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어 세상으로 12]세상의 고통 안에서 "복음의 기쁨"과 "찬미 받으소서"를 함께 읽고 새롭게 인식하기

한국의 대학생은 객관식 수학평가능력을 통과해서 대학에 들어온다. 이들에게 문제를 만들고 답을 찾아 나가는 시험 문제는 녹록하지 않은 새로운 시험의 세계다. 그럼에도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번 신학적 인간학 과목의 참고서는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 "하느님과 인간"이었다. 강의와 참고서를 바탕으로 이들이 한달 넘게 고민한 삶과 신학의 주제들을 여기서 나누려고 한다.


논제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인간 존재를 정의 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개념과 관련 지어 논하시오.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은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한다.(52)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징표를 살펴보자. 산업화를 거치면서 놀라운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 사회는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이성을 중요시한다. 현대 과학은 신을 기초로 하지 않으며, 인간은 오직 인간에 대해서만 고려하기 시작했다.("하느님과 인간", 9-10) 이에 따라 돈이 우리의 새로운 우상이 되었고 현대인은 돈의 지배 아래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과 이성의 잘못된 사용이 결부되어 여러 가지 차별, 폭력과 사회적 불평등을 담은 사회 문제, 생태계 파괴와 같은 환경 문제, 물질 만능주의, 빈익빈 부익부 등의 경제 문제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시대의 징표가 이제 현대인들이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과 ‘세속화된 인간 이해’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재정립해야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미해결로 두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저서에서 "예상되는 다양한 도전에 맞서려고 우리가 노력할 때에도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59)라며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을 ‘복음’에서 찾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재정립하고, 그의 가치관대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지혜와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가치관으로 지조 있는 삶을 산 온전하고 새로운 인간이자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창세 1,26) 우리 안에도 신성이 있고, 따라서 이런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모습대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인간, 즉 우리의 존재를 정의할 수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린 역사적, 인간학적 관점에서 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역사 속에서 사두가이도, 에센느도, 바리사이도, 젤롯당도 아니었다. 즉 기성체제나 혁명가가 아니었으며, 탈속이나 타협을 추구하지도 않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원점에 있는 분이었다. 예수는 빈곤층에 비해 부유하게 사는 제사장들의 모습에 불합리함을 느껴서 속세를 유지하고 있는 율법, 규정과 같은 질서를 따르지 않으며 단지 사람답게 사는 것,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렇듯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기득권층과 충돌하고 그들을 거슬러서 싸웠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 즉 인간의 행복, 사랑과 연민이었으므로 그는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소중하게 대했다. 죄인들과 세리들과도 편견 없이 어울렸으며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 주었다. 그 분은 이미 있는 차별의 담을 헐어 버리려 오신 분이었다.("하느님과 인간", 159) 하느님의 논리에는 소외와 말살이 없기 때문에 예수는 자기를 죽이는 이들까지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김을 실천’하여 용서하였다.(162) 또한 예수는 문제의 근본을 보는 사람이었다. 안식일에 대한 그분의 말씀, 정과 부정에 대한 말씀,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말씀 등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188-189) 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3.5.14-15),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13-17)고 말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였다.(189-190)

▲ "복음의 기쁨"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 (표지 제공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예수가 살던 시대에서 이러한 그의 모습들은 독특하게 받아들여졌다. 예수는 남들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독창성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예수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꺾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인간의 실존을 가르친 인물이자, 하느님 안에서 인식하고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며 자유로운 결단으로 실천한 인간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들의 존재를 재정의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다. 예수를 달빛을 가리키는 손으로 본다면, 그는 달빛이기 전에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 하느님의 뜻을 따른 인간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발현한 한 명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앞서 밝혔듯이, 우리 안에 신성이 있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결단과 자유를 가지고 있고, 성화와 신화를 통해 자기 실현까지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아 자유롭고 연민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정의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는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능력이자 인간과 기계와의 차이점으로 인간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사랑과 연민’은 하느님의 뜻으로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의를 가지고, 현대인은 어떻게 현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현대에는 "살아 있다는 기쁨이 자주 퇴색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이 갈수록 결여되며, 폭력이 증가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복음의 기쁨", 52) 또한 오늘날 모든 것이 경쟁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배척되고 소외되고 있으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연민하지 않으며 도울 필요마저 느끼지 않는다.(53-55) 즉 이기적이고 차별적이고 타인에게 무감각해진 황폐한 사회가 된 것이다. 먼저, 차별과 폭력, 사회 불평등과 같은 사회 문제부터 살펴보자. 현대인들은 사회가 정한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차별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배척한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 남녀 서로에 대한 혐오 등 온갖 혐오와 배척이 난무한다. 예수는 그러지 않으셨다. 그는 누구보다 차별 없는 분이셨으며, 폭력을 지양했다. 이 폭력은 불평등으로부터 생겨나는데, 불평등은 결국 차별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은 배척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예수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다(에페 2,1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서 만물을 하나되게 하셨다. 우리가 차이를 존중하며 평화를 이루어야 할 첫 자리가 우리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언제나 분열과 붕괴의 위협을 받는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셨다.(178) 우리 자신 안에서 차별과 배척의 마음을 죽이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존중할 때 차별과 폭력, 불평등은 사라질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인간만이 신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므로 인간은 예수를 모델로 하여 모두와 ‘공존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를 따라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환경 문제를 살펴보자. ‘기술적 패러다임’이 만연해진 이 시대는 기술을 대표하는 이들이 자연의 요소들과 인간 현존의 요소들을 모두 장악하려 하고, 그 결과 개인의 결단력, 온전한 자유, 고유한 창조성을 위한 자리가 줄어들게 되었다.("찬미받으소서", 87) 동시에 현대 인간 중심주의는 모순적이게도 현실보다 기술 이성을 앞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타당한 규범이나 자신이 살 거처로 여기지 않는다.(92) 산업화에 따른 무분별한 환경 파괴, 재개발을 위해 밀어지는 산과 허물어지는 집들을 보는 것은 이제는 너무 당연하다. 자신이 타고나는 자연적이고 윤리적인 구조를 존중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고유한 의미까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처럼 문제의 근본을 봐야 한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이용하는 우리의 태도, 인간 중심적인 사고다. 기술은 분명 우리 삶에 큰 발전을 가져왔지만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므로, 인간이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닌, 자연과 우리 모두를 위해 적절하게 기술을 이용할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물질 만능주의, 빈익빈 부익부 등의 경제적 문제를 살펴보자. 이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좀 더 길게 다루려고 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금융 위기는 그 기원에 심각한 인간학적 위기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곧 인간이 최우선임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복음의 기쁨", 55) 돈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가 섬기는 새로운 우상이 되어버렸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탈출 32,1-35) 돈에 대한 물신주의 혹은 비인간적 경제 독재로 바뀌었으며, 이는 무엇보다 인간 이해에 대한 심각한 결여를 보여 준다. 인간을 인간 욕구의 하나로, 곧 소비욕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55) 인간은 소비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존재다. 창조에 관한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에덴 동산에 사람을 두시어, 그곳을 보존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열매를 맺도록 하셨다(창세 2,15).("찬미받으소서", 97) 이와 같이 노동은 창조 때부터 중요한 가치며, 이 땅에 살아가는 의미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일을 하여 스스로 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기계가 아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자리가 더 많이 생겨나야 하고, 이를 위해 기업과 정부는 나서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들도 노동을 통해 돈을 벌 기회가 생길 테니 말이다.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부익부 빈익빈을 줄이려면 더 많이 가진 사람은 그것을 없는 사람들에게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 예수가 자신의 가진 것을 사랑으로 나눴듯이 우리도 서로 가진 것은 나누고 연대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신다.("복음의 기쁨", 144)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 우리는 그 정신으로 서로 연대하고 돕고 살아야 한다. 때때로 이는 모든 민족들의 울부짖음,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는 것이며,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일정한 자기 권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154) 특히 우리나라는 대기업의 횡포가 심하기 때문에, 예수의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기업의 사회적 환원 정도는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과 연민을 바탕으로 한 연대가 지금은 절실히 필요할 때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범을 넘어 그 시대의 “인간 존재”에 대한 혁명이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우리 모두가 신이라면, 하느님과 인격적 합일을 이루어 나감으로써 현대 사회를 더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지혜롭게 사용할 때 현대 사회도 곧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적어도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고리로 만드는 것이 갈등에 대처하는 최선의 길이다.(177) 또한 예수를 기반으로 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우리 존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기도 하므로, 그가 꿋꿋이 하느님의 뜻을 따랐듯이 우리도 묵묵히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밟는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는 우리를 그분 자신처럼 온전케 하실 것이다(필리 3,12-14; 1테살 3,13; 1요한 3,2).

 
논제2: 유대적 원시 교회와 구분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하고, 그 속에 나타난 ‘예수’의 삶을 모델로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패러다임을 서술하시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등장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한 사회를 규정하는 사고의 틀의 근본적 변혁을 의미한다. 이 틀은 으레 ‘새로운’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쓰이는데, 이 틀에 의해 사회가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도 이전의 원시 교회에서 하느님은 절대적 근본으로서 존재했다. 형이상학적 신학이라 불리는 초기 교회가 수용한 하느님은 완성된 가르침을 주는 절대자였다. 그랬기에 계약의 신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유대교의 율법이었고 그 율법은 의로우신 하느님과 그 하느님에 의한 벌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유대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수의 죽음이란 예언자로서 반대에 부딪혀 순교하는 필연적 사건이고, 예수는 전 인류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구약성경의 관점으로 예수를 해석한다면, 예수는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무위가 돼버린 계약을 다시 확립하는 존재일 뿐이고 하느님은 그저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신앙인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는 인과응보의 신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예수의 죽음은 신학적 관점에서 어떠한 새로운 의미도 갖지 못할 뿐더러, 예수의 부활에 대한 명확한 해석 또한 없다.

이와 같은 해석은 다른 선택의 여지를 빼앗아버리는, 인간들이 만든 잘못된 신념의 결과다. 반면, 예수의 시선으로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하느님의 뜻은 새로운 빛을 내게 된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부터 조명할 때에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패러다임은 시작된다.

예수는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율법 중시 전통에 철저히 반기를 든 인물이었다. 예수는 어떤 편에도 속하지 않는 누구나의 편이었고, 그가 강조한 것은 오로지 ‘인간’이었다. 인간 없이 전통과 율법만을 강조하는 거짓 예언자들에 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약의 기본 정신인 자비, 즉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 죽음을 넘어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가 있었던 예수의 삶이란 한마디로 ‘실천’의 삶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림',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7-18.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예수의 '실천'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죽음은 유대 기득권자들이 행한 배척과 죽임의 논리가 아닌,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함께 실천되었다. 그 뒤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실천이 하느님의 뜻임을 증명하였다. 이처럼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기득권층이 지켜왔던 율법의 틀을 인간 중심의 하느님나라라는 틀로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예수의 패러다임 이후 2000년 동안 새로운 패러다임은 계속해서 등장했고, 그에 따라 사회도 재구성되어 왔다. 지금 2016년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패러다임과는 분명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현재 우리 삶을 구성하는 패러다임의 조각들을 찾기 위해 근 300년을 돌아보면, 18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유럽 내에는 무신론과 계몽사상이 출현했다. 신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만 같았던, 이성에 근간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대 뒤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다.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과 함께 이성에 대한 맹신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2016년의 세상은 ‘자본’이라는 커다란 그림자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로 인한 부패, 증오, 혐오의 모습들이 만연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수십 만 유대인의 죽음이 무색하게 지금의 이스라엘은 ‘자본’이라는 힘과 함께 또 다른 모습의 가해자가 되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있다. 교회는 교인들의 모임으로 전락하여 동성애자와 외국인을 혐오, 배척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며, 그러한 정당이 3퍼센트에 육박하는 비례대표 지지율을 얻고 있다. 한국 사회가 자부해 왔던 가족이라는 끈끈한 공동체는 깨져버렸고 가정이라는 허울 아래 자녀를 학대하고 유산을 위한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다. 청년들은 꿈이 아닌 돈을 좇고, 돈이 모든 소원을 이루어줄 것 같은 이 사회에서 자살률 1위의 불명예는 익숙해진 듯하다.

2000년 전 예수가 맞섰던 그 시대의 부조리보다 더욱 심각한 사회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 인류는 어떠한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만들어 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히 ‘패러다임적’이었던 예수의 삶을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예수가 보여준 것은 연민과 자비였다. 인간의 아픔에 공감하고 곁에 있어주는 것이 예수가 보여주었던 저항의 방식이었다. 버려진 사람들, 죄인들, 세리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는 기존의 관행을 거부했다. 율법과 전통이라는 틀을 지어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기존의 방식은 분명 잘못되었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예수는 저항하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그러한 그의 행동은 결코 일시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도를 매개로 끊임없이 초월과 소통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고 인간의 뿌리에 대해 재인식해 왔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는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가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었다.

예수는 분명, 자신의 방식대로라면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그의 삶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타협하는 삶이 아닌 신념을 지키는 삶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지켜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의 피앗(fiat)이었다. 하느님의 요청을 자유의지에 근거하여 동의하고 실천한 예수는, 그랬기에 부활로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죽음을 넘어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가 있었던 예수의 삶이란 한마디로 ‘실천’의 삶이었다. 원죄를 갚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필연적 죽음이 아닌 자유 의지에 의해 실현된 ‘실천’의 죽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죽는 그 순간에도 죽임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과 동시에 그들을 ‘용서’했다. 그들을 용서해준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렇게 악의 고리를 끊어내었기에 관계의 회복은 시작될 수 있었고, 예수의 부활 뒤에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처럼 예수가 보여준 연민과 자비, 초월과의 관계, 자유의지, 용서, 연대 이 모든 것들이 바로 현재 우리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가치들이다. 2016년 현재는 과연 예수가 살았던 시대보다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까. 차별, 살인, 고통은 계속되고 있고 기술과 자본이라는 힘과 함께 더 악랄하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어쩌면 2000년 전보다 더 심각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대보다 나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예수라는 모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예수가 실천한 삶을 알고 있고 그 삶의 흔적은 역사에 남아 있다. 그렇기에 당시 단 한 명의 예수가 그 시대에 맞섰다면, 우리는 수많은 예수들과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선포한 것과 같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울타리는 교회 안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예수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패러다임의 출발점은 ‘인간’이었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을 만든 것도, 공동체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예수를 기억하고 기록해온 것도,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있을 것이다. 예수가 말한 ‘오로지 인간’에서부터 인간에 대한 연민과 함께 실천하는 삶으로써 패러다임은 시작될 것이다.


논제 3: 고통과 함께 쇠약해가는 사람의 인생. 고통이 불가결한 삶의 근본 요소라고 규정한다면 인간의 실존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나아가는 것일까?

Ⅰ. 서론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구별하게 되었다고 한들 인간이 홀로 유일한 원리를 통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하는 것에는 오류가 발생한다. 우리의 선택이 무결함은 유토피아 또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또한 선악의 구분을 확정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부분적으로 관계 속에서 정의된 것들이기 때문에 시간, 공간 등의 여건이 바뀌면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교차될 여지도 있다. 응보적 처벌은 피해자를 위한 정의인가 아니면 처벌 당사자에게 내리는 또 하나의 고통일까? 여전히 인간이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 결정지을 수도 없으며,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조차 불확실하다. 역사적으로 악을 악으로 바라보지 못한 상황에서 비극은 시작되었고 결과로서 고통은 배가 되었다. 여기서 고통은 죽음과 맞닿은 육체적 고통과 삶의 가치가 무너져 버린 정신적 고통 모두를 포함한다. 카인의 살인부터 오늘날 무수한 개인적 원한에 의한 범죄, 집단에 의한 개인 희생,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 그리고 한 개인의 내적 갈등까지, 고통은 모습을 달리하며 같은 시공간에 존재해 왔다. 
 
그래서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은 '삶이 고통이다'라는 틀 안에서 모든 것은 무의미할 수 밖에 없다며 절망하고 아파한다. 그렇지만 '신학에서는 결국 모든 것은 죽을 운명이지 않냐'라는 그들의 반문에 아니라고 답한다. 이 답은 '모든 것이 영원하다'는 메시지를 함의하지 않는다. 육체의 소멸은 정해져 있는 법칙이다. 다만 모든 것의 목적을 죽음에 두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죽음의 강조는 살아있음을 약화시키고, 나와 너는 누구며, 남자와 여자는 누구며, 부모와 자녀는 왜 있는 것이며 인간은 짧은 인생을 숨쉬다 한 줌 흙으로 사라지는 존재 이상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음에도 '인간은 실존할 수 있다'는 근거를 고통을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느냐는 문제에서 찾으려 한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물음에 예수를 역할 모델로 제시하고, 우리에게 '희미해진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할 것을 요청한다. 흠결 있는 인간의 뜻이 자발적인 동의로써 완전한 신의 뜻과 합치되는 순간에 나로부터의 이탈(엑스타시)을 체험하게 된다. 이 글은 바로 그리스도교 안에 나타나는 위와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라보며 우리가 우리 됨을 어떻게 받아들여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 '아담과 이브와 함께 타락한 에덴동산', 대 얀 브뤼헐과 피테르 파울 루벤스, 1615.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Ⅱ. 본론

ⅰ. 고통이 가지는 시대적 상대성과 지금 우리가 가진 고통은 무엇일까

통시적으로 인간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기술적, 사회 문화적 요인의 영향을 받아 상대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먼저 물리적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하루의 생존마저 위협 받던 선사시대 사람들에게는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환경이 고통의 주요인이었다. 중세를 거쳐 점차 학문이 발전하고 수준 높은 기술의 도약이 이루어지면서 상당 부분 고통의 원인들이 사라졌지만, 또 다른 원인들이 동시에 생겨났다. 기술로도 막지 못하는 사회적 갈등, 국가적 갈등 그리고 종교 문화적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오히려 이성과 지식의 발전이 이러한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종합해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첨단 기술은 발전해가고, 인간의 지식은 스스로 위대하다고 자부하지만 고통은 그에 맞춰 나타나 우리를 뒤흔든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사회는 진보했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고, 이 때문에 비참한 결과가 빚어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백세 인생을 노래하며 연장된 수명과 함께 고통도 이에 맞춰 크기를 키웠다.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과학적 이성의 오만함이 고통을 가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인간은 발전된 지식과 기술을 도구로 "외부 대상을 지배한다는 일차원적인 패러다임"을 내세웠다. 즉, ‘발전하다’의 인간 언어가 ‘우월하다’는 개념과 동일하다고 믿는 몇몇 주체들의 오판이 공동생활의 참된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과연 인간이 이룬 문명은 순수 인간에 의해서 창조된 것인가? 이 물음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미받으소서"에서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창의력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 생태 위기의 근원에는 “기술 발전에 걸맞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현대인들이 기술의 진보를 획일적인 패러다임”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특히나 신 중심의 중세 사회보다 이성이 중시되는 근대부터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 사상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인간 중심 사상의 귀착은 고통이다. 여기서 인간 중심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개별적으로 존중 받고 가치 있게 대우 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념을 기준으로 양분된 집단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 나의 소유를 위해 남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 등의 이기적인 모습의 인간 중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공동 관심사와 사회적 결속 강화가 인간 중심주의로 인해 저해되고 있는 상황”을 증명한다.

현대인의 고통은 “차별과 말살의 논리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많은 예언자들은 지금과 같은 인간 중심의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다. 하지만 당대 종교 지도자들과 위정자들은 합리성을 내세우며 그럴 듯하게 인간의 언어를 신의 언어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쉽게 말하면, 그들의 우상을 하느님 권위의 후광으로 감추려고 모색했다. 기득권층이 설정한 왜곡된 계시에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소외되어 갔고 죄인으로 낙인받았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소외시키는 데 공의의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 상호 간의 장벽과 차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하느님이 그 장벽과 차별을 보증하듯이 말하면, 인간의 미래는 없다.” 이 사실을 현대인들이 자각하여 “궁극적으로 온전한 자아실현을 실천하며 온갖 예속에서 벗어날 때” 고통에서 벗어날 한 줄기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ⅱ. 예수가 보여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그 실천

우리는 예수가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우리의 실존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들은 “예수가 인간이 행한 자기 정당화의 최종적 수단을 없애고, 그 논리를 파괴하기 위해 같은 논리로 맞서지 않고 아버지를 신뢰하여 죽음으로써 인간 상호 간의 소외 말살의 악순환을 깨뜨렸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리고 동시에 용서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계명을 어기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응당 그에 맞는 율법과 의례로 죄인들을 속박했다. 악을 행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보이는 질서로 해방되지 못했고, 결국 인간들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인 파괴의 논리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폐쇄적인 패러다임은, 지속해야만 하는 인간의 창조를 정지시켰고,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머무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폐쇄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실천하는 자유를 획득할 것을 알려 준다. 나와 너의 차이는 각자가 상대방을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간극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며, 이는 공동의 가치를 새로이 구성할 가능성을 만드는 기회다. 나치가 유대인을 핍박하는 것은 다름에서 비롯된 갈등을 폭력과 가치의 획일화를 통해 억지로 해결하려고 한 악의 예다. 그리고 독일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인간들이 왜곡된 패러다임에 갇혀 새로운 세계와 인간관계를 보지 못하는 것을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구태의연한 악순환에서 예수가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우리가 당면한 여러 고통들은 절대 해결되지 않고 더 큰 고통으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예수는 우리에게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소서”라는 말과 함께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김을 실천하는 용서가 새로운 미래의 지평을 연다”는 것을 알려 준다. 예수가 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는, 자기 정당화와 인과응보의 논리가 포함되지 않는다. 하느님 자녀로서 해야 하는 용서가 포함될 뿐이다. 이로 인해 고통에서 벗어난 인간 본연의 “참다운 자유”와 우리를 위해 계획된 구원의 새로운 체험과 상황이 펼쳐진다. 때문에 오늘날 서로를 죽이고 악행을 자행하는 우리 안에 희미해진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하느님과 함께 인간의 창조를 완성시켜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 고통은 끊어지지 않고, 회의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삶은 무의미해질 뿐이다.

ⅲ. 우리 삶에서 사랑을 회복할 때 고통의 힘은 약화된다

하느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써 예수가 보여 준 행적들이 당신의 논리임을 나타내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인간의 실존을 재인식하고 이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실천적 배움이 필요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하느님을 강조하고 있다. 자비의 어원적 의미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비의 어원에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그렇다면 자비의 하느님은 곧 사랑의 하느님이다. 예수 역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가려고 노력했고 실천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사랑이 어디까지 실천되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가 사랑인지를 보여 준다. 앞에서 언급한 ‘해방과 자유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더불어 ‘예수의 사랑’은 바로 예수가 정치적 핍박과 모진 십자가의 고통에서도 하느님의 아들로 실존할 수 있던 근본적 이유다.

예수는 우리에게도 신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과 비슷한 모습을 가진다. 다만, 순간 순간 나타나는 죄스러운 행동에 의해 희미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신성을 가진 우리는 자발적 의지로 전진하는 존재라고 재해석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초월적인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짐으로써 피조물 감정이 고백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그토록 바래왔던 하느님나라는 결코 우리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식을 전환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내면에서 하느님나라가 실현됨과 동시에 나로부터의 이탈(엑스터시)을 체험하게 된다. 이로써 갇혀 있던 우리의 시선의 외연이 확대되어 나와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할 수 있고, 세계 시민적 연대가 이루어지면서 고통을 이전과 다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초월적인 존재와 기도로 소통함으로써 내 실존을 계속 확인 받는 것이다.

Ⅲ. 결론

우리는 여전히 고통에 아파한다. 부모에 의한 아동 학대, 극단주의 이슬람의 테러 자행,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갈등, 취업이 쉽지 않은 고용구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간격 그리고 국가 간 긴장 상태 등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회 구조적인 흠결이 너무나 많다. 그 안에서 우리가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할 때, 또 다른 히틀러를 만들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닫힌 사회 안에 우리는 갇혀 있었다. 새로운 인간 관계와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는 노력보다 '내가' 소유하는 것을 잃을까봐 ‘나’ 중심적인 세상을 꾸려 왔다. 나와 너가 단절된 관계를 지속하면, 점차 공동체 정신이 희미해지고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가 더욱 뿌리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악순환에 대해 예수는 우리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혁명을 보여 주었다.

예수는 말살과 차별의 논리로 하느님을 찾지 말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개인 간 차이는 더 이상 고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파하는 내 이웃에 대해 가엾이 여길 줄 아는 것과 내가 가진 무언가를 조금 더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하느님을 인정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기득권이 자신들의 특권을 헌신적 봉사의 기회로 사용하는 것도 해당된다. 더 이상 위계질서에 의한 수직적 인간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한 자녀로서 서로의 차이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기회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고통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마음에 선한 것만 담아라!” 오늘날에도 예수는 우리의 예수다. “예수의 생애가 영원히 현시성을 지니”므로, 우리는 우리들 삶에서 예수가 체험한 사건들을 다시 체험해야 한다. 고통의 악순환을 지속시키지 않고 철폐하며,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자유를 누리고 새로이 우리 앞에 열린 행복한 지평을 기대해야 한다. 고통을 벗어내고 아버지께로 돌아간 예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존 양식”을 취한 것이다. 우리 역시 억압하는 고통에 아파하지 않고 새로운 실존 양식을 취해야 한다. 예수가 보여 준 십자가의 길의 궤적을 공유하려면, “원시 신앙 공동체가 자신들의 실존을 내어 준 것”처럼, 우리 역시 죄에 벗어나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즉, 또 다른 바울 사도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인간이 만드는 장애와 차별들을 넘어서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자유, 사랑과 일치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 과정에 우리는 실존하며, 고통을 이겨내고, 창조의 완성을 향해 진보할 것이다.

최우혁(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립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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