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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날아올라’: 천호동 성매매 집결지 화재 1주기를 맞아[특별기고 - 조현철]

우리는 어떤 사물, 사건, 사람을 파악할 때 ‘범주(카테고리)’라는 것을 많이 사용한다. 범주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 사람’이 누구인지 효율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닭’은 산란계와 육계로 나뉘고, 사람은 다양한 직업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범주로 분류되고 나면 하나의 고유한 존재는 구체성을 잃고 일반화, 추상화된다. 그래서 범주는 그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가능성도 크다. 편리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총애”로 아들을 잉태하였다.(루카 1,26-38) 하지만 ‘처녀 임신’은 부정한 사건이고 마리아는 불륜을 저지른 여인으로 규정된다. 마리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구체적인 ‘처지’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하느님 앞에서 “흠 없이” 살아왔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인 임신’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꼴불견에 속하는, 숨겨야 할 그런 것이었다. 엘리사벳은 5달 동안 숨어 지내야 했다.(루카 1,5-25) 극도의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지 못해 한평생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치욕의 시간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범주란 그렇게 작용하기 쉽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범주는 더욱 그렇다. 이 범주로 분류되는 순간,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은 사라진다. 인간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와 인권도 무시되기 일쑤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낙인이 그렇게 해도 된다고, 정당화해 준다. 글자의 뜻과는 사뭇 다르게, 성매매 여성들은 몸을 파는 노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사연으로 인하여, 여성의 ‘몸’을 매개로 한 비정한 먹이사슬의 일부가 되어 착취의 대상으로 고달픈 삶을 이어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성매매 여성’이라는 범주에는 ‘그래도 되는’ 그런 사람들, 불이 나서 타 죽어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들어 있다. 1년 전 천호동 성매매 집결지 화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 특히 법을 집행한다는 기관인 경찰, 검찰, 법원의 행태가 이것이 사실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법은 탁상공론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과 체험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법은 약자의 편에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원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성매매 여성이니까.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2018년 12월 22일에 화재 사고가 난 천호동 현장. 창에 쇠창살이 있고, 일부 창문은 콘크리트로 막혀서 탈출과 구조가 어려웠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성경은 다르다. 성경은 범주로 사람을 쉽사리 재단하지 않도록 한다. 예를 들어, 성경은 극도의 가부장 사회인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여성, 특히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정상적이 아닌 처지의 여인들을 구원사의 족보에 버젓이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특정 범주와 거기에 들어 있는 선입견으로 쉽사리 단정하지 않도록 한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마태 1,1-16)에는 마리아에 앞서 여인 세 명이 등장한다. 라합, 룻, 밧세바다. 밧세바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는 권력자 다윗의 탐욕으로 몸을 빼앗기고 남편을 잃어버린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은 들어 있지 않다. 룻은 모압 출신의 여자, 곧 이방인이다. 하지만 이방인이라는 범주에는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라고 말하던 딸 같은 며느리의 따뜻한 마음은 담겨 있지 않다.

‘라합’은 ‘창녀’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척후병들에게 이렇게 청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에게 딸린 모든 이를 살려 주고 우리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해 주십시오.”(여호 2,13) 더 이상 구체적인 상황은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라합은 자신의 생업으로 자기 가족의 생계를 꾸려 왔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우리는 선입견에 바탕을 둔 판단을 멈추고 라합을 창녀가 아닌 ‘사람’으로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창녀 라합이 아니라, 창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인 라합을 보게 된다. 우리는 모른다. 성매매 여성들이 왜, 어떤 연유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스스로 원해서, 자신의 몸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런 일을 시작한 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 사연 앞에서 우리는 멈춰 서야 한다. 성매매로 버텨 온 그 사람의 삶, 거기에 딸려 있을지 모르는 연약한 다른 삶들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

“하느님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경의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다. 죄로 물든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은 끊이지 않고, 면면히 흐른다. 특히 세상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중에서도 더 보잘것없는 여인들을 통해서 흘러 왔다. 가브리엘 천사는 예루살렘이나 로마가 아닌, 세상의 구석진 곳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을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루카 1,35) 하느님은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은 그런 곳에 계시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하느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이 계신다고 우리에게 알려 주신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천호동 성매매 집결지 화재는 신학적 질문이 된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에게 신앙의 도전이 된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하느님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힘없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심지어 생명을 잃어도 세상은 관심을 잘 보이지 않다. 천호동 화재 같은 사건의 희생자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잊지 않고 기억하고,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다. 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던 예수와 함께했던 여인들, 예수의 무덤을 다시 찾았던 여인들이 있었다고 전해 준다. 이들은 하느님이 계신 곳에서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한 사람이다. 천호동 성매매 집결지 화재사건 이후 꾸려진 ‘공동대책위원회’도 세상이 외면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자들과 함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기에 틀림없이 계시는 하느님과도 함께했다. 지난 1년, 하느님은 희생자들의 억울함과 아픔을 기억하며 함께하는 공대위의 모든 노력과 헌신을 기쁜 봉헌으로 받아들이실 것이다. 희생자들을 잊지 않으시는, 품어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희생자 두 분도 기뻐하셨을 것이다.

천호동 화재 사건은 우리 사회가 낮은 곳, 가려진 곳, 그늘진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성숙한 사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하길 바라시는 일을 우리 각자가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끊임없는 회심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이미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것은 놀라운 일도,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번제물도 아니고, 1년 된 어린 송아지도, 수천 마리 숫양도 아니다. 그것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미카 6,8)

1년 전, 창문마저 시멘트로 메워 버린 ‘갇힌 곳’에서 화재로 숨져 간 두 ‘사람’, 이제는 자유롭게 날아올라 하느님 품 안에서 평안하길 기원한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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