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나의 한 평짜리 집, 고시원

현대의 가장 역설적인 단어 중 하나는 ‘고시원’이 아닐까 싶다. 원래는 고시 공부를 하는 청년들이 모여 사는, 좁은 책상과 작은 침대만이 허용되는 작은 방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이제는 형편이 넉넉지 않은 청년들의 열악한 주거 시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노량진 같은 학원촌을 벗어나면 고시 공부를 위해 고시원에 사는 사람을 보기는 힘들다.

나는 대학교 근처의 고시원에서 반 년 살아 본 적이 있고, 현재는 노고산동의 어느 고시원에서 생활 중이다. 그런데 이번 고시원은 대학과 거리가 꽤 있어서인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고시원에 대한 편견이 또 한 번 깨졌다. 이곳에는 고시생은커녕 청년도 몇 명 없고 40-50대 장년층이 대부분 살고 있다. 그분들이 어떤 일을 삶을 살아 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젊었을 적 열심히 살지 않아서 지금 이 쪽방에서 홀로 살아가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제 고시원은 보증금을 낼 여력이 없는 도시의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한 평의 개인 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좁은 방은 감옥보다 작고 많은 경우 햇볕도 잘 들지 않는다. 가끔 지방에 있는 고향 집에 내려가면 스스로가 호강에 겹다는 생각이 든다. ‘내 방이 원래 이렇게 좋았었나? 서울에서 이런 방을 구하려면 얼마가 들지?’ 어느덧 서울 생활 6년차. 기숙사도 살아 보고 자취도 해 보고 남의 집에서 신세도 져 보고 많은 곳을 전전하다 결국 고시원에 들어왔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으려니 고시원밖에 갈 곳이 없었다. 한 평 남짓, 날이 더워지면 가만히 있는 것조차 힘든 곳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자유의 한 평이 그 어떤 곳보다 차라리 편했다.

복지 사각지대의 청년들

▲ 대개 고시원 방은 몸을 겨우 뉠 작은 침대와 코딱지만 한 책상 하나씩 들어갈 크기다. 1.8x1.6미터 정도. (이미지 출처 = Flickr)
베이비부머 세대의 자식뻘, 혹은 그보다 조금 어린 우리 세대는 해방 이후 가장 불평등하며, 부모 세대보다 잘살기 어렵고, 교육 수준은 높지만 취업률은 낮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지망하는 대학은 대부분 서울에 몰려 있고, 지방 사람이 서울행을 택할 경우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 쉽지 않아 쪽방에 끼니를 굶는 것은 흔한 일이다.

청년 1인 가구는 날로 그 수가 많아지는 것에 비해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다. 최근 몇 년 서민을 위한 주거지 정책은 주택공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제는 주거 복지 개념이 필요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 그 개념을 논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주거 복지란 사회 복지 차원에서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누릴 최소한의 주거 수준이 권리로서 보장되는 것을 말한다.

고시원은 열악하지만 그나마 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이다. 그러나 주택법에 의해 주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준주택으로는 규정되지만 준주택 개념이 생긴 지 오래지 않은 터라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주거지 규정과 불일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택법을 준수한다 해도 문제다. 분명 더 많은 관리비가 필요할 것이며 그렇게 오른 방세를 감당할 수 없으면 이 한 평짜리 보금자리에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젊어도 괜찮지 않아요

아동 복지, 노인 복지에 비해 청년 복지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비판 받기 쉽다. 학생 신분의 청년 1인 가구, 취업 준비생이나 구직을 원하는 취업자에 대한 복지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이와 같이 말한다. 그게 근본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데에 주력해야지, 청년이 약간의 돈에 안주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 청년의 삶을 정말 잘 안다면 복지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복지는 국가가 사회 안전망으로써 기능하기 위해 함께 가는 개념이다. 현대의 국가는 국가 자체를 강하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구성원들을 격려하고 이용하는 전체주의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살아가기 위한 최후의 안전망으로 기능하기 위해 존재한다.

경제적 어려움은 사회적, 문화적 소외로 이어진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을 겨우겨우 해내기 바쁜데,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문화생활을 나누는 것은 꿈꾸기 어렵다. 그 소외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와 어려운 사회 상황까지 짓누르니 정신적으로 건강하기가 힘들다. 우리나라의 20-30대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앞으로 오랜 시간 경제 주체로 일할 사회의 소중한 인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는 경우가 가장 많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옛말이다. 오히려 젊음이라는 무게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고 누군가를 원망하지 못하게 한다.

▲ 우리 모두에게 아빠카드가 있다면 어떨까?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 모두에게 ‘아빠카드’가 있다면

이 한 평짜리 방에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자괴감의 공간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그것은 이런 곳에서밖에 살 수 없다는 자괴감이 아니라, 옆방에 있는 사람과는 달리 최후의 보루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소위 말하는 ‘아빠카드’가 그것이다.

사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아직 독립세대가 아닌지라 건강보험료는 부모님을 통해 지불되며, 건보료에 따르면 나는 중산층이다. 아버지는 독립은 좋지만 그래도 굶지는 말라며 언제든지 쓰라고 카드를 주셨다. 그 카드는,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과는 달리 아주 절박한 순간 구원자가 되어 준다. 무너지는 자존심과 부끄러움은 그에 비해 작은 비용이다. 아빠카드는 가난하지 않으면서 가난을 체험하며 사는 것에 대한 은근한 우월감과 옆방의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무의식 중의 계층의식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죄책감으로 돌아와 자존감을 짓밟아 버리곤 했다.

그런데 만약 우리 모두에게 아빠카드가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모두 국가라는, 사회복지라는 최후의 카드를 권리로서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자괴감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불확실함 속에 어렵게 살지만, 내가 인간다움을 포기하며 살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 그 희망에서 오는 타인도 나처럼 도움 받기를 바라는, 또한 함께 돕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우리 사회의 아주 튼튼한 기반이 되어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더불어 사는 나라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

먹고 입는 것은 어떻게든 아낄 수 있는 반면에, 주거지는 아낀다는 개념보다는 삶의 질을 포기한다는 개념의 삶의 조건이다. 청년의 바람은 소박하다. 매일 밤 잠드는 곳이 적어도 스스로를 더 우울에 빠지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모두가 사회라는 이름의 아빠카드를 가질 수 있는 날, 우리 청년은 내일을 위한 든든한 인지로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새 대통령이 말했던 ‘나라다운 나라’가 그런 곳이었으면 한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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