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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미국은 우방인가?- 이수태

다시 한번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이야기해 보자. 1905년 7월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는 도쿄에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비밀리에 만나 중요한 밀약 하나를 체결하였다. 미국에서는 비밀합의(Secret Agreement)라 하고 일본에서는 협정(協定)이라고 하는 이 밀약에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 통치를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보호권을 인정한다고 상호 합의했다. 체중 148킬로그램의 코끼리 같은 태프트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필리핀 초대 총독을 지낸 막무가내의 보수주의자였다.

바로 그 다음 달인 8월 미국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에서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와는 다른 사람)이 주선하여 러일전쟁의 막을 내리는 이른바 러시아와 일본 간의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로서는 패전에 따른 치욕적인 조약이었는데 이 조약에도 역시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뼈아픈 이 조약의 주선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뒤에 막후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역시 저 코끼리 인간 태프트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조약을 중재했다는 공으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미 청나라는 188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개입권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은 1905년 11월 소위 을사늑약을 거침없이 밀어붙여 사실상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말았다. 한국을 필리핀과 바꾸어 일본에 팔아먹은 주역 태프트는 필리핀 식민통치 등에 따른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1908년 제2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미국은 정치적으로는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겨우 민간 차원에서 몇몇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일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한도 안에서 선교 사업을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미국은 확대된 2차 대전에 개입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었고 우리 국민들은 일본이 이기라고 놋수저며 비녀를 갖다 바쳐야 했다. 그러다 원폭 두 방으로 미국은 일본의 무릎을 꿇리었다.

   
▲ 제27대 미국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 (1908)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미국은 일본 패망 뒤 3주가 지난 9월 8일에야 뒤늦게 인천에 상륙하였다. 일본 패망과 거의 동시에 청진과 원산 등지에 상륙한 소련과 관할권 힘겨루기를 하며 미국은 북위 38도선을 소련에 제안하였고 쉽게 합의를 보았다. 이어서 태평양 총사령관 맥아더는 비행기로 남한 일대에 포고문을 뿌렸다. <조선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이 포고문에서 그는 38선 이남에서의 모든 통치권은 자신이 갖는다는 사실과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는 엄벌에 처할 것임을 서슬 푸르게 선포하였다. 해방을 축하한다는 형식적 인사 한마디 들어 있지 않았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미국이 한반도에 드러낸 첫 모습이었다. 3년 뒤 38선 이남과 이북은 각각 정부를 수립하였으니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그렇게 국토는 분단되고 남한과 북한이 생겨난 것이다.

정부 수립 불과 2년 뒤 북한의 김일성은 남측을 무력으로 공격하였다. 1949년 6월에 미군이 철수한 것을 기회로 그는 무모한 결정을 한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 아는 것이니 만큼 길게 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3년간 3만 7000명의 미국 젊은이들을 희생시켰다. 훗날 15년 남짓 개입했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 희생자 5만 7000명과 비교하더라도 미국의 희생은 과연 컸다.

이후 우리는 미국을 우방이라 불렀고 특히 혈맹이라는 표현으로 그 돈독한 관계를 규정했다. 우리는 오래 그 혈맹에 따른 피값을 치러야 했다. 우리는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는 베트남 전쟁에 미국을 돕기 위해 참전하여 5000여 명의 한국 젊은이들을 희생시켰다. 그것은 그래도 한국전쟁 후 십수 년에 불과하던 때였다. 반세기도 더 지난,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반대하던 이라크전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날의 피값을 치르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전투 병력이라도 참전시켜야 했다.

맥아더가 끌고 왔던 미국의 대규모 군대는 70년이 가까워 오는 오늘날까지도 이 땅에 주둔해 있다. 일찍이 당나라 군대도 들어온 적이 있고 명나라 군대도 들어온 적이 있고 가깝게는 청나라 군대도 들어온 적이 있지만 이렇게 오래 주둔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나라를 집어삼킨 일본 군대도 통산 주둔 기간이 이렇게 길지는 않았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1차로 미 제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시켰다. 이후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전면 철수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내부적 반대로 이 계획은 공군과 해군을 잔존시킨 가운데 지상군만 철수시키는 것으로 변경되었지만 그마저 박정희와 일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어렸을 적 나는 미국이 우방이며 든든한 혈맹임을 강조하는 온갖 선전매체에 둘러싸여 살았다. <리버티뉴스>와 <대한뉴스>에서 자랑스러운 우방 미국의 모습은 항상 얼마간의 앙각으로 처리되었고 늘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이를 데 없이 당당하고 너그러웠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나라 어디를 둘러보아도 미국이 자랑스러운 우방이며 우리를 수호하는 혈맹이라는 표지가 보이지 않는다. 1966년 존슨 대통령이 내한했을 때 연도를 메우고 열렬히 환영하던 인파가 눈에 선하다. 아마 존슨의 생애에서 그렇게 환영받아 본 사례가 다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을 네 번이나 방문했다고 하지만 언제 뭣하러 어떻게 왔다 갔는지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런 변화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의미가 크게 변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코끼리 인간 태프트가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거래했을 때 그에게 있어서 한국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좋은 한갓 거지 같은 나라였을 것이다. 그런 사정은 1945년 남북 분단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한반도를 분단하는 데에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독일은 패전국으로 분할 점령을 당했다지만 일본도 아닌 우리는 무슨 이유로 분할 점령을 당해야 했는가? 결국 이유라고는 당시가 동서냉전의 큰 획이 그어지던 시점이었고 안타깝게도 그 획이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갔다는 사정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단은 어쩌면 미국도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쨌든 미국으로서는 공산주의라는 지도이념으로 무장된 새로운 세력과 그 강력한 실체로서의 소련이라는 존재 앞에서 그들 또한 제한된 선택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리버티뉴스 500보를 맞이하여 이원우 공보부장관이 주한 미국 공보원장 헌팅톤 데이몬에게 감사장과 상패를 주고 있다. (이미지 출처 = KTV 대한뉴스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이어진 전쟁에서 미국은 철저히 냉전의 구도 안에서 행동했다. 그것을 민족적 차원에서만 바라보아 단지 외세의 개입이었다고 부정적으로만 보거나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형태로든 통일은 되었을 텐데 하는 것은 순진하고도 추상적인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에 관한 한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었고 그런 한에서만 한 차원을 더한 민족적 차원을 언급할 자격도 가진다. 현실적으로 남한은 미국의 참전으로 살아남았고 미국은 이 참전으로 3만 7000명의 젊은이들을 희생시켰다. 일단 우리는 그 부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차원을 더해 보자. 그것이 꼭 남한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앞서 우리는 남북 분단이 냉전시대의 큰 획이 운 없게도 한반도를 횡단한 결과라고 했다. 그 사정이 또한 그들의 참전과 희생에도 적용된다. 그 참전과 희생은 우리를 멸망에서 건져 주었지만 동시에 미국으로서는 동서양을 양분한 거대한 냉전구도의 한 쪽에서나마 미국을 가룰 이 없는 패권국가로 세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금까지도 그들이 입만 벙긋하면 외쳐 대는 저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의 사실상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일환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미쳤다고 머나먼 동방 한반도에 와서 삼만 칠천의 생령을 바쳤겠는가?

전쟁이 나고 이제 곧 칠십 년이 되어 간다. 그 피값의 시효는 언제까지인가? 인구 비례로 따진다면 우리도 그 못지않은 생령을 베트남전에 희생시키지 않았는가? 이제 그동안 서로를 옥죄어 온 저 혈맹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아시아의 평화와 국가의 존엄 그리고 민족의 통일에 기초한 보다 성숙된 관계를 다시 구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북핵이 떠올라 이런 재검토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다. 북핵은 군사적 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에서 비롯한 북한의 다급한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대두된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 궤멸 등은 충분히 북한 정권에 공포감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북핵에 필요 이상의 공격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을 미국과 일본, 한국에 위협적인 요소라고 소리 높여 강조하는 세력은 미국 공화당과 일본 자민당, 한국 보수주의 정당이다. 미국과 일본의 보수 세력은 중국과의 새로운 대결구도에서 한반도를 전략적 방패이자 보루로 삼고 싶고 한국 보수주의 정당은 안보위기를 정권 유지의 기반으로 삼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 공화당 정권은 민주당 정부에서 공들여 맺어 놓은 제네바 합의를 부시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휴지 쪽처럼 날려 버렸다. 한국 보수주의 정권은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과 합의한 남북 종전선언 추진, 해주공단 건설, 개성-신의주 철도 및 개성-평양 고속도로 확충, 안변, 남포 조선협력단지 조성, 백두산 관광사업 등 가슴 벅찬 여러 사업들을 역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모조리 휴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미국은 사드라는 정체불명의 무기를 한국에 배치하겠다고 나섰다. 비교적 합리적이라는 오바마 정부에서 이 발상이 나왔다는 것은 이 무기가 간단치 않은 다목적의 무기임을 말해 준다. 공화당의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부터 이 의혹투성이의 사업은 더욱 노골적으로 또 무모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1조가 넘는 거액의 비용 부담도 요구하고 나섰다. 우리는 이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과연 우리의 우방인가? 148킬로그램의 태프트 이래 107킬로그램의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한 번도 자국의 이익을 희생시켜 가며 한국의 이익과 편의를 돌보아 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역사가 토인비는 다가오는 21세기 이후 약 1000년간은 서양문명과 중국문명 간의 심각한 투쟁 양상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투쟁은 그동안 서양문명이 이슬람문명과 수 세기에 걸쳐 치렀던 갈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 역시 그렇게 본다. 그러나 토인비는 그 가열찬 갈등의 천 년에 극동의 한반도가 어떤 운명에 처해질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떠할 것이며 거기서 한반도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우리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될 우리의 몫이다.

   
▲ 북한 열병식. (이미지 출처 = YTN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가 그 치열한 갈등의 과정에서 민족적 존엄을 지키고 삶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외국 군대를 이제는 돌려보내야 한다. 이미 몇 번이나 스스로 돌아가려고 했던 군대다. 주둔한 외국군은 반드시 다른 외국군을 불러들인다. 한 세기 전 청군이 일본군을 불러들였듯이. 이미 중국은 경제적 차원의 인해전술로 한반도에 새카맣게 상륙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외국군 철수에 상응하여 우리는 강력한 자주 국방으로 무장하여야 한다. 군복무 기간을 경쟁적으로 단축하겠다는 대선 공약이나 징병제 대신 모병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나약하고 어설픈 주장 따위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마디로 70년 넘는 외국군 주둔 기간 중에 형성된 맥 빠지고 겁에 질린 무(武)의 정신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국가 운영의 최고의 지향은 통일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통일을 도와주는 나라만이 우리의 새로운 그리고 확실한 우방임을 선언해야 한다. 통일을 향한 모든 노력을 친북이라 왜곡하여 방해하고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나라를 열강의 분할통치에 내맡기는 세력은 단호히 분쇄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 이외에 그 어떤 강대국에도 기대어서도 안 된다.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 행위인지를 국민들이 자각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덕하고 정의로운 내치가 국가운영의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지정학적 위치는 확실히 우리에게 시련을 안겨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나라로서 지정학적 애환이 없는 나라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운명을 탓해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좌고우면하는 나약하고 비겁한 행동은 결코 이 시련의 천 년을 뚫고 갈 수 없다. 나는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할 때 저 춘추시대 진(晉)나라와 초나라, 오나라 사이에 끼어 있던 약소국 진(陳)나라의 운명을 종종 생각한다.

진나라는 우선 권력의 핵심이 썩어 있었다. 군주가 신하의 부인을 여러 사람과 윤간하다가 그 아들에 의해 피살되는 등 썩은 권력의 어처구니없는 양상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잇달았다.

회공이 진나라의 군주로 있던 기원전 505년, 오나라가 강대해져서 초나라의 도읍 영을 점령할 정도가 되었다. 당황한 회공은 대부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전통적 강국 초나라에 붙기를 바라는 사람은 오른편에, 신흥 강국 오나라에 붙기를 바라는 사람은 왼편에 서라고 했다. 중심을 갖춘 나라와 군주라면 있을 수 없는 치욕적 질문이었다. 더욱 치욕적이었던 것은 신하들이 이 요구에 따라 속수무책으로 줄을 섰는데 결과는 각자의 개인 땅이 오나라에 가까우냐 초나라에 가까우냐에 따라 갈라졌던 것이다. 자주성을 잃은 나라의 참담한 몰골이 아닐 수 없었다. 진나라는 형세에 따라 두 나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객기만 부리다가 결국 초나라에 의해 건국 600여 년만에 지도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나라 형세를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사드를 둘러싼 현금의 중미 갈등은 잠시 어른거리다 사라질 일시적 환경이 아니다. 이것은 거칠게 전개될 향후 천 년의 불길한 서곡임을 알아야 한다. 건국 70년을 코앞에 둔 대한민국. 정말 정신 차리고 자주성을 갖춘 당당한 대한민국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드 배치 여부는 긴 역사의 단추를 새로운 천 년 동안 바로 꿰느냐 마느냐 하는 엄중한 과제에 그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이수태
저술가, 칼럼니스트, 전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행정부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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