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말하는 진실이란 무엇일까. 탄핵 심리 기간 내내 국민의 의문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약속한 조사도 받지 않고 마침내 헌법재판관 만장일치로 탄핵이 결정되었음에도 승복의 메시지 없이 이틀을 보냈다. 그 사이 태극기 집회의 격렬한 시위 속에 3명이 죽었다. 그러고는 저 짧은 문장이 다였다. 여전히 억울하고,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에 의해 이렇게 물러나는 것이라는 태도. 조금이라도 이 나라를 생각했다면 하루 빨리 분열을 치유하는 데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려는 의지가 있어야 했다. 그는 결국 힘없는 왕을 떠나보내는 백성인 양 애처로이 우는 태극기 부대의 격려 속에 삼성동 사저로 들어갔다. 이로써 분열과 대립의 골은 더 깊어졌다.

도대체 신념이 무엇이기에

지난 해부터 이어져 온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서, 같은 공간 속에 너무나 다른 세상을 보고 듣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질문이 있었다. ‘과연 내가 옳을까?’ 탄핵 정국 초기에는 여전히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탄핵 반대 집회를 열어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이 사건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리로 볼 수 없는 것이며, 객관적으로 정상적인 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라면 탄핵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양측의 집회가 장기화되면서 내가 그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으로 여기듯 똑같이 그들도 촛불시민들을 답답하게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하자 혼란스러워졌다. 그들도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바라본다고 생각할 것이며 결코 탄핵이 인용돼선 안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를 비정상으로만 봐서야 이 분열이 나아질 리가 없었고, ‘신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체 신념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다른 세계를 만들고 다른 판단을 내리게 할까.

‘신념이란 논쟁을 용납하지 않는 결정된 믿음이다’. 신념 정치를 표방한 마가렛 대처 총리는 신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 단어는 꽤 긍정적인 느낌을 주며 막연히 ‘선’에 가까운 것으로 와닿지만, 사실 신념 자체에는 선악의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것이 집단이 요구하는 가치로부터 온 것이든,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든, 개인의 경험으로 굳어진 것이든, 고정된 믿음과 그것을 고수하는 태도가 바로 신념이다. 따라서 다분히 주관적이며 때때로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념을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있을까? 그 판단은 시대에 따라 혹은 소속된 집단에 따라 바뀌는 가변성을 갖는다.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한 잔 다르크는 500년 뒤 바로 그 가톨릭 교회로부터 성인의 칭호를 받았으며, 안중근 의사는 한국에서는 독립투사이지만 일본에서는 여전히 테러리스트다. 그 누구도 신념을 절대 진리로써 평가할 수는 없다.

▲ 2016년부터 광화문과 시청 광장에서 수많은 시민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촛불집회를 했다. ⓒ왕기리 기자

베버의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독일의 저명한 사회과학자이자 사상가인 막스 베버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다룬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념을 비중 있게 다룬다. 그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이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으로서 그 자체로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신념의 맹점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신념 윤리란 개인의 열정에 기반한 것으로 행위의 결과보다 행위를 유발하는 선의 의지나 도덕적 신념을 우위에 둔다.(여기서 열정이란 소명의식을 갖는 정치인이 행위를 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말한다) 반면, 책임 윤리는 책임감을 기반으로 행위에서 예견되는 결과와 결과에 대한 책임에 더 무게를 둔다. 신념윤리에 의하면 이념의 가치 구현이 정치의 목적이 되며, 순수한 신념에서 나오는 행위는 그 결과가 나쁘다 하더라도 그 책임이 행위자 본인에게 있지 않고 타인의 어리석음이나 신에게 있다. 그러나 책임윤리는 행위의 목적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정치적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평균적 결함을 고려하며 자기 행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윤리 원칙들은 상호 대립되는 면이 있지만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정치적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념 없는 정치는 빈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책임윤리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맹목적 열정에만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책임윤리라고 덧붙이고 있다.

촛불과 태극기의 신념과 책임

소명 의식과 신념을 강조한 베버조차 책임감이 따르지 않는 신념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다시 현실 정치로 돌아와 촛불과 태극기의 대립을 살펴보자. 두 집단은 박 전 대통령의 신념과 책임을 모두 고려하고 있는가? 촛불을 든 사람들 안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신념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 몇 주 전 안희정 충남지사의 ‘선의’ 발언이 논란이 되었던 것이 그 예다. 그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도 좋은 나라 만들자는 선의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그 과정에서 원칙을 어기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 문제라고 했다. 잇달아 밝혀지는 국정농단의 실체를 목격하는 우리 국민들은 도저히 박 전 대통령의 행위에서 선의를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안 지사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 안에는 정치인의 선의만으로는 그 행위가 선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논리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촛불 시민들은 박 전 대통령의 신념에 선의가 있고 없고를 떠나 결국 드러난 결과와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엄중히 묻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인의 책임윤리를 강조하는 촛불 시민들은 신념윤리 역시 판단의 척도로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한 번이라도 박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를 그의 이념과 그 가치 구현을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 여기고 판단을 시도해야 한다.

▲ 2017년 3월 12일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반면 태극기 시민들은 책임윤리에 대한 숙고가 전혀 없어 보인다. 박 전 대통령에게 선의가 있었던들,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에게 악의가 없었음을 강조하는 정치인을 옹호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그들 자신의 신념과 책임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 ‘내가 믿는 신념에 대한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가?’ 법치주의 국가에서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전원이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했는데 이에 불복한다는 것은 헌법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헌법을 부정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만을 따랐을 때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가? 그들은 헌재가 ‘떼법’에 넘어갔다며 촛불 시민들이 광장에서 떼를 쓴다고 말하지만 정작 영양가 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은 그들이었음을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그들의 신념에는 책임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흡사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는 극단적 신도들의 모습이다.

신념이라는 이름의 우상

가장 무서운 우상숭배는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신념에 대해 끊임 없이 고민하고 의심하며, 그저 자신이 믿는 것이 주님의 길에 가까운 것이길 기도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예측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태도가 없다면 그 신념이 틀릴 가능성이 높음을 항상 자각해야 한다. 어제 저녁 삼성동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맞이하는 자칭 애국시민들의 모습에서 다른 의미의 귀감을 얻는다.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되는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책임 없는 신념을 맹목적으로 좇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목격하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균형 없이 어느 한 쪽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깊어진 대립의 골을 결코 메울 수 없을 것이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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