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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산이 있다[부엌데기 밥상 통신 - 48]

어떤 이는 설거지만으로도 넌더리를 치며 식기세척기 예찬론을 펼치지만 난 설거지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밥 먹고 나서 그릇 쌓아 두는 일 없이 그때그때 씻으면 부담스러운 일감으로 다가오지 않고 밥 먹기 전에 손 씻는 일마냥 자연스럽다. 

헌데, 싱크대 수채 구멍 청소하기만은 언제나 심호흡을 부르는 괴로운 일감이다. 수채 구멍에 달라붙어 있는 괴물의 살점 같고 지독한 콧물 덩어리 같은 물때.... 눈으로 보는 것만도 역겹고 만지기는 더더욱 싫다. 

하지만 나 아니면 누가 치우나.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를 악물고 깨끗이 씻어서 해치우고 돌아선다. '야호, 드디어 해치웠다. 내가 이겼다!'

이렇게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마음 놓고 지내기를 며칠, 얼마 지나지 않아 물때는 다시 되살아난다. '아니, 또? 또 막혔단 말이야? 엊그제 청소한 거 같은데....'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콩쥐의 빨랫감보다 더 고약한 나의 수채 구멍 물때..... '수채 구멍은 왜 이렇게 자주 막히는가!' 나에게 화두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수채 구멍 물때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수채 구멍의 상태가 내 몸과 마음의 상태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다. 그러니까 수채 구멍이 막힐 즈음이 되면 내 몸도 내 마음도 어쩐지 찌뿌드드 무겁고 뻑뻑해진다. 신랑이나 아이들의 말 한 마디에도 괜히 가시 돋힌 말로 반응하게 되고, 밥 한 끼 차려 내는 것도 힘겹고 지겹게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주어지는 내 몫의 할 일들이 나를 짓누르는 바윗덩어리라도 되는 양 버거워서 잔뜩 움츠린 채 몸서리를 치게 된다.

그럴 땐 좀 쉬어야 할 것 같지만,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어 보면 그거야말로 노답이라는 걸 알게 된다. 쉰 만큼 할 일은 무섭게 쌓이고, 몸은 몸대로 더 축 늘어지고.... 그런 상태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머물러 있다가는 울부짖는 한 마리 짐승, 아니, 괴물이 되고 만다. 미친 듯이 날뛰며 둘레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까지 집어삼키려 드는 괴물 말이다. 지금껏 경험으로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수채 구멍이 막힐 조짐 같은 게 감지되면 제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태산이라도 서둘러 산으로 간다.

산을 올라갈 때는 몸도 마음도 굳어진 상태라 입을 꾹 다문 채 화난 사람처럼 걷는다. "엄마, 산길은 왜 미끄럽지? 누가 참기름을 발랐나?" 하고 새처럼 재잘대는 다랑이 말에 응답할 기운마저 없다. 그저 묵묵히 견디며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 보면 땀이 날 듯 말 듯하면서 막혀 있는 구멍들이 뻥뻥 뚫리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제야 울긋불긋 어여쁜 산도 보이고 내 곁에 있는 아이들의 곱디고운 눈망울과 목소리에도 빠져든다. 마침내 내게 잔뜩 엉겨 붙어 있던 찌꺼기와 먼지들로부터 해방되어 나도 말간 얼굴이 된 것이다! 금방 헹구어 낸 햇살처럼, 박박 씻겨 새것 같아진 수채 구멍처럼 말이다.

산에서 따 온 떡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정청라

요즘 산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앞을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어디나 그림 한 폭이다. 온갖 빛깔 나뭇잎, 푸르른 하늘, 쭉쭉 솟은 나무....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 있어 낙엽을 툭툭 차며 걷는 재미도 좋고 아이들이 행여 넘어져 다칠세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씨 넉넉한 나무 할아버지들이 깔아 주신 단풍잎 매트 위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마음껏 뒹굴고 눕고.... 그러고 나면 정말 기운이 불끈불끈 솟아난다. 물때 가득 수채 구멍 따위? 전혀 두렵지 않다!

산에서 내려올 땐 이렇게 새 사람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위풍당당하게 부엌으로 입장! 물때 가득 수채 구멍 앞에서는 여전히 숨을 고르게 되긴 하지만 '에잇, 이까짓 물때쯤이야!' 하고 용감하게 덤벼들어 빠른 손놀림으로 물때와 대결하고, 내친김에 부엌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먼지 구덩이 싱크대 아래, 뒤죽박죽 선반, 꼬질꼬질 가스레인지 주변.... 내가 모른 척 외면하고 있던 무관심의 현장들을 그렇게 어루만지고 쓸어 준다. (물론 한꺼번에 다 치우지는 못한다. 오늘 하고 싶은 만큼만, 할 수 있을 만큼만. 그래야 지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 부엌이 반짝반짝해지면 나도 따라 반짝반짝 살맛이 나니까. 내가 살아야 흥겹고 신나게 기꺼이 부엌데기로 살아갈 수가 있으니까.

"얘들아, 오늘은 특별히 떡볶이 만찬이다!"

모처럼 개안해진 부엌에서 아이들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면서 나는 다시 한번 산을 떠올린다. 나에겐 신이나 다름없는 산이 있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먹여 살리는 재미에 빠져든다.

새로워진 마음으로 떡볶이 만찬. 가을걷이하느라 함께 애쓴 식구들을 위한 소박한 일탈이다. ⓒ정청라

덧.

올해는 우리 집 감나무에 감이 거의 달리지 않았다. 아쉽고 허전하던 차에 산비탈에 자라는 야생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온 가족이 산으로 출동! 감을 20킬로그램도 넘게 따 왔다. 감이 조금 작기는 해도 아주 달고 쫀득쫀득 찰지다. 산은 이렇게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아아, 고마워라, 산!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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