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51]

12월 20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생일인 줄도 모르고 아침인 줄도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는데 신랑이 안방 문을 열고 말했다.

"얘들아, 오늘이 엄마 생일이다. 축하해 줘." (정작 본인은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부끄럼쟁이 같으니라고~)

"어, 엄마 생일이야? 그럼 내일이 내 생일이네. 엄마, 축하해." (다울)

"내 생일은 왜 안 와? 왜 내 생일만 늦게 오지? 오늘이 내 생일이면 좋겠다." (다랑)

"야, 너는 엄마 생일까지 뺏어가려고 하냐? 정말 나쁘다." (다울)

다울이와 다랑이 사이 실랑이를 뒤로 하고 부엌으로 나갔다. 신랑이 부엌 난로에 불을 피워 놓은 덕분에 부엌 공기가 훈훈했다. 자, 이제 아침을 열어 볼까? 난로에 고구마 냄비를 올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그릇 정리까지 하고 있는데 또 다시 신랑이 말했다.

"애들 데리고 해수탕에 목욕이라도 하러 갈래요?"

"애들 목욕시킬 때가 되긴 했는데... 에잇, 됐어요. 집에서 시키지 뭐. 날도 추운데 집 나가면 고생이다, 고생."

솔깃한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며칠 뒤 나들이 계획이 있기도 해서 딱 잘라 거절을 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내 할 일을 했다. 다나 똥 치우고, 아이들 옷 챙겨 입히고, 절 운동하고, 군고구마로 아침 먹고, 빨래 널고, 그러고 나서 미역국 끓일 채비를 했다. 내가 나를 위해 끓이는 마역국이라... 어쩐지 기분이 남달라서 먼저 나 자신한테 물었다.

'어떤 미역국이 먹고 싶니?'

'맑고 담백하고 구수한 것으로 해 줘. 그게 나다운 맛인 것 같아.'

'그래, 알았어, 너 닮은 맛으로 해 줄게.'

담백한 맛을 살리려면 멸치 육수를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신에 무를 얄팍하니 썰어 넣기로 했다. 구수한 맛을 위해 생들깨를 갈아 넣을까 하다가 그렇게 되면 맑은 느낌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들깨가루를 넣었다. 간을 맞출 때도 국간장 조금에 천일염을 넣었다. 그랬더니 정말 맑고 담백하면서 구수했다. '이야, 바로 이 맛이야. 내 마음에 쏙 든다.' 흡족한 표정으로 국물 맛을 보고 있었더니 다울이가 안쓰럽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엄마는 생일인데도 일을 많이 하네. 아빠 보고 미역국 끓여 달라고 하지."

"야, 그럼 생일엔 내가 왕이네 하고 빈둥거리기만 해야 하냐? 여봐라, 미역국을 끓여라! 여봐라, 청소를 해라... (웃음) 아빠는 아침 일찍부터 나무하고 불 때고 얼마나 고생이 많냐. 아빠가 미역국 끓이고 엄마가 나무하는 것보다야 이게 낫지."

"알았어. 내가 크면 엄마 생일날은 내가 미역국 끓여 줄게."

역시 큰아들은 다르다. 생일인데도 특별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엄마를 짠하게 바라볼 줄도 알다니... 말만이라도 고맙다며 웃어 넘겼는데, 내가 다나랑 낮잠 자고 일어났더니 다울이가 나를 애타게 불렀다.

"엄마, 나와 봐. 우리가 엄마 생일상 차렸어."

"정말? 어디 보자."

부엌에 나가 봤더니 다랑이랑 둘이서 한 상 거하게 차려 놓았지 뭔가. 장기알로 장식한 케이크에 코뿔소 고기, 바둑알밥, 레고 쿠키... 아궁이를 만들어 놓고 코펠 냄비까지 올려 나름 까다로운 조리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생일상이었다. 그러니 못 먹는 거라도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며 먹을 수밖에...

아이들이 차린 생일상 앞에서 찰칵. 아직 어려도 받는 마음보다 주는 마음이 더 기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정청라

"어머어머... 어쩜 이렇게 맛있냐. 케이크가 입에서 살살 녹는구먼. 이거 까만 건 초콜릿인가? 아우, 달콤해."

"엄마, 생일축하 노래도 불러야지." (다울)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신나게 불렀더니 다나가 재미있었나 보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자꾸 또 부르자고 해서 부르고 또 부르고 열 번도 넘게 불렀다. 살다살다 이렇게 지칠 때까지 축하를 받긴 처음이라 어색하면서도 또 얼마나 흐뭇하던지... 그래서 말해 주었다.

"엄마가 받은 최고의 생일 선물은 바로 너희들이야."

"(다랑이는 눈을 동그렇게 뜬 채로) 정말?"

"(다울이는 수줍어하면서) 그래도 선물은 줘야지. 나는 엄마가 낭송 좋아하니까 낭송 책에서 나온 좋은 말 읽어 줄게."

이어서 다울이의 낭송이 이어졌다. "손자병법"에서 싸움에서 이기는 다섯 가지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것이 과연 엄마의 생일과 관련하여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는 아리송하다. 다만 엄마를 위해 무어라도 해 주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느껴져서 더없이 고마웠다.

그렇게 한바탕 시끌벅적 축하를 받고 아이들 목욕시키기에 들어갔다. 집에서만 할 수 있는 웰빙 목욕! 들통에 물을 넣고 거기에 귤껍질, 감국(작고 노란 국화), 시래기, 비자나무 열매 껍질 듬뿍 띄워 난롯불에 푹푹 끓인 다음, 그 물에 목욕을 시키는 거다. 아기 욕조에 다랑이와 다나 넣어 1차로 씻기고, 쉬었다가 2차로 다울이 씻기고, 마지막은 내 차례였다. 평소에는 후닥닥 샤워를 하고 나오지만 오늘만은 나도 따끈따끈 향긋한 물이 담긴 아기 욕조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주 여유롭게 천천히 씻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껏 잘 살아 왔구나. 애썼어. 힘들 때도 많았는데 용케 여기까지 왔네. 태어나길 잘했구나 싶지? 지금의 널 사랑해~'

나한테 하는 말이라 더 쑥스럽고 멋쩍었지만 그러고나니 내가 무척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 누구의 축하와 사랑보다 내 스스로의 축하와 사랑을 더욱 반가워하고 기다려 온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뻐하는데 날마다 나에게 말을 걸고 나를 격려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익숙해질 때까지 자꾸 연습을 해 봐야겠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내가 너를 사랑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이렇게 철들어 가는 내가 좋다.

내가 차린 내 생일 밥상. 낮에 끓인 미역국에 떡국 넣어 미역떡국, 무쇠 프라이팬에 김치볶음밥.... 이만하면 특별하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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