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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천지[부엌데기 밥상 통신 - 47]

어느 회보에 실린 글에서 학교를 뜻하는 낱말 '스쿨'의 어원이 '여가'를 뜻하는 '슐레'에서 왔다는 얘길 듣고 무릎을 쳤다. 그렇다. 진정한 학교는 '마음껏 풀어 놓음'을 통해 시간의 느슨함을 온전히 누리게 할 때 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 집 아이들(어떤 날은 아랫마을에서 놀러오는 유민이까지)을 보면 정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스스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 뭐 하고 놀까?"로 기획되는 이 학교는 놀 거리를 잘도 찾아낸다. 어떤 날은 종이를 오리고 접고 붙여서 문자, 사진, 노래, 게임까지 담긴 핸드폰을 만들고, 어떤 날은 한자 싸우기 놀이를 한다면서 두꺼운 한자 사전을 꺼내 들고 그 안에서 멋지고 강력한 글자를 끄집어내는 재미에 빠져든다. 또 어떤 날은 강아지 산책시키기 놀이를 하며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 아빠 심정을 느껴 보기도 하고, 때로는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지도 그리기에 열심이다.

어제는 유민이가 가져온 보석(플라스틱 팔찌, 길에서 주운 귀걸이를 이용해 만든 반지 같은 것들)을 한가운데 두고 서로 보석 자랑을 하며 시끄럽게 떠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의기투합을 했다.

"야, 우리 보석 찾으러 갈래?"

"그래, 보석 탐험대 놀이 하자!"

"형아, 나도 갈래."

"좋아, 우리는 보석 탐험대다!!!"

세 아이는 보석을 넣을 가방, 망치, 돋보기 같은 것을 챙겨 들고 곧장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때때로 들려오는 환호성과 웃음소리로 아이들의 안부를 확인하며 혹시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건 아닌지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탕 떠들썩한 입장식이 거행된다.

아이들이 찾은 보석들.... ⓒ정청라

"이모, 우리 보석 찾았어요."

"엄마, 정말 행운이야. 보석을 많이 찾아냈어."

"엄마, 이것 좀 봐. 나도 찾았어."

나는 깜짝 놀라는 체하며 아이들 손에 들린 돌 조각들을 들여다보는데 솔직히 말해서 우습기 짝이 없다. 내 눈에는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보는 돌일 뿐, 호들갑을 떨 만큼 보석다워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아이들은 자기들이 찾아낸 보석 이름을 알려 달라고 성화이니 얼마나 난처한 노릇인지.... 결국 아이들은 나에게 기댈 수 없다는 걸 알고 "광물과 자원"이라는 책 한 권을 찾아내더니 자기들이 찾은 보석이 다이아몬드, 크리스탈, 터키석, 금, 루비 등등이라며 이름을 붙이고 보석 그림 그리기, 보석으로 반지 만들기 활동까지 나아갔다. 거기서 끝이냐고? 아니다. "보석 반지 사세요. 하나에 천 원~!" 하고 외치며 마을을 누비다가 끝끝내 마음 약한 할머니 한 분에게 반지 하나를 팔고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고 녀석들 참 재밌게도 사는구나' 생각하며 마당을 정리하는데 내 눈에는 마당에서 해바라기 하고 있는 온갖 곡식과 채소들이 보석이다. 루비처럼 매혹적인 붉은빛 쥐이빨 옥수수, 맨질맨질 반짝거리며 빛나는 기장, 금빛으로 탐스러운 조 이삭, '호박'이란 이름의 보석에 뒤질세냐 푸짐하게 아리따운 늙은 호박, 둥그런 얼굴 가득 콕콕 박힌 해바라기 씨앗, 노랗게 잘 익은 여주에서 나온 시뻘건 씨앗까지... 가을이라 더욱 풍성한 마당 전시장에서는 각자 제 빛깔, 제 자태로 아름다운 보석들이 널리고 널렸다.

참 신기하게도 예쁘다 아름답다로만 끝나는 보석이 아니다. 내 몸속에 들어와 나와 한 몸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 내 존재까지도 한없이 고귀해지는 듯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먹는 것이 온통 아름다움이라니! 나도 아름답게 살아야겠구나!!!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만나면 '나도 아름답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루비 같은 쥐이빨옥수수. ⓒ정청라
덜 여문 풋팥. 빛깔이 곱다. 까서 팥죽 쑤어 먹으니 꿀맛! ⓒ정청라
금싸라기 조이삭. ⓒ정청라
우리 집 마당 전시장. 온갖 곡식과 열매들이 햇볕 목욕을 즐기고 있다. ⓒ정청라

순간, 아이들이 주워다 놓은 보석을 다시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그렇게나 보석 타령을 하는 것도 자기 안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싶고 그 아름다움과 이어지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게 아닌가 싶었던 거다. 그래서 다시 보니, 역시 새롭다. 대충 곁눈질로 보고는 흔하디 흔한 돌이라고 깔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빛깔도 다채롭고 반짝이며 빛난다. 그러니 함부로 볼 게 아니었다. 곡식과 채소, 주변에 널린 돌... 알고 보면 온통 보석 천지! 알고 보니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의 노래가 지금 내 삶에도 그대로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아름답다.

내 앞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내 뒤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

내 아래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내 둘레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아이들의 곱디고운 눈길이 끝내는 나바호족의 노래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날마다 햇곡식과 열매가 한두 가지씩 추가되어 점점 더 화려해지는 밥그릇을 앞에 두고 이 노래를 불러 봐야겠다. 그렇게 하면 꼭꼭 씹어 먹으며 깊은 단맛을 음미할 수도 있게 되리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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