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마린)

순교자인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가 5월 23일에 시복되는 것은 그가 엘살바도르에서 1980년 3월 24일에 제대에 선 채 암살 된 뒤로 남미 전역에서 그를 성인으로 기념해 오던 것을 (보편교회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뜻이다. 로메로는 박해의 시기에 자신이 돌보는 양 떼를 지키는 착한 목자로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는 가난한 이를 위해 정의에 투신하는 교회 안에서 주교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델이 되었다. 로메로의 죽음, 그리고 엘살바도르의 민중이 12년에 걸친 내전(1980-92) 중에 겪어야 했던 피의 세례는 당연히 보편교회에 큰 함의를 지닐 수밖에 없고 북미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렇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의 시성을 밀어붙이는 강한 의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으로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에 로메로가 끼친 영향도 드러낸다. 세계 교회가 로메로가 수장으로 있던 엘살바도르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교회의 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는 것이다. 로메로의 이야기는 그 교회가 따라가야 할 지도인 것이다.

이 글은 로메로가 이끌던 교회의 몇 가지 성격을 살펴본다. 그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에 충실하고, 현대세계와 그 경제적, 사회적 투쟁에 온전히 참여하는 교회다. 사회의 주변부에서 잊혀지고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민중에게 다가가는 사목적인 교회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계체제에 도전하는, 예언자적이고 목소리를 내는 교회다.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스스로 실천하고 자신이 기도하는 대로 생활하는, 복음화하는 교회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

로메로 시성의 주 청원자인 빈센초 팔리아 대주교(교황청 가정평의회 의장)는 그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의 순교자”라고 불렀다. 로메로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그들을 억압으로부터 지키기로” 선택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여러 문헌들과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열린 남미 주교총회(1968) 문헌들에서 비롯됐다.

“가난한 이를 위한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구절이 처음 공식 교회언어로 쓰인 것은 메데인 총회에서였다.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 교계제도가 부자와 권력자의 동맹자라고 보는 이들이 많던 당시에 이는 큰 전환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중에 벌어졌던 교회의 본질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는 예수 안에서 하느님이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 이 세상을 넘어선 영생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구원에는 이 세상 안의 억압과 가난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고 사회정의와 인간발전을 위해 투쟁하는 속 하느님의 현존을 포함하느냐는 문제가 있었다.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기쁨과 희망”)은 이 문제에 대해 그 첫 머리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항)

로메로에게는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지금 현재의 현실이며, 역사의 원동력이며, 교회의 각 세대 안에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착한 목자가 자신의 양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듯이, 그리하여 로메로는 교회를 공격하는 세력들에 순응하여 복음을 훼손시키거나 안전을 위해 달아나는 대신에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과 함께 죽기를 선택했다. 메데인회의가 있은 뒤부터, 신학은 역사를 놓고 씨름해야만 했다.

▲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 ⓒJulie Lonneman

역사 안의 교회

1960년대의 식민지 이후 시대(편집자 주-1960년대 초에 아프리카의 옛 유럽 식민지가 대부분 독립하면서 식민지 시대가 사실상 끝났다.)에 개발도상 세계에서 민중해방운동이 크게 불자, 미국은 세계 각지에 공산주의가 침투하고 있다고 보고 전 세계에 냉전적 이해관계라는 틀을 적용시켰다. 이에 따라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복잡한 지정학적, 경제적 세력이 충돌하여 비극적 결과들을 낳는 상황이 형성되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1970년대에 이러한 틀이 형성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따라 교회가 자신의 폭을 넓혀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옹호함에 따라, 기성 체제는 더욱 억압적이 되면서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고 반대자들을 비난했다. 심지어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도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확산시킨다고 비난했다.

로메로는 1977년에 엘살바도르의 수도인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로 선택되었다. 군부의 후원을 받아 몇몇 소수 가문이 운영하는 이 작은 중앙아메리카 나라에서 그는 현상에 도전하려 하지 않을 안전하고, 보수적인 영적 지도자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메로가 대주교로 착좌하고 몇 주 지나지 않아서 대교구의 농촌지역 사제이자 그의 친한 벗인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예수회)가 정부군 병사들에게 죽었다. 농지 개혁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조직화하는 가난한 농업노동자들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로메로는 이 위기 사태 속에서 신실한 사목자이자 민중을 위한 투사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또 몇 달 동안 여섯 명의 사제와 수십 명의 사목일꾼, 교리교사, 독실한 신자들이 죽임 당했다. 한 기자가 로메로에게 당신은 대주교로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시체들을 주워 올린다.”

그는 희생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의 고통의 물속에 자신을 담아 깊이 공감했다. 그는 목소리없는 이들의 소리가 되었다. 주일 강론 기회를 이용하여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고문 받고 실종된 것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긴장은 점점 높아져 내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로메로는 교회 안팎으로부터 그가 “정치에 참견하고” 영혼을 구원해야 할 교회의 영적 사명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로메로가 교회의 가르침을 내버린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았고,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메데인회의의 문헌,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의 여러 회칙을 엘살바도르에 있는 하느님 백성의 현실에 적용하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

로메로가 군부에 의해 지탱되는 엘살바도르의 부유한 소수집단에 도전하기로 결심하자, 그의 운명은 가난한 다수에 속하게 되었다. 대주교로서 그의 재임기간(1977-80)은 비방과 끊임없는 살해 위협을 받는 3년에 걸친 순교가 되었다. 로메로와 엘살바도르의 순교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말하고 일하는 교회가 되는 대가가 무엇인지 드러내 보여줬다.

교회가 역사적으로 부와 권력과 한패였던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교회의 추문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추문은 최근에 바티칸은행에서 비밀계좌와 자금세탁을 청산하려는 노력에서 증명되듯이 지금도 여전히 과제다. 문제는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공동선을 무시하는 불의한 방식으로 얻어진 부를 가지고 자선 활동을 하는 인도주의로 지금도 여전히 교회를 매수하여 침묵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체 인류가족을 위한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는 일에 참여하려는 가난한 이들의 투쟁에 함께 하는 진정한 연대는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긴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사목적인 교회

그러한 교회는 좋은 지도자들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로메로는 자신을 노동자와 학생, 가정, 특히 어린이들과 노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가 하나가 되어 “양떼와 같은 냄새를 내는” 사목자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미지의 모델이 되었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이들은 그를 둘러싸고 껴안는다. 권력의 최정점으로부터 인신공격이 늘어나고 심지어 바티칸으로부터 여러 소리가 나오는 중에, 로메로는 민중 속에서 위로와 힘을 발견했다. 그는 민중 속에서 존 헨리 뉴먼이 “제3의 교도권”-평신도의 경험-이라고 불렀던 것을 발견했다. 이는 교회 교리가 궁극적으로 근거를 두는 “믿는 이의 관점”(sensus fidelium, 또는 신자들의 신심)을 형성한다. (편집자 주- 뉴먼 추기경은 19세기 영국 성공회에서 옥스퍼드 운동을 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나중에 추기경이 된 유명한 신학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에서 스스로 겪은 경험으로 바로 이 지점에서 주교들은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만나고 종으로 봉사하는 지도자로서 신임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체적 교회(collegial church)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합의를 이루려는 대화와 동의어다. 공의회는 네 회기는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이 자신들이 교황과 함께 하는 사도적 파트너라는 역할을 회복하도록 도와줬다. 의사결정 과정은 결과만큼이나 중요하다. 사목 정책을 식별하고 인정함에 있어 모두가 온전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교회로서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로메로는 자신의 성직자들, 그리고 수도자와 평신도로 이뤄진 사목일꾼들과 협의하면서 합의에 의해 이끌어나갔다. 강론을 통해, 그리고 대주교로서 쓴 네 차례의 사목서한을 통해, 그는 위기에 처한 교회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뤘다. 그는 누구나 이해하는 바대로 “모임들의 순교자”였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모든 관점에 지치도록 귀를 기울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모임들을 소집하고 참석했다.

그가 처한 상황의 엄혹함을 의식해서, 그는 모든 것을 기록했다. 자신의 개인적 성찰들까지 포함해서 그는 날마다 모든 것을 테이프 녹음기에 녹음했다. 그는 많은 서류를 남겼는데, 이는 그를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예수회 얘기라면 그냥 따르는 멍청이, 이단자라고 부르던 수정주의자들의 비판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구실을 했다. 그가 남긴 꼼꼼한 기록들을 보면 그가 어떻게 자신의 교회와 함께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로메로는 상명하달식 결정이나 밀실 결정보다는 협의를 더 가치 있게 보았다. 더 나은 사목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정을 주제로 한 2014년 세계주교시노드 임시총회에서 (가정을 가진) 평신도들이 폭넓게 발언할 수 있게 개방하고 참석자들 간의 토론을 권장함으로써 이와 똑같은 원칙을 확인했다.

단체적 교회는 적응보다는 연속성에, 식별보다는 집행에 우선을 두는 교회보다는 더 혼란스럽고 위험스럽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놀라움에 열려 있는 살아 있는 교회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비를 정의와 결합시키고 사랑을 진리에, 이상을 현실에 결합시키는 명백한 역설을 풀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올바른 예배

로메로는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해 대중 예배의 힘을 이해했다. 특히 주일 미사에서 그는 신자들에게 그들이 지닌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세례의 정체성과 친교에 대해 늘 상기시켰다. 그의 강론에서는 성경과 전례력을 민중의 경험 속에 살아 있게 만들고, 그들의 투쟁과 수난을 예수의 투쟁과 수난에 일치시켰다. 폭력이 가장 날뛰던 시기에조차 그는 신자들에게 그들이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느님은 역사 과정을 통해 그들의 순례 여행에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로메로가 죽기 전 마지막 나날들은 사순 시기와 닮았고 성주간을 향해 간다. 그의 장례식은 성지주일에 있었다. 그 전에 했던 마지막 강론에서 그는 요한복음 12장 24-26절의 복음을 다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제의를 다 갖춰 입고 한 작은 병원 경당의 제대에서 선 상태에서, 한 저격자의 총을 맞고 죽는다. 그날 미사의 의미가 그림처럼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방금 전에 선포했던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로메로의 죽음은 그의 사제직을 요약해 보여 주며, 이로써 그는 이미 죽은, 그리고 그가 살해된 뒤 몇 년 간 죽게 될 수많은 순교자들의 사제직에 동참했던 것이다.

전례적으로 정확하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구체적 현실을 담지 못한 예배는 종교를 부적절하게 만든다. 오직 전례가 정의를 실천하고 예수의 삶을 우리의 삶에 연결할 때 전례는 그리스도교적 양성 과정으로서 효과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의 교회를 바로 이러한 연결고리를 만듦으로써 재복음화하고자 한다. 그는 그가 날마다 드리는 미사에서 자신이 설교하는 거룩한 독서 구절들에서 자신의 교황직의 길을 쓰고 있다. 말과 모범으로써, 교회 생활은 전례력 안에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펼쳐지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선포되고 있다.

회개하라는 요청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역사의 교훈이 이 새 성인이자 순교자인 이에 대해 알고자 하는 북미 가톨릭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로메로의 시복으로 세계의 눈길은 엘살바도르에, 그리고 “오스카르 로메로는 누구이고, 누가 죽였으며, 왜 그랬는가?”라는 질문에 쏠릴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 저질러진 범죄들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여전히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성을 만들었던 여러 요인 가운데 미국이 오랫동안 관여해 온 역사가 포함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은 우리 미국의 국익에 따르지 않는 정부들을 전복시켰고, 냉전 수행에 협조하는 썩은 독재 정권들을 지원했다.

이 틀 안에서, 미국은 엘살바도르에서의 내전에 자금을 댔다. 7만 5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미군이 훈련시키고 자문해 줬으며 미국 무기와 비행기, 헬리콥터로 무장한 엘살바도르 군인들은 엘모소테와 숨풀 강 지역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이들을 수없이 학살했다. 1989년에는 수도인 산살바도르에 있는 한 예수회 대학 구내에서 예수회원 6명과 그들을 돕는 집안일꾼과 그녀의 딸을 죽인 정예부대 병사들은 아메리카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막 돌아온 이들이었다. (편집자 주- 아메리카 군사학교는 미국이 중남미 여러 나라의 군인들을 훈련시켜 좌익 게릴라 진압을 도우려고 파나마에 세운 학교로 악명을 날렸다.)

로메로가 성인이 되기 위해 걸은 길은 우리에게 우리 나라 미국이 세계에서 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잘 알도록 요청하고 있다. 로메로가 전하는 평화와 화해, 정의와 자비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보내는 것이다. 더욱이 로메로는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체 교회를 이끌겠다고 말했던 그 방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과 우리의 선출된 정부가 전진하면서 어떤 역할을 할지는 우리가 마음 깊숙이 어떤 변화를 겪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세계의 가난한 이들의 등 위에 건설된 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경제 체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생존이 위험에 처해 있다. 변화에는 세계 각지의 우리 형제자매들과 더 큰 연대를 하겠다는 우리의 회개가 대가로 필요하다. 지금과 다른 세상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역사의 진로를 더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쪽으로 돌리려면 헌신하는 세계교회가 필요할 것이다. 로메로와 엘살바도르의 민중은 그러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굳센 의지로써 우리 모두를 그 일에 참여하도록 부르고 있는 것 같다.

복자 오스카르 로메로와 엘살바도르의 순교자들이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소서.

(팻 모린은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NCR)의 자매지인 <셀리브레이션>(Celebration, 기념)의 편집장이다. 이 글은 <셀리브레이션> 2015년 6월호에 먼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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