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시사비평 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공론화 과정, 우리는 준비되어 있을까[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체로 어릴 적에 본 드라마들에는 꼬마들도 외울 만큼 전형적인 대사들이 있었다. 신파극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 탐나더란 말이냐’ 투의 대사가 꼭 들어갔고, ‘전우’나 ‘113 수사본부’ 같은 반공드라마에는 ‘이 종간나 새x, 아오지 탄광’이 매회 빠지지 않았다.

사극 하면 기억나는 대사에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와 ‘성은이 망극하여이다’가 있겠다. 군사독재 시절이라 그런지 대개 사극이라면 군주나 영웅의 비범함을 드러내는 몇 가지 일화에 양념으로 들어가는 규방 비사, 그리고 굵직한 역사적 갈등 구조를 버무린 것이 전부였는데, 그 갈등은 언제나 피끓는 상소를 주상 전하께옵서 ‘통촉하여’ 주시는 것으로 해소된다.

시민사회가 첨예한 이해 구도와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통합해 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결국 최고 권력자의 한마디로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는 이 만화 같은 해석은, 실제로 서슬 퍼런 독재자의 한마디가 곧 법이 되는 현실과 별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실주의’ 작품이 되었다. 시민들의 역사의식 또한 권부의 음모와 규방의 암투에 가두어졌다. ‘공화국’과 ‘시민’이라는 어휘가 한낱 문학적 수사에 불과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옆을 살피지 않고 위를 바라보다

절대 왕정의 사회에서는 주위의 이웃과 소통하며 서로 정보를 나누고 설득하면서 공동의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이 필요없었다. 오직 위를 바라보면서 상부의 뜻을 섬기거나, 그 뜻이 나에게 자비롭고 호의적이기를 바라면 된다.

이웃과의 소통이란 공동체적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그분’에 대한 찬사나 악평을 공유하는 것뿐이다. 내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 뜻과 높으신 결정권자의 뜻이 일치하느냐의 문제이지, 나와 대등하거나 나보다 형편이 못해서 내게 명령하지 못하는 사람의 뜻은 알 바 없다. 세계에 대해서 비판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일, 속칭 ‘깨어 있음’ 또한 우상과 같은 상부의 허세를 조롱하고 그 허위를 지적하면 될 뿐이다. 어차피 권부의 정상에 이를 사람은 정해져 있는 법, 내가 이르지 못할 자리에 오른 누군가를 비틀고 꼬집는 일이라면 훗날 내가 책임질 것도 없다.

   
▲ 민주적 공화국의 시민 정신은 1인 1표의 평등한 주권자끼리 어떻게 의견과 이해를 일치시켜 가는지 그 과정에 주목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반면에 민주적 공화국의 시민 정신은 1인 1표의 평등한 주권자끼리 어떻게 의견과 이해를 일치시켜 가는지 그 과정에 주목한다. 1인 1표라는 선거 방식은, 배운 것 없고 생각이 옅은 사람이 지혜롭고 정의로운 사람과 똑같은 결정권을 가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회가 가야 할 길을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나, 온갖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나 그 발언권과 결정권의 무게는 똑같다.

그렇다면 진지한 사람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동료를 설득하고 마음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 위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옆을 돌아보면서 정보를 나누고 설득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 내 딴에는 성찰 끝에 얻은 직언이라고 듣는 사람 기분을 생각하지 않은 채 쏟아 대서는 안 되고, 말 자체가 옳다 해서 상처받을 사람 입장을 무시하며 툭툭 던져 대도 안 된다. 저 높은 곳의 뜻을 움직이는 것보다 내 옆 이웃의 마음을 여는 일이 그래서 때로는 더 어려운 법이다.

공론화 과정과 의사 결정

정부는 최근 큰 논란이 예상되는 첨예한 사안들을 공론화 과정과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탈핵 정책, 최저 임금제 같은 사안이 그 예다. 이로서 소수의 전문가나 권력실세가 독단적으로 공동의 결정권을 쥐고 흔드는 일은 일단 막게 되었다.

하지만 공론화의 과정은 ‘위에서 떨어지는’ 권위주의적 의사결정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힘들고 낯선 길이기도 하다. 오직 결정권자의 ‘통촉’을 이끌어 내거나, 결정권자 한 사람만 타도해서 될 일이 아니라, 이웃의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 내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어 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없는 살림에 서울 사는 아들 전셋값이라도 보태려고 보상금에 욕심 내는 촌로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일이고, 남들 놀 때 부지런히 공부한 끝에 대기업에서 자리 잡은 중년의 사내에게 새 일을 알아봐야 한다고 통보하는 일이다. 그것은 몇 차례 자영업으로 말아먹고 겨우 부동산 하나 믿고 있는 가장에게 찬물을 끼얹는 일이고 고생하는 딸내미에게 목돈 한 번 주고 싶은 어머니를 단념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공론화의 과정은 그렇게 힘든 것이다. 간교하고 팀욕스런 권력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생각 없어 보이는 내 이웃과 마음을 합하고 뜻을 맞추는 일이 결코 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힘든 일을 마다하는 순간 우리는 또 통촉하여 주시길 앙망하는 충실한 신민이 되는 것이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