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교회 내 미성년자 보호 위한 회의”

교종, 미성년자 성학대 해결 위한 기도 요청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 17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연중 제6주일 삼종기도에서 바티칸 ‘미성년자 보호위한 회의’ 앞두고 신자들의 기도를 요청했다. 이날 교종은 21일부터 24일까지 전 세계 주교회의 의장과 수도회 장상들이 이번 회의를 위해 바티칸에 모이게 될 것이라며 “우리 시대의 시급한 도전에 직면해 확고하게 사목적 책임을 지는 행위”가 되길 바라는 이번 회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초대했다. 이번 회의는 본회의, 실무회의, 공동기도, 피해자 증언, 참회예식, 폐막미사로 구성된다. 교종은 회의 전체 일정에 빠짐없이 참여한다. 이에 앞서 바티칸 공보실은 “이번 회의 목표는 참석자 전원이 ‘미성년자 성학대‘라는 전 세계적 문제를 예방하고 맞서 싸우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있으며, 프란치스코 교종도 전 세계적 문제는 전 세계적 대응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계신다. 교종께서는 이번 회의가 학술회의가 아닌, 기도와 식별과정으로 특징되는 교리적이고 실무적 차원의 ‘사목자들의 회의’가 되길 바라고 계신다.”고 발표했다. 회의는 2월23일 토요일 참회예식을 거쳐 24일 주일 폐막미사로 끝난다.

 

성직자 미성년자 성학대와 맞선 교회의 여정

교회 내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회의를 앞두고 성직자에 의한 성학대 문제와 맞서 싸웠던 역대 교종과 바티칸, 지역교회의 행보를 돌아본다. 이번에 열리는 ‘교회 내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회의’는 각국 주교회의 의장과 수도회 관계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는 유례없는 ‘시노드적’ 성격을 지니며, 복음의 관점에서 성학대 사안을 바라본다. 또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성직자들이 저지른 학대의 재앙과 맞서 싸워야 할지를 토의하게 된다. 이번 회의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최우선 순위로 놓은 사안이다. 회의는 희생자들의 증언, 사안에 대한 경각심 고취, 성학대 사안에 대한 지식 쌓기, 새로운 기준과 절차를 만들기, 모범사례 나누기 등으로 이뤄진다. 바티칸과 주교회의의 이러한 노력은 처음은 아니다. 이미 캐나다, 미국, 아일랜드, 호주 등에서 30여 년 전부터, 유럽에서도 10년 전부터 이런 역사적 단계를 이어왔다. 그 여정은 이번 2월 바티칸 회의 후에도 이어질 것이다. 성직자들이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학대사례를 모아 교회법을 재정비하는 것은 18년 전 바티칸에서 시작됐다. 지난 20여 년 교종들은 이 고통스러운 주제에 대해 셀 수 없이 행동하고 연설하고 문헌을 작성하는 등 노력해 왔다. 새로운 기준이나 규정이 학대에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인식의 변화를 항상 가져온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이번에 소집한 2월 회의가 미성년자 보호를 위한 교회노력의 ‘원년’은 아니다.

1987년 캐나다 주교회의는 세계 최초로 교회 안에서 발생한 미성년자 성학대 사건들을 수면 위로 올렸다. 성직자들의 미성년자 성적학대 내용이 알려지자 여론은 흔들렸다. 1989년 캐나다 교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를 통해 1992년 ‘고통에서 희망으로’라는 문헌이 발행됐다. 이 문헌은 가톨릭신자, 주교, 신학생 양성책임자들을 위한 50개 권고문을 담고 있다. 또한 미국 주교회의는 1992년 6월 정기총회에서 성직자에 의한 미성년자 성학대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뤘다. 그때 ‘5가지 원칙’들이 세워졌다. 5가지 원칙에는 ‘혐의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 범죄혐의자는 즉시 사목활동에서 물러나고 ‘합당한 심판’과 ‘의학적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포함돼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이 문헌이 발표됐음에도 성직자들에 의한 미성년자 성학대 사건은 그 수가 점점 늘어 정점을 찍었다. 이에 2002년4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미국 추기경들을 로마로 소집했다. 1994년 아일랜드 교회는 사제와 수도자들에 의한 아동 성학대 문제를 위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듬해 12월 이에 대한 첫 보고서를 발표했다. 호주교회는 성직자에 의한 아동 성학대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교구차원의 첫 번째 안을 발표했다. 1996년 12월 ‘치유를 위하여’라는 문헌이 호주의 전 교구에서 승인됐고 1997년 3월부터 시행됐다.

21세기 이르러 바티칸은 라칭거 추기경(후 베네딕토 16세)의 노력으로 학대에 대한 교회법 재정비를 마쳤다. 재정비된 교회법에는 한층 높아진 징계와 절차, 권한이 포함됐다.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반포한 자의교서 ‘성사의 성성 보호’에는 ‘가장 중대한 범죄’들로 불리는 성직자에 의한 미성년자 성학대 문제가 신앙교리성 주관 하에 심판될 것이라는 지침을 포함하고 있다. 2010년 베네딕토 16세 교종도 신앙교리성을 통해 ‘중대한 범죄에 관한 법’을 반포하고 ‘사법권 없는 법령’을 도입하여 아동 포르노 범죄를 포함한 모든 범죄에 10년에서 20년까지 정직기간을 늘리며 심판절차에 속도를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교회는 이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지침들을 2002년 발표했다. 하지만 2010년 베를린에 위치한 예수회 카니시오 대학에서 있었던 사건은 독일 주교회의로 하여금 규정을 재정비하고,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확대하도록 촉구했다. 2009년 아일랜드에서는 특별국가위원회 작업이 있은 후 학교 내 학대문제를 다룬 ‘라이언 보고서’와 더블린대교구 아동학대 문제를 다룬 ‘머피 보고서’가 발표됐다. 이 보고서들은 교회가 학대문제를 다뤄온 방식의 결점들을 집중 조명했고 베네딕토 16세 교종은 아일랜드의 주교들을 모두 로마에 소집했다. 2010년3월 교종은 아일랜드 전 신자에게 사목서한을 보냈다. 서한에서 교종은 신뢰를 저버린 이런 행위에 대해 진정으로 복음적이고 정의로우며 효과적인 방법이 취해지기를 요청하면서 2010년11월부터 2012년3월까지 아일랜드에 사도적 순방일정을 수립했다. 베네딕토 16세 교종은 2008년부터 미국, 호주, 영국, 몰타, 그리고 독일을 방문할 때마다 학대 피해자들을 만났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베네딕토 16세의 행보를 이어 갔다. 교종은 숙소인 산타 마리아 집에서 개인면담을 포함 피해자들과 꾸준히 만남을 이어 왔다.

또 하나의 중요한 단계는 2011년 5월 신앙교리성이 발표한 회람이다. 회람은 각국 주교회의가 학대 사건과 피해자들의 도움과 관련된 지침들을 만들도록 요청하는 한편 각 교구 내 조치들이 지역 내에서 조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지침을 제공했다. 이 회람은 성직자 성학대 범죄를 다루는 교구장 주교의 책임을 부각시켰다. 각국 주교회의와 수도회 장상연합회가 지침을 만드는 것을 돕기 위해 바티칸은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주제로 2012년2월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심포지엄은 이번 2월회의, 곧 110개 주교회의 대표와 35개 종교교육기관 총장들과 함께할 바티칸 회의와 동일한 국제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당시 심포지엄은 미성년자 보호를 위한 센터 개관을 발표하며 마무리됐다. 그 센터는 현재 그레고리오 대학 한스 졸너 예수회 신부 지도하에 학대방지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재임시기에 학대를 예방하고 맞서 싸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2013년12월 출범한 교황청 미성년자보호위원회다. 이 위원회의 업무는 지침들을 위한 사례를 만들고 새로 서품된 주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며, 학대 피해자를 위한 기도문을 준비하는 일 등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학대문제에 대한 교회법과 규정, 절차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 첫 단계는 2016년6월 발표된 자의교서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다. 이 교서는 학대문제에 대한 교회 책임자들의 책임을 묻고 있다. 또한 성학대를 당한 미성년자들에 대한 문제에 ‘태만’하다고 여겨지는 주교들은 교회법적으로 직무에서 해임될 수 있다고 말한다. 2014년11월 교종은 ‘가장 중대한 범죄’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조사하기 위한 신앙교리성 조직을 구성해 찰스 시클루나 대주교에게 맡겼다. 조직의 목적은 미성년자 학대사건들에 대한 신속한 조사다. 미성년자 보호를 위한 교회의 노력은 교회가 더 이상 교회 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사회전체와 협력하는 것으로 시야를 확장해갔다. 교종은 2017년 10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기획한‘디지털 세계에서의 아동인권’ 국제회의에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2018년1월 프란치스코 교종은 칠레 사도적 순방 중 2011년 바티칸으로부터 유죄처분을 받은 페르난도 카라디마 신부사건으로 발생한 칠레교회 분열을 마주했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2월부터 진행됐고 4월 교종은 칠레주교단에 “진실된 정보의 부족으로 이 사건에 대한 판단에 심각한 오류”를 발견했다는 서한을 보냈다. 교종은 칠레주교단을 로마로 불렀고 이 만남의 끝에 모든 주교가 교종에 사임을 요청했다. 사임은 일부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상황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최근 사목문헌에도 영향을 끼쳤다. 2018년 5월 교종이 쓴 “칠레로 가는 길 위에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보낸 편지에는 학대 피해자들이 보여준 용기와 학대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던 성직주의에 맞서온 하느님 백성의 투쟁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있다. 2018년8월 교종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학대와 권력에 의한 학대, 그리고 양심을 저버린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학대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성직주의에 대해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종은 2018년8월 세계가정대회에서 마땅한 분노를 일으키고 고통의 원인과 가톨릭 공동체에 수치심을 남긴 이러한 심각한 범죄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교회책임자들의 실패를 언급했다.

 

“전쟁의 대가는 약자들이 치릅니다”

교종, 2월 19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 19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하느님은 관념을 통해서가 아닌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교종은 세상의 재난과 박해 받는 사람들과 ‘사탕처럼’ 폭탄이 퍼붓는 전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울 수 있는 은총을 그분께 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종은 온 세상을 뒤덮은 노아 시대의 홍수와 오늘날 전쟁 속에서 ‘축제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굶주린 어린이들과 고아들, 가장 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떠올리며, 창세기가 들려주는 내용과 가장 가까운 현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교종은 하느님의 마음과 닮은 마음을 가지라고 격려하면서 하느님께서는 괴로워하시고 화를 내실 수 있지만 무엇보다 형제들에게 형제가 되고,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인간적인 마음과 신적인 마음을 가진 분이시라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오늘 제1독서(창세 6,5-8; 7,1-5.10)에는 인간들의 사악함 앞에서 하느님의 고통과 인간들을 지상에서 쓸어버리겠다고 약속할 정도로 인간을 창조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후회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추상적이고 순수한 관념이 아닌 감정을 가지신 분이시며, 고통을 겪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점이 주님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감정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사랑은 하나의 관계입니다, 화내고 분노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고통을 통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고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관념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어루만져 주실 때는 마음으로 보듬어주시고 때리실 때는 좋으신 아버지의 마음으로 때리시며 우리보다 당신이 더 많이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우리 시대는 노아의 홍수의 시대보다 나은 게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관계란 ‘마음과 마음의 관계, 마음을 여시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분이 당신 마음으로 고통스러워하실 수 있다면 우리 또한 그분 앞에서 아파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감상주의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노아의 홍수시대와는 같지 않고 문제들, 재난들, 가난한 사람들, 어린이, 박해 받는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으며, 사탕처럼 폭탄이 퍼붓기 때문에 전쟁에서 죽어갑니다. 우리 시대가 노아의 홍수시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난은 똑같고 희생자들도 거의 같습니다. 예컨대 가장 약한 사람들, 어린이들을 생각해봅시다. 굶주린 어린이들의 수, 교육받지 못한 어린이들의 수를 보면 그들은 평화 속에 자랄 수 없습니다. 전쟁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모 없이 자라납니다. 무장한 어린이들, 그런 어린이들만이라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처럼 울어야 합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은총은 하느님 마음과 닮은, 하느님과 같은 마음, 형제들에 대한 형제의 마음,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 마음, 아버지들에 대한 자녀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같은 인간적인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홍수의 대재앙이 있고, 약한 자들, 가난한 사람들, 어린이들,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 이들이 소수의 ‘축제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오늘날 전쟁의 대재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마음으로 아파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말씀드립시다. “주님, 이런 일들을 보십시오.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합시다. 주님을 위로해 드립시다. “저는 주님을 이해하고 주님을 동행하겠습니다. 저는 기도 중에 주님과 함께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작품을 파괴하려 드는 홍수의 결과인 이 모든 재앙을 위한 기도에 주님과 함께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주께서 물으신다. 네 형제(아우)는 어디에 있는가”

교종, 2월 18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 18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이날 1독서인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카인에 물으신 “너 어디 있느냐?”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 물음들은 오늘날 우리를 향한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주님께서는 굶주리고 병들고 갇힌 형제가 우리 마음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론 내용.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편한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협하는 답변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답해야 합니다. 그분이 물으시는 우리의 형제는 마태오복음 25장에 등장하는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린 형제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창세 4,1-15.25)에서 제시된 카인과 아벨의 사건은 성경에서 여러 번 되풀이되는 장르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를 ‘불편한 질문과 타협의 답변’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고 하신 질문은 “난처한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소 타협적이지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제 아우의 삶에 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저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통해 카인은 하느님의 눈길을 피하려고 애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신 ‘불편한 질문’들을 잠시 묵상해 봅시다. 예컨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고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마지막에는 베드로가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더 이상 알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8,28) 여기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은 ‘난처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불편한 질문입니다. 묻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삶입니다.” “저는 그의 삶을 존중하지만 깊이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의 삶에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각자 자신의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어떻게 이 불편한 질문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마음속에 있는 전부를 말하지만 아무 의미 없이 대답하는 다소 일반적인 원칙으로 대답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각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아마 정신없는 사람은 그가 아내와 함께 집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질문은 굶주리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형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그런데 네 아우는 굶주리고 있다!” “네, 네, 분명히 본당 카리타스회에서 준비한 점심식사에 왔었죠. 봉사자들이 그에게 먹을 것을 줄 겁니다.” 이런 타협의 대답을 통해 우리는 체면을 세웁니다. “그렇다면, 병든 이웃은?” “그 사람은 병원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병원에는 자리가 없구나! 약은 있느냐?” “하지만 그 사람 일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약을 줄 친척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감옥에 갇힌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아, 그 사람은 자기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가 행한 일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는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범죄자들로 피곤합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마 여러분은 이러한 대답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형제는 어디 있습니까? 노동법으로 보장되지 않은 일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1년 중 9개월 일하고 3개월 후에 다시 그러한 1년을 맞이해야 하는 당신의 형제는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그는 아무 사회보장도 없이, 휴가도 없이 일합니다. “에이,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일뿐이지 그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 이런 것은 또 다른 타협의 대답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네 형제는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시며,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언급하신 이들을 형제의 범주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곧, 병든 사람,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입을 옷이 없는 사람, 학교에 갈 수 없는 어린 형제, 마약 중독자, 감옥에 갇힌 사람, “그들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 안에 여러분의 형제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이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약간의 자선을 통해 우리는 양심의 부담을 덜어냅니다. 그러나 마치 공산당이 하는 것처럼 돼버리는 따라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러한 교회의 사회참여적인 일들을 통해 그들은 제발 너무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 말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아우)는 어디 있느냐?” 중요한 것은 주님입니다. 우리는 타협의 답변을 하는 것에,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문제를 제대로 보지 않기 위해,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답변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언급하신 우리 주변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해 보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두운 삶’을 형성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듯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창세 4,7)이고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을 생각하지 않은 채 우리가 이 어두운 삶을 영위할 때, 문 앞에 죄악이 도사리고 앉아 들어오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곤 우리를 파괴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또 다른 질문, 곧 아담이 죄를 지은 후 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질문은 우리에게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아담은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숨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수치심을 느껴야 할지도 모릅니다. “네 형제(아우)는 어디 있느냐? 너는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까? 이런 일들, 이런 고통들, 이런 아픔을 알아차리지 못합니까? “네 형제(아우)는 어디 있느냐?” “너는 어디 있느냐?” 형제자매 여러분, 현실로부터 숨지 마십시오. 주님의 이 두 가지 질문에, 솔직하게, 오히려 기쁨으로, 숨김없이 대답해야만 합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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