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의 가치를 어떻게 계승할지 고민

천주교 인천교구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을 열고, 답동 성당에 표석을 세웠다.

6월 3일 인천교구 가톨릭 사회사목센터에서 열린 6월 민주항쟁 30주년 심포지엄에서는 6월 항쟁을 비롯해 인천교구의 민주화 운동사를 살피고, 그 가치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성찰했다. 특히 이날은 발제자뿐 아니라 참석자의 참여도 높았는데, 기념행사가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가치가 이어지려면 젊은 세대와 함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6월 항쟁은 1987년 독재정권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그해 4.13 호헌 조치(당시 헌법대로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뽑겠다는 선언)와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가 더 높아졌다.

6월 10일 전국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린 뒤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시위가 계속됐다.

인천교구, 인천 지역 민주화운동 역사에 함께하다

▲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발행한 1987년 5월 2일 호외 소식지. 5월 1일 교구 사제단의 단식기도 이틀째에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는 소식,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등 사제단 단식기도 지지성명, 전국 교구 사제의 단식 일지 등이 나와 있다. (이미지 출처 = 6월 항쟁 홈페이지)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사망했을 때 인천교구는 <인천주보>에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 실었고, 답동, 부평1동, 소사 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발제를 맡은 박영대 씨(전 인천교구청년회 회장)는 “당시 인천교구가 특정 사안으로 지역별 미사를 동시에 봉헌한 것은 이례적”이라며 “인천교구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중대한 국가범죄로 인식하고 대응했다”고 했다.

4.13 호헌조치 뒤에 인천교구 사제 39명은 4월 30일부터 1주일간 가톨릭회관 6층에서 단식기도를 했다. 당시 단식기도는 전국 교구에서 확산되고 있었고, 인천교구는 매일 오후 8시에 신자들과 함께 답동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6.10국민대회를 앞두고 공문으로 각 본당에 국민대회 날 오후 6시 애국가 제창, 타종과 묵념, 오후 9시부터 10분 소등 등을 실천하고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이들은 인천교구가 인천지역의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함께했다는 것에 입을 모았다. 아직은 시민사회가 조직되지 않은 때에 교회가 시민사회 운동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인천교구는 6월 항쟁 이전에도 노동, 인권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정의평화 활동을 활발히 해 왔다.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비롯해 꾸준히 노동자들과 연대했고, 1977년에는 김병상 몬시뇰(당시 정의평화위원장)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가톨릭노동청년회, 대학생연합회, 노동사목 등 평신도 단체도 정의평화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논평을 맡은 한상욱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은 인천교구의 이런 경험이 6월 항쟁 때도 이어졌다고 했다.

6월 항쟁 열기가 지속되던 7월 12일 인천 가톨릭회관 앞에서 ‘고 이한열 열사 추모 및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대회’가 있었다. 당시 시민 300여 명이 경찰의 진압을 피해 가톨릭회관으로 피신해 철야농성을 했다. 인천뿐 아니라 당시 명동성당, 부산, 광주 가톨릭회관 등에서도 농성투쟁이 있었는데, 한 부위원장은 “이런 과정에서 답동 성당과 가톨릭회관이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었다고 했다. 또 이 공간은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이 생성되는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민주화운동의 주체가 본당 신부, 신자였다고 했다. 현재는 정의평화활동이 정평위 위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당시 본당은 지역 노동자들과 연대했고 주보에서 신자들에게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했다. 한 참가자는 당시를 회상하며 “본당에서 열린 5.1절 대회(노동자대회) 행사에서 발언한 뒤 감시를 당했다.... 당시는 성당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6월 민주항쟁의 영향으로 10월 27일 대통령 직선제가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인천교구는 12월 16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평위, 평협, 수녀연합회를 중심으로 인천교구 공정선거추진위원회(대표 김병상 신부)를 구성했다. 정평위는 본당 신자를 대상으로 이에 관한 교육을 열었다. 그 결과 3000명이 교육을 받았고, 500여 명이 직접 감시단이 돼 인천 시내 50개 투표소에서 선거관리위원과 참관인으로 참여했다.

▲ 6월 3일 인천교구 정평위가 발행한 "천주교 인천교구 민주화운동사" ⓒ배선영 기자
교회 안의 민주주의 성찰해야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인천교구가 지금은 노동자와 갈등하고 있다. 발제자와 참가자들은 인천성모병원과 국제성모병원 사태에 안타까워하며, 교회 내 민주주의를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박영대 씨는 “인천가톨릭대 설립과 인천성모병원 경영권 인수, 국제성모병원 개원이 인천교구 보수화의 지렛대가 되었다”고 했다. 인천가톨릭대 설립 과정에서 인천교구 사제단은 주교에게 반대 의견을 냈다.

그는 다수의 반대에도 학교를 세운 것은 모든 권한이 교구장에게 집중된 교회 조직의 특성 때문이며, 이 일은 인천교구의 민주주의가 퇴행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이어 당시에는 그래도 교구 현안을 두고 사제총회에서 활발하게 토론했으나 지금은 교구장과 교구청 몇몇 사제들 중심이라고 지적했다.

한상욱 부위원장은 6월 항쟁의 가치 정신이 오늘의 교회 활동과 연결돼 있는지 비판적으로 보고 반성해야 하며, 교회 안의 민주주의를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표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자신이 겪은 1987년, 교회의 민주화 운동, 성모병원 사태의 해결방법, 교회가 나아갈 방향 등을 나눴다.

서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회원이었다고 밝힌 한 참가자는 오늘 행사에 젊은이가 없어서 놀랐다며 “이러면 추억하는 것밖에 안 되며, 우리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세대는 민주주의에 관해 논문은 쓰지만 민주주의를 내 일로 여기지 않는다”며 이들이 공감하는 일자리, 노동, 복지 문제와 연결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어른으로서 다음 세대가 살길을 만들어 줘야 한다며 이들과 함께하려는 지향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참석자 박유미 씨는 오늘 기념비를 세웠는데, 주일학교에서 이를 알리는 프로그램도 마련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편, 심포지엄에 앞서 6월 항쟁 표석 축복식이 있었다. 김병상 몬시뇰은 축사에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뒤 사제들이 매주 월요일 가톨릭회관에 모여 기도회를 열고 시국 이야기를 했던 이야기를 펼쳤다. 그는 1977년 ‘정의구현을 위한 특별기도회’ 때 ‘유신헌법 철폐’ 현수막을 걸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유신헌법철폐, 언론자유보장을 내걸었는데, 마이크로 신포시장, 동인천까지 들리게 외쳤다. 기도회 끝나고 신자들하고 걸었다..... 새벽 4시 경찰이 찾아왔고, 6시 미사 뒤에 가겠다고 해서 미사 끝나고 잡혀갔다. 하루 종일 조사받고 오후 4시에 수갑이 채워져 유치장에 갇혔다. 신자들이 유치장으로 찾아와 신부님 내놓으라고 하고, 우유도 사 주고, 기도해 줬다. 그 뒤 학익동 구치소에 갔다. 사상범이라 위험하다고 계속 감시당했다.”

당시 사건과 김 몬시뇰의 인터뷰 등 인천교구 민주화운동 역사는 이날 봉헌된 “천주교 인천교구 민주화운동사”에서 볼 수 있다.

▲ 표석 축복식이 끝나고 심포지엄이 열렸다. ⓒ서경렬

▲ 6월 3일 답동 성당에서 인천교구 6월민주항쟁 30주년 기념 표석 축복식이 있었다. ⓒ서경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