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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통해 현실을 읽는 젊은이들 [책장을 넘어 세상으로 17]

2018년 봄은 겨우내 얼었던 산천이 녹아내리며, 그 물들이 모여서 바다를 향하듯 우당탕탕…. 막히고 왜곡된 역사의 흐름에 저항하고 그 흐름을 제 길로 돌리려는 힘들이 요란스럽게 부딪히기 시작한 시점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수업에서 스무 살의 청년들이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 "하느님과 인간"을 만나면서 자신과 공동체를 성찰하는 모습을 나누려고 한다. 문제를 만들고 답을 찾는 그들의 노력에 공감하는 것은 함께 지평을 공유하기 위한 작업이 될 것이다. 또한 세상의 문을 여는 청년들이 인식하는 방향에 공감하는 것은 함께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시작이 될 것이다.

논제 1.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신학적 관점에서 바람직한가? 즉,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만약 바람직하지 않다면 신학적 관점에서 추구되어야 할 정신은 무엇인가?           

“복음의 고유한 원칙은 전체성이다”. '복음의 기쁨'을 읽던 중 내게 들어온 문장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부분의 합보다 전체가 훨씬 크며, 세세한 부분에 매달리지 않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내게는 이런 주장이 생소하게 들렸다. 마치 전체를 위한 일이라면 작은 부분들은 무시되어도 무관하다는 뜻처럼 해석되었다. 동시에 수업시간의 강의 내용도 떠올랐다. 교수님은 “대의를 위해서 소수는 희생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하지만 정말 신학적 관점에서 대의를 위한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킨 사례는 과거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나치즘 파시즘은 물론, 일본의 군국주의까지 역사는 약자들의 희생의 연속이었다. 그들에게 큰 뜻이란 무엇일지 의문이다. 강요에 의한 화친이나 단순한 폭력의 부재 상황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신학적 관점에서는 “온전한 개인의 발전에 의한 통합이 아니라면, 이는 결코 진정한 통합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억지로 누르는 통합과 평화는 종교적 의미의 평화로 볼 수 없으며, 이는 단언컨대 거짓된 평화다. 여기서 우리는 대의를 위한 희생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은 어떤 것일까?

‘공동선’이 그 해답이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공동선을 정의하고 있다. “공동선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 완성을 추구하여 완전한 형태로 통합시키는 사회생활 조건이다.” 또한 공동선은 가톨릭 사회교리의 중추다. 이 정신은 소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와 소수를 함께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윈윈(Win-Win) 전략으로 발현된다. 또한 공동선은 현대에 갑자기 나타난 개념이 아니다. 과거부터 인간들은 공동선의 개념을 실현시켜 왔다. 공동선이 현대사회에 적용되기 위한 조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단순한 힘의 균형으로는 공동선을 이룩할 수 없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약자 또한 잘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재화의 분배상황으로 확장시켜 보자. 교황 비오 11세는 “창조된 재화의 분재는 공동선과 사회정의에 합치되어야 한다. 성실한 관찰자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를 가진 소수와, 가난하고 굶주리는 다수의 차이가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안다”고 하였다. 이처럼 공동선의 정신은 약자와 소수를 같이 잘살게 하고자 한다. 하느님 또한 어느 인간 하나 잃어버리지 않으시고자 한다. “길 잃은 양 하나를 도로 데려오려고 하시는 아버지 착한 목자의 기쁨”이라는 성경 구절로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상관없다는 정신보다 모두를 위하는 정신이 신학적 관점에서 더욱 바람직함을 알 수 있다. 얼핏 전체가 중요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해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하나하나가 고유의 가치를 실현시킬 때 비로소 부분의 합보다 전체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기쁨'에 쓰인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우리의 모델은 구면체가 아니다. 구면체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같은 점들의 집합이다. 우리 사회의 모델은 다면체다. 각기 크기도 거리도 다른 것들이 한데 모여 집합을 이룬다. 다면체는 모든 부분의 집합이고, 각 부분은 그 고유성을 간직한다."(236항. 편집자 주- 이 인용문은 주교회의 공식 번역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동선은 이들을 온전하게 통합하는 것이다.

기쁨 (이미지 출처 = svgsilh.com)

논제 2.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가르침을 통해 알아보고, 여기에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중요성에 관해 서술하라.

서론: 과학기술이 가져온 풍요로움은 인간 사회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회로 만들었다. 절대적 가치를 찾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발전의 이면에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숨어 있다. 생물학의 발전은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신비함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실제로 인간과 침팬지의 염기서열은 99.9퍼센트 동일하다. 단 0.1퍼센트의 차이가 인간을 신비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을 어떻게 살지 바꿀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갖게 되었다. 희망을 되찾기 위해서 '복음의 기쁨'과 "하느님과 인간"을 통해서 그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 갖는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본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을 해방시켰고, 인간은 자유로워졌다. ‘자유’는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분되는 특성이다. 인간이 자유로워질 때,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자유로운 인간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자기 완성을 위해 노력한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며, 자기완성에서 복음의 통 큰 신앙 체험은 도움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1항)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복음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의 기쁨은 공허한 마음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복음을 읽지 않기에 기쁜 소식은 전해지기 힘들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마음의 소리에 집중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부와 기술력을 갖는 데 필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가 정한 안정적이고, 남들이 중시하는 가치를 자신의 가치라 믿고 살아간다. 남이 정한 가치를 위해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서 개개인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 십자가를 질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모든 현대인들은 삶의 무게를 진 채 살아간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이웃도 있고,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도 있다. 그중 가장 헤아리기 힘든 것은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처럼 소수자가 겪는 고통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서 보이지 않으며, 그들의 입장이 되지 않고는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진정한 사람을 베푸는 것이 대단한 이유다. 교황은 한국을 방문할 때에도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먼저 찾아가 사랑을 보였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며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주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에는 남을 위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부활로 가는 길이며, 이 길의 끝에는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도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갖고 십자가를 진 채 나아가자. 이 길의 끝에는 기쁜 소식이 있을 것이라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예수는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기도하는 삶은 희망하는 삶이다. 예수는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 달라 기도했지만, 수난이 찾아왔을 때에도 기도했다. 또한 자기 생애의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면 항상 기도했다. 이해인 수녀는 ‘희망은 깨어 있네’라는 시에서 암에 걸린 고통 속에서 노래했다: 나는 오늘도 숨을 쉽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노래를 부릅니다.

나아질 내일을 희망하며 기도하는 것은 고통 속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희망이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희망이란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지 지금 나의 참을 수 없는 상황이 결정적일 수 없다는 은밀한 확신을 내가 갖는 것’이라고 했다. 즉, 희망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는 것이다.

결론: 예수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하느님을 의식했다. 그 결과 그의 행동에는 자비와 사랑이 넘쳐났다. 우리도 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동체, 친구와 연대할 때, 희망을 찾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희망은 같이 찾을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친구로서 함께한다면 사회 안에서는 희망이 싹틀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희망을 찾느냐고 묻는다. 예수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 몸 안에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고 하였다. 알게 모르게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걱정과 감정의 찌꺼기는 버리는 것이다. 하늘 한 번 보기 힘든 하루하루다. 그래도 넓은 하늘에, 혹은 지하철에서 만나는 한강에다 걱정과 찌꺼기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연대하여 희망을 찾자. 희망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숨어 있는 희망을 꺼내 모두가 함께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랑 (이미지 출처 = Pixabay)

논제 3. 우리는 차별과 증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차별과 증오는 최근 우리 사회를 가장 만연하게 채우고 있는 문제다. 우리가 접하는 뉴스 기사에는 매일 차별과 증오로 인한 사건들이 가득 실려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차별과 증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정립해 놓지 않으면 스스로가 그 감정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미리 그 태도를 정립하고자 한다.

차별과 증오는 일견 아주 다른 개념인 듯하다. 차별의 사전적 정의는 ’같은 것을 자기만의 기준으로 나누어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고, 증오는 ‘무언가를 아주 미워함’이다. 그러나 사회적 측면에서 봤을 때, 두 개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스스로가 만든 기준에 따라서 사람이 아닌, ‘어떤 것’으로 보는 차별적 사고는, 심화되었을 때 증오로 표출된다. 즉, 증오의 시작은 차별적 사고이고, 차별적 사고는 증오의 시발점인 것이다.

이런 차별의 예로 최근 논란이 된 다산신도시 택배사건이 있다. 해당 아파트는 평소에 단지 내에 차가 다니지 못하는 구조인데, 택배차량 등 특수한 목적을 가진 경우에만 통행을 허용했다. 그러던 중 사고로 어린이가 다칠 뻔한 일이 있고 나서, 해당 아파트는 택배차량의 통행 또한 금지해 버렸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택배기사들에게 손으로 직접 배달하라는 것이냐며 비판의 여론을 형성했고, 해당 아파트는 ‘저상 탑차를 구매하여 지하 주차장으로 배달하라’는 무책임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만약 육체노동을 하는 단순한 이유로 택배기사를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당당히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갑질’ 논란으로 한진그룹 일가의 만행이 연일 뉴스를 채우고 있다. 그들은 재산과 직위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차별에는 학력차별이 있다. 학벌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에는 수능점수를 기준으로 삼아 인문대 학생들보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하는 모 대학의 경영학과 학생이 예시로 나온다. 여성차별 또한 심각한 문제다. 여성 대졸자의 취업률이 남성 대졸자보다 훨씬 낮은 것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한편 ‘역차별’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개인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경우다. 예를 들어 지방할당제는 지방을 활성화시키는 좋은 제도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를 했던 지방의 학생들은 대부분 서울권 대학에 다니고 있고, 그 때문에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한다. 비롯 작은 수이더라도 역차별로 피해를 입는 사람에게 ‘어쩔 수 없다’고만 변명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차별이 극단화되어 증오로 표출된 경우도 많다. 여성차별이 고착화되어 ‘여성혐오’라는 표현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혐오와 증오는 단편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책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맨’의 한정으로 표현되던 ‘우먼’을 거꾸로 뒤집고 ‘움’의 한정형으로 ‘맨움’(남성)이라 표현한다. 이렇게 거꾸로 뒤집는 사고에서 생겨난 ‘미러링’이란 개념으로 현재까지 차별과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이, 이제는 남성들에게 그 증오를 되갚음하고 있다. 이처럼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심지어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증오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안전체계의 부실로 300여 명의 생명이 안타깝게 스러진 사건에 대해서, 먼저 필요했던 것은 ‘해결의 노력’과 함께 위로와 공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위로는커녕, 정치적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것으로 보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증오에 휩싸여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차별과 증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신은 초월적 존재이지만, 내 마음속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외부의 환경에 휩쓸려 스스로를 차별의 대상으로 내몰기보다는 먼저 스스로를 존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차별과 말살의 논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차별의 논리에 묶이지 말고 그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갈등을 피하지는 말아야 한다. ‘갈등은 무시하거나 덮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갈등을 대면하는 것이 무서워서, 혹은 귀찮아서 그저 지나쳐 버린다면, 언젠가 그 갈등은 우리 사회를 돌고 돌아 나에게 부딪칠 것이다. 우선은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차별적 생각은 증오의 씨앗이므로, 무의식 중에 품고 있던 차별적 생각들을 의도적으로 고쳐야 한다. 그리고 ‘평화가 이루어져야 할 첫자리는 나의 내면이다.’ 조각나고 분열되기 쉬운 환경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먼저 분열되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사회 또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용서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예수는 자신의 원수들을 힘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서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보였다. 증오에 맞서 증오로 싸운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증오로 물들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용서는 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너의 잘못 때문에 내가 그것에 얽매이기 싫다는 것이 바로 용서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물론 사회구성원들의 공동 노력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연민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덕목’이다. ‘나의 찌질함으로 너의 찌질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연민을 통해서 상대를 이해하는 관용의 태도로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다양성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고는 종교간 갈등과 증오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다양성의 근거 또한 하느님이라는 사고를 통해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다양성으로 인해 풍성해진 사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치는 갈등보다 우월하다.’ 물론 일치가 만장일치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자신의 입장과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 사회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연대’ 또한 우리 사회에 중요한 덕목이다. 이때 연대는 단순한 종합이 아니라, ‘양립 가능성을 보존’한 한층 더 높은 차원의 화합을 말한다. 정당끼리 연합하는 연대가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도의 한 종교대표자 회의에서 주창한 것처럼, ‘그저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는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각자 종교적, 정치적 이해는 접어 두고, 각자가 겪은 슬픔과 전쟁으로 인한 아픔에 공감한다면, 서로를 배제하는 결론이 아니라 한 차원 더 발전적인, 공존할 수 있는 대안이 가능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인적 차원에서 증오와 차별에 휩쓸리지 않고, 갈등을 외면하지도 않을 때, 나아가 공존하며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우리는 사회의 차별과 증오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여전히 젊은이들은 희망을 이야기하며, 희망을 일구어 갈 정신적 근육이 강함도 보여 준다. 책을 읽으며 현실을 해석할 힘을 얻고, 그 힘은 새로운 역사의 전환으로 선순환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성숙한 의지는 새로운 사회를 일구어 가는 패러다임 전환의 근간을 이룰 것이다. 단지 기성세대는 그들에게 호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몫을 그들에게 돌려줄 마음을 먹고, 그대로 실천하며 그들의 야성을 길들이지 않아야 한다. 이미 철창 속에서 태어난 호랑이처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 문을 부수고 사람의 자유를 누릴 날이 속히 오기를 응원한다.

최우혁(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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