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50]

메주야, 잘 뜨고 있니? 나는 서울에 잘 도착했다. 네가 뜨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해 서운하구나. 하지만 아이들이 네 곁에 있으면 네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피난을 온 거란다. 지난해에도 메주 띄운다고 메주를 아랫목에 두고 지내던 며칠 동안 참 많은 일이 일어났거든. 다나가 파 먹고, 다랑이가 뒤로 넘어져 으깨고, 다울이가 걷어차고.... 올해는 아이들이 없으니 너는 처음 모습 그대로 무사할 줄로 안다.

물론 속으로는 많은 일을 겪어 내고 있겠지.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네게 달려들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네가 누운 자리는 못 견디게 뜨거울 테고, 다울이 아빠는 수시로 너를 들었다 놓았다 귀찮게 하겠지.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네게는 마법과도 같은 변화가 일어날 거야. 너는 더 많은 생명을 살게 하는 집이 되고, 더 깊은 맛을 만들어 내는 씨앗이 될 테니까. 아직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난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서울은 겨울이 없는 곳이란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문을 꼭 닫고 있으면 온도 변화를 느낄 수가 없어. 언제 어느 때나 더운 물이 펑펑 나오고, 냉장고에는 먹다 남은 온갖 음식이 가득 쟁여져 있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겨울에도 차가운 맥주와 바나나를 사다 먹고, 밤 늦게까지 야식을 시켜 먹는 일이 예사란다. 그럼에도 잘 살고 있으냐고? 물론이지. 아주 잘 살고 있어. 적어도 겉모습만은 굉장히 좋아 보여. 다만 과식과 절식 사이에서, 짜릿한 외식과 지루한 집밥 사이에서 아찔한 줄타기를 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긴 하지만 말이야.

이대로 괜찮은 건지 자꾸만 묻게 되는데 오히려 걱정을 듣는 것은 나더구나. '서울 오는데 옷 좀 신경 쓰지 그게 뭐냐, 애들 얼굴이 까칠한데 고기나 우유 같은 것 좀 먹여라, 너희는 뭐 먹고 사니? 여긴 먹을 게 새고 샜으니 실컷 먹고 가라....'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움츠러드는 느낌을 면할 수가 없어. 내가 뭔가 크게 잘못 살고 있고, 내가 참 가난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나는 절망감에 빠지려는 그 순간에 언제나 너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한단다.

'괜찮다, 나는 지금 메주처럼 뜨고(발효되고) 있는 중이다. 저 말에 휘둘리면 썩어 버릴 것이다.'

메주야, 너 혹시 메주 도사 이야기 알고 있니? 옛날에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선비들이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 방에 거렁뱅이 차림의 노인이 들어왔더란다. 그랬더니 선비들이 그 보잘것없는 노인과 한 방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던가 봐. 보나마나 무식쟁이겠다 싶었는지 시 짓기 내기를 해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이 방에서 나가는 걸로 하자고 했대. 낌새를 알아차린 노인이 시 대신 그림을 그리겠다면서 붓을 들더니 배를 한 척 그렸지. 순간,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진짜 배에 타고 있는 마술이 일어났어.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선비들에게 노인이 말했지, 이 배가 닿는 섬에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싱싱한 복숭아를 따면 젊어질 것이나 죽을 위험에 처할 것이고, 쭈글쭈글한 복숭아를 따면 늙어질 것이나 살 길이 열릴 것이라고. 그 얘길 듣고 정말 복숭아나무가 있는 섬에 닿았는데 선비들은 하나같이 싱싱한 복숭아를 따 먹고 젊어졌대. 그러고는 좋아라하며 다시 배에 탔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며 죽을 위험에 처했지. 그제서야 선비들은 울며 불며 후회를 하고 소리를 쳤는데, 그때 주막 주인이 방문을 벌컥 열고 보니 선비들이 메주 덩어리를 입에 문 채 살려 달라 소리를 치고 있었다는 거야. 보잘것없는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그 노인이 바로 메주 도사였던 거지.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전율이 일었어. 메주 도사가 선비들에게 했던 말이 평소 내가 경험과 직관을 통해 믿고 있는 것을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야. 젊고 탱글탱글하고 겉보기에 좋은 것은 죽음의 길이요, 늙고 쭈글쭈글하고 볼품없는 것이 삶의 길이라는 믿음! 생각해 봐. 모두 다 연예인처럼 살고자 한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화장품, 목욕용품, 미용용품, 옷, 가방, 액세서리.... 없어도 될 것들이 넘치게 생산되고 비참하게 버려지고 있어.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그저 남 보기에 번듯해 보이고 화려해 보이면 좋은 건 줄 알고 껍데기만 치장하니까 말이야. 뿐만 아니라 크고 반짝거리고 중독성 있는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농약, 화학비료, 성장촉진제, 왁스, 각종 식품첨가물... 별별 것들이 다 생산되고 있어. 보다 그럴듯한 결과를 위해서라면 비열한 과정 따위는 다 용서할 수 있다는 식이지. 아니, 용서고 뭐고 과정 자체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눈치야. 너무 많은 것을 누려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길게 바라볼 여유가 없는 거란다.

이런 현실에서는 밥상 하나 오롯이 지킨다는 게 독립운동만큼이나 어렵고 의미심장한 일인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맛있는 거 사 줄게."라는 따듯한 배려를 애써 물리치며 밥을 짓는다. 먹지 않아서 버려지기 일보 직전의 남은 음식들을 처리하기도 하고 말이야. (우리 집 개와 닭이 가까이 있다면 음식이 쓰레기가 되는 말도 안 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을 텐데.... 이곳에도 개가 있지만 남은 음식을 주면 절대 안 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내가 개가 되고 있어. ㅠㅠ) 겨울이 없는 부엌의 안주인은 여왕처럼 행복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이렇게 처절하더구나.

메주야, 나도 메주 네가 아니었다면 참되고 선한 것이 아름답다는 진실을 알지 못했을 거야. 과정까지 겪어 낸 자의 자부심과 긍지, 만족감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밥상 앞에서 생명을 떠올릴 수도 없었을 테지. 만약 서울에서도 여기저기 메주 띄우는 집이 생겨난다면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안목과 맛을 느끼는 감각 또한 달라질 텐데.... 과연 그런 기적 같은 날이 올까? 메주야. 네가 정말 그립다. 사랑해.

2017. 12. 겨울이 없는 부엌에서 잔반 처리반으로 활약 중인 부엌데기가.

서울 올라오기 바로 전날 아이들과 함께 빚은 메주. 집에 돌아가면 메주 냄새가 나를 반겨 주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뻥 뚫린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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