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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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공직생활을 할 때이고 내가 2급 과장을 할 때의 일이니 대략 25년 전이다. 비슷비슷한 또래 몇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만약 기관장이 당신에게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였다.

다행히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서 바로 이러이러한 이유로 그것은 안 된다고 얘기하겠다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이 조용히 나서서 얘기를 했다.

자기라면 바로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겠다. 일단 검토해 보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서 2-3일 뜸을 들였다가 다시 찾아가서 ‘검토해 보았더니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고 역효과도 만만치 않아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라고 얘기하겠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일을 의도대로 풀어 가기도 쉽고 윗사람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략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조금 뒤 그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말했다.

"아까 그 친구는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임원으로 승진할 것 같네."

그 때만 해도 임원은 로또 복권만큼이나 까마득한 희망이던 때였다.

그런데 십수 년 후 그는 정말 임원이 되었다.

그때 일을 돌이켜보면 내가 당시 본인은 물론 다른 누군가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다른 말이 있었다.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자리에서는 하지 못했던 흉중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임원이 되더라도 그의 힘으로는 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고 말 것 같네."

과연 그것도 세월이 지나고 보니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년 인사로 이 얘기를 전하고 싶다. (사진 출처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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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그때 그 친구가 내린 답을 자신의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양의 유교적 전통에 따른 답이라면 그것은 아니다. 그 친구가 내렸던 답은 정확히 동양의 법가(法家)들이 가지고 있던 답이었다. 최고의 법가서 "한비자"의 세난 편은 바로 그 친구가 했던 답의 영락없는 원조였다.

그런 사람들과 달랐던 사람이 바로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전설적 재상 자산(子產)이었다. 그는 임금과의 대화에서나 강대국과의 외교적 대화에서나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옳고 그름이 분명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 '좌전'은 그 모든 경우의 대화에서 상대방이 그의 말을 기꺼이 수긍했을 뿐 아니라 그 말에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아무도 자산이 자기를 비난하거나 공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르치려 한다는 생각도 갖지 않았다. 자산에게는 옳고 그름이 가장 우선된 고려사항이었고 다른 모든 고려사항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25년 전 그의 말이 구태여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런 대답에 자신의 어떤 미진을 전제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고 잘못이라면 그것이 바로 잘못이었을 것이다. 곧 옳고 그름보다 다른 고려사항을 더 먼저 고려하였다는 것이다.

자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중원에 알려졌을 때 노나라의 한 청년이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애도하였다고 '좌전'은 기록하고 있다. 그 젊은이가 훗날 인류의 성인이 된 공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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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과 달리 중국이라는 나라가 큼직하게 머리 위에 다가와 있고 너그럽기만 하던 미국이 엄청나게 까탈스런 존재로 옆에 와 있는 이때 정나라만큼이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책임지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년 인사로 이 얘기를 전하고 싶다.

 
 

이수태
저술가, 칼럼니스트, 전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행정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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