지향과 연관돼 있다. 둘째로, 양심은 과거에 있었거나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실제적, 구체적인 윤리 판단과 연관돼 있다.

뉴먼은 이 전승을 독특한 방식으로 택했다. 그는 자유, 책임,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양심의 연계성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양심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일반 지향으로서 재구성했다.

2010년 3월 1일, 영국의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무덤. (사진 출처 = NCR)

보수적 가톨릭 신자들은 뉴먼이 양심에 대해 쓴 것이 진리를 강조했다며 찬양해 왔다. 이 진리는 한 사람의 가톨릭 신자가 되는 데서 뉴먼이 발견한 진리와 그가 19세기의 철학적 자유주의에 보이는 상대주의 경향에 맞서면서 옹호한 진리다. 보수주의자들이 그가 교회 안에서 “사적 판단”(private judgment) 또는 양심이라고 부른 것에만 의지하는 것을 거부함을 찬양해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수적 관점에서 뉴먼을 보면 그가 양심을 개인적, 정서적, 사회적, 역사적 세계 안에서 살피고 있음을 별로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주관주의적 “사적 판단”만 강조하기를 거부한 것은 맞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교회 생활 안에서 양심이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톨릭 그리스도교 세계는 종교적 절대주의를 그저 전시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 권위와 사적 판단이 마치 썰물과 밀물처럼 끊임없이 번갈아 오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뉴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슷하게 말한바 상호관계를 일찌기 말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교회와 함께 생각하기’가 오직 교계제도와 같이만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아니다. 교회와 함께 생각하기는 ‘교계적 제도인 성모’를 체험하는 것이며....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서, 목자들과 백성이 함께 사는 것으로....”

게다가, 양심에 관해 뉴먼이 한 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식사 뒤의 건배사에 뭔가 종교적인 것을 해야만 할 상황이라면.... 나는 교황을 위하여 건배를 할 것인데, 그럼에도, 죄송하지만, 나는 양심을 위해 먼저 건배하고 그 뒤에야 교황을 위해 건배할 것이다.”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에 강한 역할을 원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이 말을 안 좋아했다. 예를 들어, 가톨릭 법철학자인 존 피니스는 뉴먼의 건배사는 한 신자의 양심이 교회의 무오류성(교리)의 목적인바 보편적이며 예외 없이 지켜야 할 계명들에 매여야 할 의무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고 말하면서 이런 관점을 드러냈다. 무오류의 윤리적 가르침을 구성하는 무언가 요소가 있다는 피니스의 주장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피니스가 보편적이고 예외 없는 계명들에 매인 양심을 그릴 때 뉴먼이 “모든 구체적 문제마다 당연히 예외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세계에 조응하는 양심을 환기하는 것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1993)에서 주관주의에 대해 뉴먼에 대한 피니스의 비판과 비슷한 비판을 한 데 비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랑의 기쁨’에서 신중한 양심을 높이 평가한 것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조적인 모습을 본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관련해서는, 양심이라는 가톨릭 전승의 재발견은 주관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냐시오 성인이 언제나 더 큰 분이신 하느님(Deus semper maior)과 각 개인이 양심 안에서 만나는 그 직접성을 존중했던 데 바탕을 두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하느님을 찾으려는 선의의 동성애자를 판단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그러한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는) 자신의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다. 하지만 창조 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셨고, 따라서 한 개인의 삶에 영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와의 인터뷰. 2013. 8.)

이 말을 할 때, 아마 그는 뉴먼과 뭔가 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뉴먼은 양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면서 특히 이냐시오가 말하던 여러 주제들을 소환하곤 했었다. “여기서 다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직접적인 종교 행위가 되는 일에서, - 하느님과 (그 인간의) 영혼 사이의 교제에서, 한창 묵상하거나 회개하는 중에, 개과천선하겠다고 결심하는 중에, 성소를 판단하는 중에 - 이러한 때에 그 영혼은 ‘오직 그 홀로와’(sola cum solo) 있는 것이고, 그 피조물과 그가 믿고 사랑하는 대상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은 것이다.”

양심에 관한 가톨릭 전승은 지금 다시 회복되는 시기에 있다. 뉴먼 추기경의 시성은 이 흐름이 튼튼한 신학적 뿌리가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데이비드 디코즈는 산타클라라 대학 마쿨라 응용윤리학센터의 종교/가톨릭 윤리 담당국장이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news/opinion/pope-francis-newman-and-canonization-con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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