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2008년 2월 25일의 대통령 취임식으로부터 장장 9년 동안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힘들여 이루어 낸 역사의 성취가 하나둘 스러져 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한 번 이루어 낸 성취, 한 번 도달한 위치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확고한 업적으로 남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순전히 착각이었습니다. 민주 정부 10년 동안에도 많은 이들이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에 주목하면서 여러 형태로 권력의 분배 장치와 감시 장치를 만들었고, 시민들의 정치의식도 한결 세련되어졌지요. 그래서 과거 권위주의 정부가 회귀하더라도 민주주의 자체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모두 공고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 분도 계셨습니다.

지난 9년은 그런 기대를 그야말로 ‘잘근잘근’ 씹어 먹은 날들이었습니다. 지나간 성취는 언제든 엎어질 수 있는 것이고, 역사의 수레바퀴 또한 역행할 수 있다는 것을 지난 시간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무덤에 묻혀야 할 악령을 끊임없이 불러내려는 이들이 호시탐탐 때를 노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더디더라도 기초부터 쌓아 가는 진중한 발걸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탈핵 정책의 고삐를 잡은 대통령과 새 정부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신고리 원전 공사를 막지 못한 아쉬움은 큽니다. 공사 자체가 처음부터 편법과 탈법을 동원한 협잡질이었지만, 그럼에도 매몰 비용 운운하며 돈다발로 유혹하는 간계에 질끈 눈을 감아 버린 면이 있습니다. 또 그간 탈핵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애써 온 이들의 수고가 온전한 열매로 맺어지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울 일입니다. 결정해야 할 일의 중대성에 비추어 너무 짧은 시간에, 그것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논의가 오간 탓입니다.

하지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고 하던가요, 공론화 과정에서 탈핵이라는 대의에 있어서는 전례 없이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내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혹자는 전투에는 졌으나 전쟁에는 이기는 형국이라고도 합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가 사회 전반을 공동선에로 정향시키자면, 그 권력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혹시라도 있을 수 없는 퇴행의 몸부림을 다소나마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숙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의사결정 방식을 통해서 탈핵 정책의 정당성을 다지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가벼이 볼 일이 아닙니다.

10월 23일 문재인 대통령은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결과에 따라 5, 6호기 공사를 빨리 재개하고, 에너지 정책 전환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했다. (사진 출처 = YTN뉴스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어떤 분들은 새 정부를 뽑아 놓았는데 너무 행보가 더디지 않느냐, 주어진 힘으로 일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느냐고 답답해 하십니다. 그간 변화에 대한 목마름이 워낙 컸기에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마오쩌둥은 “정치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통해서 강제력의 필요성과 효용을 이야기한 바 있지요.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강제력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총구로부터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한 마디 대꾸도 없는 복종을 불러오는 항상 효력 있는 명령이 나온다. 하지만 총구로부터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권력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폭력(강제력)은 개인에게 단순히 수동적 태도를 강요하는 데 반하여 권력은 항상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는 곳에서만 나온다고 봅니다. 달리 말하자면 권력은 개개인의 각기 다른 행동들이 하나의 집단적 형태로 전이되는 과정입니다. 개개인의 다양한 욕구들이 하나의 형태로 집약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설득과 동의는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이 설득과 동의의 과정을 건너뛰려는 태도야말로 강제력의 우위를 통해 반대 입장을 침묵시키려는 폭력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인간적 사회는 설득과 동의를 통해 정당화된 권력이 작동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904항도 공권력과 법치 국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권력이든 같은 목적에 봉사하는 다른 기능들과 다른 권력들을 통하여 더 원만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은 사람들의 독단적 의사가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법치 국가’의 원리다.” 이제 탈핵 논의를 위해서 공론화라는 새로운 제도가 첫선을 보이는 시점에서 정당화된 권력과 법치국가의 원리를 다시 짚어 봅시다. 설득과 동의의 과정은 생략할 수 없는 필연입니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