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어 세상으로 18]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문제 삼아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교황의 퇴임을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이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주교의 발언은 복음의 해석이 다양할 수 있음을 보인다. 이 또한 21세기이기에 가능한 사건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활동이다. 젊은이들은 현실을 해석하는 교회의 권위에 어떤 응답을 하는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이 그들에게 기쁜 소식인지, 지난 호에 이어서 살펴보려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성찰할 주제들을 선정하고 각각의 주제 안에서 구체적 소주제를 선정하여서 조별로 발표하고, 토론조의 팀원들은 주제와 소주제를 연결하여 토론한다. 기말 시험은 소주제에 따라 발표한 내용과 토론한 내용을 모니터링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논제로 재구성하여 문제를 만들고 논술한다. 신학적 이해가 구체적으로 사회와 삶 안에서 만나는 합류의 지점을 찾고 성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로 “신학한다”는 것이라 하겠다.   

 

논제 1. '종교와 문화'의 범주에서, 서로 다른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신자는 어떻게 신의 진리를 찾아야 하는가? 이성으로 질문을 탐구하고 신앙으로 답을 구해야 한다.

1. 들어가며

세계의 다른 모든 주요 종교가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교의 역사 또한 형성 초기부터 여러 주제를 두고 토론, 갈등, 그리고 분열이 반복되어 왔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믿는 대로 초월적인 신이 유일하게 존재한다면 그 모든 질문에는 신의 뜻을 따른 명백한 답이 있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교회는 “성부 성자의 관계는?”, “어떤 문서가 신의 진리를 담은 정경인가?”, “세례의 방법과 목적, 그 결과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성애는 어떤 것인가?” 등과 같이 신앙에 대한 질문들에 답하면서 제각기 다른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성서의 같은 대목을 읽고도 교단마다, 교회마다, 성직자마다 내어 놓는 답이 다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신의 뜻을 찾고 성서를 읽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 개인들은 어떻게 신의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2. 조 발표와 토론

‘종교와 문화’의 주제들은 위의 문제제기에 맞닿는다. 네 조의 발표 가운데 ‘성 소수자에 대한 문제와 기독교의 입장’은 성 소수자 문제에 관한 단면을 보여 준다. 이 발표는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한 사회 현안(군대 내부의 동성애 처벌 논란, 대선 토론에서 언급된 성 소수자 문제, 교내의 성 소수자 차별)을 소개하고, 성 소수자를 죄인으로 보는 성서 구절과 연관시켰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스도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쟁점이 되는 화두로, 훨씬 다양한 시선들이 논쟁하고 있음은 이 발표에서 미처 설명되지 않았다. 발표한 조가 제시한 입장은 가장 고전적 해석으로 동성애는 부정하며 신에 의해 금지되었고, 오직 이성애만이 자연스러운 사랑이라고 이해한다. 또 다른 해석은 동성 간의 물리적 성관계는 성서가 명시적으로 금지하지만, 더 넓은 의미의 사랑, 즉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일례로 미국 성공회는 순결서약을 한 동성애자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세 번째 해석은 다른 많은 율법, 예를 들어 새우와 오징어를 먹지 말라고 한 레위기 11장 10절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금지 규정도 역사적, 문화적, 신학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더 나아가 사랑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종교 지도자가 지시하는 교리를 다 받아들여야 하는가? 받아들인다면, 그 교리를 따르면서 타종교의 교리나 규칙은 비판하는 것이 합당한가?”라고 물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방식에 관한 토론의 결과로 ‘알라조’는 평화와 선이 종교교리의 목적이므로, 그 수용은 사회가 처한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집이 좋조’는 종교와 맞닿은 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규범 속에서 교리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 두 조의 공통점은 신학적 문제의 답은 반드시 비판적 탐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신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인간의 이성이 필수적인 것이다.  

3. 현상의 단면

신자들은 각자 믿는 진리를 어디에 근거를 두고 찾는가? 일반 신자의 가장 흔한 대답은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신자들은 성직자(특히 목사, 신부)의 가르침을 큰 비판 없이 수용한다. 과연 내가 다니는 교회의 설교, 오늘 들은 사제의 강론이 정말로 신적 진리에 부합하는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즉, 이 교회의 목사는 이러한 구원론을, 저 성당의 신부는 저런 구원론을 가르치면, 각각의 신자들은 들어서 배운 구원론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 그런데 신자들은 어떻게 그 교회, 그 성당에 다니게 되었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는 많지 않다. 가족이 다녀서, 집에서 가까워서, 처음 몇 번 들어본 설교가 거슬리지 않아서 다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신의 진리에 대한 깊은 고민도 체험도 없는 쉬운 순종을 불러오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종교적 세뇌가 이루어진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4. 교황의 가르침: '복음의 기쁨'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사회적이고 신학적인 갈등에 관해 이야기하며, 해결을 위한 몇 가지 단초를 제공한다. 첫째는 “실재가 생각보다 중요하다”(231항)는 것이다.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선의와 지혜를 따라야 한다. 이를 위한 도구가 ‘실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생각’이다.(232항) 둘째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다.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것은 이성으로 밝혀진 실재들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이성의 모순은 반드시 양쪽 모두에 의문을 갖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셋째로, 교황은 서로 다른 교회에 대한 상호존중과 신에 의지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어떠한 의심이나 불신을 떨치고 우리의 길동무를 진심으로 신뢰하여야 하고, 우리 모두 찾고 있는 것, 바로 한 분이신 하느님의 얼굴에서 빛나는 평화를 바라보아야 합니다.”(244항) 우리는 몇 가지 공통되는 믿음 – 예를 들어 ‘예수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 에 기초하여 열린 자세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대화를 거부하고 독단적으로 진리를 판단한 유대의 왕들을 향하여 구약의 역사서들은 “교만하다”고 비판하였다. 신약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1베드로 5,5) 가르쳤다. 나의 믿음보다 상대의 믿음이 진리에 가까울 수 있음을 명심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교황의 입장 역시 질문에 대한 여러 답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5. 한 가지 해법

신학적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야 하고, 이성으로 소화하여 납득해야 진실되고 건강한 신앙을 키우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성서비평의 방법으로 풍부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창조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서술되었음을 알려 주기도 한다. 그런데 종교는 오랜 세월의 누적된 집단적 문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적 체험이기도 하다. 어떤 질문에 각기 타당한 논리를 펼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일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신학의 여러 입장을 충분히 성찰한 이후에 반드시 신에게 돌아가 그에게서 답을 구해야 한다.

신과 대화하는 것, 그의 답을 듣는 것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신과의 대화, 즉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그 또한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배운다. 마태오 6장 9-15절은 기도하는 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전한다. 4세기 신학자인 에바그리오 폰티코는 “신학자는 곧 진실로 기도하는 자이며, 진실로 기도하는 자는 곧 신학자”라고 강조하였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는 “어디서든 기도하라”는 명쾌한 가르침을 남겼다. 다만, 신에게 기도로 답을 구한다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이 부족하면 완전한 답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예언자 다니엘과 파트모스의 요한이 각각 본 대로 서술한 계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각자의 이성으로 계시를 소화하고 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이성을 활용하고 수련해야만 신으로부터 얻은 답을 온전히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다.

6. 나가면서

신앙과 사회에 관한 여러 질문들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질문에 대해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만장일치의 답을 내는 일도 기대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예수는 주님이시고 메시아이시다”라는 선언은 곧 그리스도교의 정의로 받아들여지지만, “주님”과 “메시아”에 관한 해석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인의 의무는 질문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 탐구는 이성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정답은 신에게만 있다는 양면성을 갖는다. 중요한 것은 이성 또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자 섭리라는 것이다. 이성을 통해 질문을 탐구하고 배운다. 이때 우리는 신의 진리가 당장 나의 생각, 오늘 내가 들은 설교와 다를 수도 있다는 열린 자세와 겸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신앙으로 기도하며 이성적 탐구의 시작과 끝을 신에게서 구해야 한다. 신적 진리는 인간이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되고 결론 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신의 존재와 권위를 받아들이는 이라면, 진리의 원천과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단순 명료한 명제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신학한다는 것. (이미지 출처 = Pixabay)

논제 2. '찬미받으소서'의 사회적, 정치적 사랑의 관점에서 '사랑과 지혜'의 토론 주제였던 모성애를 논하고, 이를 토대로 2018년 한국의 미투 운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논하시오.

'찬미받으소서' 의 “사회적, 정치적 사랑”(228-232항)의 장에서 교황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현실 사회 안에서 어떻게 확장되는지에 관해 논한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여기서 인류가 모두 하느님인 같은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임을 함축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지닌 의미도 바로 이 인류의 형제로서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보편적 형제애’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교회가 제시하는 ‘돌봄의 문화’가 사회를 지탱할 때 인류는 ‘사랑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절의 내용이다.  

'사랑과 지혜' 주제 발표 중 제시되었던 모성애의 당위성에 대한 토론은 언뜻 보면 가족 공동체의 운영을 지배하고, 따라서 보편적 형제애를 무책임한 육아로 파괴하는, 사랑에 반대되는 논의처럼 보일 수 있다. 모성애가 사회의 압력에 의한 발명품이라면, 그 압력을 해체하는 것이 가정의 파괴와 다름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발표에 인용되었던 '모성애의 발명'은 과거 농장 공동체 때에는 남녀 모두의 노동으로 희박했던 육아 역할의 어머니라는 지위가 근대 핵가족 단위의 등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의 사회적 입지가 낮아졌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 아동이 인권의 주체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헌신적 노력이 강요되기 시작했다고 논한다.

조별 토론의 내용 중에는 '모성애의 발명'의 논지에 힘을 더하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대중문화 중에서도 주말에 방송되는 가족 드라마는 모성애가 부족한 여성이 곧 악역이라는 설정을 통해 여성들에게 엄마로의 역할을 강요하는데,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악역이 대표적 예라고 한다. 여성이 엄마의 역할을 순종적으로 행할 때에만 아동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대중문화 속 설정들의 강요는 정상가족에 대한 강요이며, 동성부부에게서 자란 아동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상태를 고려할 때, 부당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성애의 발명'이나 한국의 주말 드라마 속 악마화 된 여성에 대한 논의가 가족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반사회적 행동인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데, 가족 공동체 내부의 관계단절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고찰해 보면 모성애 논쟁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가족 내 단절을 야기하는 기제 중 하나가 바로 육아역할을 전담해야 하는 엄마와 경제활동을 강요당하는 아빠라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랑과 지혜' 주제 발표에 소개되었던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모두 포기하는 주인공은 엄마의 역할 때문에 아들과 관계 단절을 겪는다. 즉, 가족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강요가 구성원들 사이의 단절을 낳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역할들이 사회로부터 받은 의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모성애가 사회적 압력의 발명품이라는 주장은 가족 운영을 저해하는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폭력적 억압을 걷어내고 사람 대 사람으로 재회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하는 성찰의 결과라고 하겠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형제로서의 인류에게 요청되는 보편적 형제애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의 관계성, 즉 개인으로부터 우주로 자아의 확장적 인식의 관점에서 보편적 형제애가 구현할 사회적 사랑은 단절되었던 관계의 회복, 소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모성애의 억압성에 대한 논의가 보편적 형제애의 파괴가 아닌, 실천이라는 설명은 더 나아가 현재 한국 사회의 미투(Me Too) 운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관한 시각을 제공한다. 현재 미투 운동에 반발하여 ‘백래시’(Backlash)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 저항은 ‘모성애가 사회적 발명이 아니다’라는 주장과 흡사한 주장을 펼친다. 미투 운동이 갈등을 유발하고 사회를 분열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모성애가 어떻게 사회적 발명이며, 이에 대한 성찰이 어째서 폭력이 아닌 더 큰 형제애와 사랑 문명의 시도였는지를 돌아보면 미투 운동의 의의를 이해할 수 있다. ‘엄마’가 가족 내 여성의 주체성을 소외시켰듯이 사회 전반에 걸쳐 박탈당했던 여성의 목소리를 발화시켜 주는 것이 진정한 형제애의 구현이며, 사회적 사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오찬호 박사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시다'에 소개된 ‘열등성의 내재화’로 이해를 연장하려 한다. 이 책은 성과주의 압박을 내재화한 청년들이 구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기보다는 체제에 순응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멸시하게 되고, 사람을 서열화하는 경향에 대해 논하는데, 모성애의 강요와 미투 운동에 대한 저항은 이렇듯 체제에 대한 순응을 닮았다. ‘어머니’로서의 여성만큼이나 ‘아버지’로서의 남성도 사회적 역할로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투에 대한 백래시가 어째서 왜곡된 열등성의 내재화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성애는 사회적 압박일 뿐이고, 모든 어머니들의 사랑은 가식인 것인가? '사랑과 지혜' 발표에 언급된 이사야 46장 3-4절,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은 진정한 모성애, 건강한 모성애의 형식적 기준이 될 수 있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사랑인 하느님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사회적 압력에 소진된 착취를 극복하는, 생명력을 기반으로 확장적 자아를 완성하는 가족사이의 ‘보편적 형제애’로서의 모성애와 닮았다. 그러한 모생애로 누군가가 마냥 희생당하지 않는 사랑을 구현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이며 그 목표를 실행하는 철학에서 신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투운동 (이미지 출처 = Flickr)

젊은이들은 건너가야 할 인생의 뜨거운 여름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은 그 뜨거운 계절에 놓인 징검다리처럼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울 것이다. 이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권고나 회칙은 앞으로 나아가며 때때로 확인해야 하는 지도와 나침반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사히 긴 여름을 통과하고 인생의 가을을 맞을 때, 복음은 21세기의 언어로 재해석되어 기쁘게 울려 퍼질 것이다. 여전히 그러기를 바라며 응원할 뿐이다.         

최우혁(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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