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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발전과 나의 삶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책장을 넘어 세상으로 20] '성탄의 신비', 예수 강생, 죽음과 부활

패러다임의 전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바라보는 성탄

길에서 성탄의 기쁨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기 어려운 올해의 성탄이다. 음원 저작권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성탄 캐럴을 무상으로 쓰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상으로 주신 하느님의 강생이 추위에 오롯이 그 의미를 더하는 역설적 기쁨이 되는 모양이다. 지난 세기에 에디트 슈타인은 '성탄의 신비'(1931)란 소품에서 강생의 신비를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의 희망에서 시작하여 그분의 일생과 수난 부활에 이르는 여정을 따르는 길로 성찰하였다.

오늘 가장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을 따라 기쁜 사건을 만나러 가며 에디트 슈타인을 따라서 그 기쁨을 성찰해 보자. 우리에게 그 기쁨의 내용과 희망, 개인뿐 아니라 제자 공동체를 탄생하도록 하고 이제까지 그 빛을 비추는 기쁨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분의 공생애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고, 우는 이들이 기쁨으로 눈물을 거두게 하는 은혜의 길이었다. 하느님 안에서 창조된 인간의 길을 직접 보여 주고, 고통과 죽음에도 타협할 수 없는 존엄한 인간의 길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길은 인간이 혼자서 가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길이다. 자신을 온전히 드렸던 마리아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예”로 응답해야 하는 도전으로 다가온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로 대답한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함께 걸을 때 매 순간의 부르심에 “예”로 대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탄생은 죽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어떻게 처음에서 마지막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늘 나를 열고 부르심, 혹은 초대에 “예”로 대답할 수 있을까? 혹은 삶에서 나를, 우리를 초대하는 만남과 사건들의 신비를 통과하면서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고통과 기쁨 안에서 예수가 걸어간 길을 따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은 오늘 아기로 오신 예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는 또렷하게 눈을 뜨고 두 팔을 벌려서 우리를 맞이한다. 우리 또한 새로운 아기로 태어나라는 초대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따라서 십자가를 함께 지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부활에 이르는 것은 새로운 기쁨을 만나 새 힘을 얻는 기쁨이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쁨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탄생과 수난, 죽음과 부활은 그의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오늘과 내일을 이끌어 가는 힘이기도 하다. 아래의 글은 한 젊은이의 죽음이 어떻게 공동체의 부활로 이어졌는지 소개한다. 성탄이 기쁜 이유는 그의 삶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 안에서 더욱더 큰 고통과 기쁨으로 확인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공동체. (이미지 출처 = Pixabay)

공동체의 발전과 나의 삶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뼛속까지 이공계인 나는 평소에 종교와 믿음, 신앙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15년 동안 제3자인 ‘신’이 아니라, 오직 확률과 수학, 물리학에 의해 세상이 굴러간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이 부정적 생각은 오로지 100퍼센트 나의 머릿속에서만 나온 것이 아닐지 모른다.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선교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짜증과 불신 등의 문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되니 말이다.

따라서 나는 어느 정도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즉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에 빠진 상태로는 깊은 고찰을 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믿기지 않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이 과목, 신학적 인간학의 수강을 미루었다. 이공계의 마인드로 15년을 살았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나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 명확하고, 따라서 강의를 열심히 듣고는 있지만 모든 강의 내용에 공감하지 못하는 내가 편협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온전히 사로잡은 키워드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는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왜 저항하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예수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죽임을 당했다. 몇 달 전 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참으로 ‘실패한 인간의 무기력함’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예수는 슬픔 속에서 부활하였고, 그 부활로 인하여 예수’정신의 지속성’이 비로소 널리 퍼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정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상황임에도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 죽음들로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성숙해 나갔다고 한다. 참으로 매력적이고 강렬한 역사의 한 대목이었다.

교수님은 몇 년 전에 동료의 죽음을 경험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그 영향이 아직도 내면에 있다고 하셨다. 신기하게도 참으로 말도 안되는 확률로 나 역시 2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그것은 동아리 후배의 사고사였다. 그 친구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친구의 성품과 생각, 사고방식,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만든 게임을 앱으로 만들어 팔기도 하는 친구였으니 말이다. 우리 동아리 공동체뿐 아니라, 그 친구가 속한 학과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재능과 가능성에 대해서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장례식을 마치고 다들 허무와 슬픔에 잠긴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주 조금 흘렀을 때, 이상한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속했던 공동체 사이에서는 신기하게도 ‘그 친구의 몫까지’라는 문장이 자주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고 그 친구의 몫과 가능성까지 우리가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평생을 따라다닐 이 인생의 짐의 효과는 괄목할 만했다. 그 친구의 학과 친구는 영화를 찍으러 떠났으며, 다른 친구는 3학년때 논문을 썼다. 또한 동아리에서는 갑자기 어느 친구가 코딩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로 공모전을 휩쓸었다. 나는 대학원에 합격했고,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친구는 술 먹고 3번 정도 울더니 1년 뒤에 교직 이수에 합격하였다. 2년이 지난 이제야 나는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지속’의 본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심지어 우리는 그 친구의 성품까지 계승하려는 중이니 말이다.

단순하게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과 함께 인생의 의미와 방향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가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였으니 그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졌듯, 누군가의 죽음(우리는 신적 존재가 아니니, 물리적 부활은 불가능하다)으로 인하여 그 정신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이 그것을 원하셨다’라는 말이 결국 죽음은 예수가 말하는 바를 효율적이고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는 효율적 도구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교수님도 그 동료의 죽음에 대하여 무언가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하셨다. 그 행동이 비리를 밝혀내는 것이든, 추모의 행동이 되든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대학 공동체와 교수 공동체를 더 이롭고 성숙하게 발전시키는 방향이 될 것임은 명백해 보인다. 이처럼 우리는 죽음들이 가지고 오는 메시지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 메시지가 항상 공동체에 긍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많은 선지자들이 썼던 대목을 참고해 볼 수 있겠다.

'복음의 기쁨'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찾아볼 수 있다: 공동체의 발전은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에 대하여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구원 계획이란, “때가 되면 그리스도 당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그리스도 당신의 머리로 품으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은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 문장들이 내 죽음이 인류 전체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누군가에게 의미를 갖는 것이어야, 예수가 말한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인류 번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죽음의 ‘정신적 지속’이라는 에너지에 대해 알게 된 뒤로, 그리스도가 때가 되어 ‘나’라는 피조물을 품으실 때까지 최대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고 영향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친구의 성품을 계승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언젠가는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마음 안에 물려줄 정신, 즉 복음을 하나씩은 써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공동체가 점차 성숙하게 될 것이고, 더 성숙한 다른 이의 복음이 다음 세대까지 이르러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인류 공동체 전체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신은 더 이상 나에게 제3자, 혹은 그 누구가 아니다. 방향을 제시해 주는 신은 이제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남은 것은 나의 선택이다. 내 신이 제시해 주는 길이 다른 이에게도 그의 방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공동체는 그 반복 속에서 갈수록 성숙해져야 하니 갈 길이 멀다. 우리의 사명은 무겁다.  

 

21세기 한국 젊은이가 경험한 이 공동체의 부활 안에서 성탄을 이렇게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라는 일반화된 신앙의 방식을 그 근본에서 전복하는 시선은 예수를 모델로 하는 인간학과 신학의 성격을 재구성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정신의 지속성’ 안에서 ‘나’의 삶이 바뀌는 것이 바로 복음을 만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이는 ‘하느님의 모습으로(Imago Dei)’ 창조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에게 자신을 열고 일치함으로 신의 지혜를 통해서 개인적 성숙에 이르는 길이며, 나아가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가 살아간 방식을 따라서 신과 소통하며 인간으로 책임질 수 있는 한계를 넓혀 나감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키워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바로 이 사랑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예수의 탄생과 함께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 또한 새롭게 태어나는 성탄을 축하!!!

최우혁(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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