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오늘의 질문에 대해 제가 교회를 대표해서 드릴 답은 딱히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 차원의 이해는 나눌 수 있겠습니다. 

오늘의 질문은 매우 강하게 다가옵니다. 가난한 교회들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는 가난해 보이질 않기에 교회의 현실에 대해 자문하게 만듭니다. 교회는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검소하게 사는 수준에서 삶을 영위할 수는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사회복지 시스템이 지향하는 수준의 가난이고, 이 수준 아래에 있다면 가난이라기보다는 빈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빈곤은 당장 내일 먹을 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평균적으로 사회복지 시스템이 지향하는 수준의 가난으로 내려가고,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이 빈곤을 벗어나 비슷한 수준의 가난에 합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검소한 삶’ 정도의 가난 수준에서 만나는 꿈을 꿔 보는 겁니다.

교회는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구호소나 고아원 등의 시설을 교회가 운영해 왔음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즉, 교회로 들어오는 헌금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분배되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빈곤을 겪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 독립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데는 역부족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도록 했던 노력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이미지 출처 = Pxhere)

교회가 가난을 강조하고 가난한 이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배경에는 우선적으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이 자리합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쌓아 놓은 재산을 가지지 않으셨으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통해 분배정의를 강력히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이런 복음을 통해 보더라도 예수님은 빈곤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져야 할 것들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대표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려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서약하며,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 자발적 가난은 현실적으로 생명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빈곤의 상태에 놓인 이들입니다. 즉,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강요된 가난과 그 희생자들입니다. 이런 가난은 개인의 삶을 파괴합니다. 교회는 이런 희생자들의 삶을 동반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지속하게 됩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교회는 가난해질 것이고, 빈곤한 이들은 ‘가난’의 수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져야 할 선물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이 가진 것을 나눠 가난함을 지향한다면, 교회는 말 그대로 복음이 머무는 곳이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이상을 실현하고자 교회가 움직여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교회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상을 상실한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죄를 저지르는 집단이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이 말했듯이,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보물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장 멋지게 보이는 일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임을 교회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모든 이들이 그 고귀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야 하는 책무가 교회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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