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그렇다. 데레사 포카데스 수녀의 삶도 그 자신에 찬 표정과 막힘없는 언변처럼 늘 밝고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십대를 라틴 아메리카에서 보낸 적 있는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살아남은 자의 슬픔’처럼, 그때 살아남았던 기억이 일종의 죄의식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 당시 엘살바도르의 예수회원들의 순교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지만, 수천 명의 민중이 죽어 갔고 지금도 사회와 ‘부자 교회’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현실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레오나르도 보프의 책을 접하고 신학에서 강력한 힘을 발견한 그는 해방신학이야말로 ‘진짜 신학’이라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삼위일체론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에 이른다. 자유, 진리, 사랑을 주제로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삼위일체론을 이어 받으면서도 자유에 대해서,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유독 강조했다. 그런 뒤에 찾아온 바티칸의 조사. 아마도 데레사 수녀는 ‘민중이 학살당하는 순간에 교회는 맨 앞줄에 있어야 했다’고 불을 토하듯 고발한 그 교회로부터 ‘사상 검열’을 당했을 때, ‘도대체 왜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를 적어도 한 번쯤은, 아니 시시때때로 고민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그 수도원에서, 수도자의 신분에서 놔 주는 것도, 그리하여 더욱 더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도 자신이 깨달은 그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교회’를 그토록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도 그의 정적들처럼 ‘수도자에 대한, 수녀의 지위’에 대한 다른 생각이 있어서일까.

▲ 데레사 포카데스 수녀 인터뷰 장면. (이미지 출처 =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여기서 가브리엘(가명, 58)의 등장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다. 그는 바르셀로나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지내고 내쳐 국제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같은 바르셀로나 학생회 출신과 결혼할 당시 처가 측에서 제공한 아파트를 ‘부르주아지의 잔재’라며 거부한 피끓는 혁명가이기도 했다. 다정다감하며 재기 발랄한 그는 교리교사 중에서도 단연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데레사 수녀가 유명세를 타고 난 뒤의 어느 날, 가브리엘에게 다가와 “고등학교 때 저를 지도한 교리교사였다”며 인사를 건네 오는 사람이 다름 아닌 데레사 수녀가 아닌가! 지금도 메리 홉킨스의 ‘도우즈 워 더 데이즈’를 그냥 흘려듣지 못하고 눈물 바람을 뿌리곤 하는 감상과 그것을 넘어선 열정 때문에, ‘바르셀로나 운동권 스타’ 데레사 수녀의 활약상을 남의 일 같지 않게 헤아리고 있는 그였다. 그런데 과거에 데레사 수녀가 자신의 학생이었다니, 더욱이 그것조차 기억 못하다니 낭패가 아닌가.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았건 몰랐건 달라질 것은 없었고, 특히 그가 데레사 수녀에 대해 갖는 양가적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특별한 감정이 그에게 있었던 것일까.

가브리엘은 데레사 수녀가 스스로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자기가 나서면 안 되는 게 없다’고 굳게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녀’로서이지 운동가나 정치가 데레사 포카데스로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늙지 않았다. 데레사 수녀의 활동은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수녀로서의 지위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데레사 수녀는 수녀복을 벗고서도 당시 누리고 있던 인기와 지지를 한 몸에 받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러한 믿음은 그녀로 하여금 선거에 출마하는 ‘무리수’를 두게 하였다. 결과는 데레사 수녀가 예상하지 못한 ‘패배’로 끝났다. ‘수녀의 지위’, 곧 수녀복이 갖는 프리미엄이 카탈루냐에서 자신이 해 온 활동의 상당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데레사 수녀의 후퇴는 기민하고 조용했다.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 수녀복을 입고 전처럼 하루에 5시간씩 기도하면서 내공을 더 쌓으면 되었다. 물론 수녀회를 떠난 것이 아니었으므로 내색할 필요도 없이, 패인에 대한 분석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만 추스르면 더 정리하고 말고도 없었다. 그러나 그 분석과 정리 안에 신학적 반성, 곧 ‘수녀복의 상징’이 주는 맹목과 허위의 타인의 시선과 타협해 버린 자기 신앙의 맨얼굴을 부끄러움으로 직시하는 것도 포함되었을까.

▲ 사복 입은 데레사 포카데스 수녀. (이미지 출처 =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오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탄핵을 지지하면서도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자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는 수녀들의 모습을 보았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녀들은 그렇게 사회 정의와 평화, 평등이 요구되는 곳이면 용산으로, 밀양과 제주 강정으로, 노동과 농민의 고통을 보듬고 세월호 아이들을 가슴에 묻지 못하는 부모들과 함께 울고 또 울었다. 시대의 예언자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국 천주교회가 일반인들에게 존경을 받아 왔다면 그 반은 이같은 수녀들의 헌신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꼭 거기까지였다. 그것이 사회만을 향했을 뿐, 교회 안에서는, 더 작게는 본당에서는 그런 목소리는 결코 울리지 않았다. 아니 본당에서 신부들에게 이유 없는 면박과 무시를 당해도, 그것의 뿌리가 왜곡된 교회 권력에 있음에도 그것에 저항하고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또 교회 내 여성 인권이나 지위가 점점 더 후퇴하는 상황에서도 이에 대한 어떤 목소리를 낼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 소외감을 평신도 위에 있다는 자족감으로 상쇄시키는 구조를 이미 내면화, 체계화한 탓일까. 교회의 삶이 수도자들의 일상이라면 그 안에서의 진실성 없이 사회에서 어떤 진실과 정의를 구현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수녀들의 ‘예언적 행동’은 위선적이거나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데레사 수녀가 정녕 성령의 자유하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것에 늘 깨어 있다면 ‘성령은 모든 것에서 활동하며, 그렇지 않다면 아무 것에서도 활동하지 않는 것’임을 일상 안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 안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여 수녀복이 신앙의 골갱이가 아니라 나와 너를 구분하고, 수도자와 평신도를 차별하는 상징이요 기제라면 당장 벗어 버려야 한다. 그 잉여적 삶을 당장 벗어 버리는 것이 성령의 자유, 그의 자유를 온몸으로 살아 내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데레사 수녀는 언제부터인가 평복을 잘 입는다. 단색의 셔츠가 맵시 있는 게 친근한 이웃집 누이처럼 보일 것만 같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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